179화. 38 – 3
숨기다니. 말도 안 되는 추측에 웃음이 나왔다. 나는 키득거리며 말했다.
“결혼할 여자가 있으면 어머니께서 쌍수를 들고 환영하실 텐데요?”
진심이다. 올리버가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있다고 하면 어머니는 우선 기뻐서 오라버니를 끌어안겠지. 그러면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양쪽 손이 들릴 거 아냐?
하지만 리사가 말하고 싶은 건 다른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더니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리고 약간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여자를 당신 부모님께서 반기지 않으실 수도 있죠.”
그럴 리가 없다.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줄리아와 로렌에게 듣기로는 상대방이 평민이라고 했다. 물론 부유한 상인의 딸이겠지만 평민이겠지.
어머니가 평민이라는 이유로 거부하실까.
그럴 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문을 생각하면 반대하실 가능성도 있었다. 아니면 너무 어려도 반대하시겠지.
나는 리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군지 아나 봐요?”
보통 누군가가 결혼한다고 하면 누구와 결혼할지 궁금해하지 부모가 반대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할 거라고 생각한다는 건 결혼할 상대가 누구인지 안다는 뜻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리사는 내 질문에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품에서 카드를 하나 꺼내 내밀며 말했다.
“이곳의 직원이래요.”
직원? 노동자라는 말이다. 줄리아와 로렌은 노동자 계급이지 노동자는 아니라고 했는데?
리사가 내민 카드는 어느 커피 하우스의 홍보물이었다. 커피 하우스라고? 나는 깜짝 놀라서 홍보물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노동자인 것도 놀라운데 커피 하우스라고? 잠깐.
커피 하우스의 이름이 익숙했다. 푸른 밤 커피 하우스. 이거, 엘리엇이 인수했다던 그 커피 하우스 아닌가? 엘리엇이 인수한 후에 이름을 바꿨다고 했는데.
“비스컨 남작은 아무 말도 안 하던가요?”
다시 리사가 물었다. 나는 홍보물에서 시선을 떼고 그녀를 쳐다봤다. 아무 말도 안 했다.
“어, 사실 어제 물어봤는데 없다고 하던걸요.”
진짜 없는 반응이었다. 아니, 잠깐. 내가 요새 누구 만나냐고 했을 때 당황한 표정이긴 했지. 그게 내 질문이 황당해서가 아니라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였나?
“백작 부인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아서 숨기고 있는 건 아니고요?”
올리버가? 나는 고개를 저으려다가 멈췄다. 내가 아는 올리버라면 그럴 리가 없다. 올리버는 자존심이 중요한 사람이거든. 그리고 올리버의 성격상, 사랑하는 여자를 허락받지 못할 것 같아서 숨기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올리버가 구혼하는 건 못 봤거든. 남자들은 구혼을 시작하면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소극적이라 생각한 남자가 구혼을 시작하자 굉장히 적극적으로 변하는 걸 봤다. 반대로 늘 적극적이던 남자가 구혼할 때는 자신감 없어 할 때도 봤고.
하지만 나는 리사에게 고개를 저었다. 부모님께는 소개할지 말지 고민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이렇게 온 사람이 다 아는데 아직도 말을 안 한다는 건 이상하다.
“그건 아닐 거예요. 소문이 이렇게 났는데 아직도 숨기지는 않을 테니까요.”
적어도 나한테는 이야기하겠지. 어머니를 설득하는 걸 도와달라고.
“소문이요?”
리사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소문났으니까 나한테 물어본 거 아니었어? 내가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자 리사가 다시 물었다.
“비스컨 남작이 구혼 중이라는 소문이 났어요?”
“소문이 났으니 당신도 아는 게 아니에요?”
물론 누군가에게 돈을 주고 산 정보라는 건 안다. 하지만 그 정보를 본인이 팔지는 않았을 거 아냐? 누군가 그 소문을 듣고 정보로 판 거겠지.
하지만 리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소문 안 났을 거예요. 아는 사람은 딱 네 명뿐이라고 맹세까지 하고 갔으니까요.”
“네 명이요?”
줄리아와 로렌, 아이다까지 벌써 세 명인데? 잠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리사가 건네준 홍보물로 시선을 돌렸다. 이 커피 하우스의 직원이라고 했다. 줄리아와 로렌이 이야기한 사람은 부유한 상인의 딸이었고.
“이 여자분, 성함이 뭐라고요?”
“뒤에 적어 놨어요.”
일 처리 한 번 확실하다. 리사의 말에 홍보물을 뒤집은 나는 거기에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확인했다. 확실히 줄리아와 로렌에게 들은 이름과 다른 이름이었다.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리버가 여자를 만날 수 있지. 당연히 구혼을 할 수도 있다. 오십 보쯤 양보해서 신분이 다른 여자와 만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귀족들은 같은 귀족을 만나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
그리고 백 보쯤 양보해서, 올리버가 만나는 여자를 소개하는 걸 미루고 있을 수도 있다. 내가 아는 올리버라면 상대방과 결혼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 거라면 애초에 부모님께 숨길 리도 없지만.
올리버는 단순하다. 그게 가끔, 아니, 꽤 자주 짜증 나고 부끄럽지만, 장점 역시 분명하다.
결혼할 게 아니라면 처음부터 여자를 만나지 않는다. 그리고 상대방이 결혼 생각을 했다면 어머니가 충격으로 몸져눕더라도 결혼을 진행했겠지.
하지만 그래. 백 보쯤 양보해서 올리버가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그런 여자가 둘이라고? 이건 말도 안 된다.
“유제니.”
다음 날, 나는 하몬 가의 티 파티에 참석해 있었다. 확실히 부유한 집이라 그런가 그런트 가의 티 파티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화려하다. 나는 사람들과 따로 떨어져서 센터피스로 장식해 둔 이름 모를 꽃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 꽃, 아무리 봐도 이 근방에서는 본 적이 없는데. 티 파티를 위해 아주 멀리서 공수해 온 게 분명하다.
어마어마한 돈을 지불했겠군. 그런 생각을 하는데 베라가 다가왔다.
“베라, 아주 멋진 티 파티네.”
나는 베라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오자마자 참 훌륭한 집이라고 칭찬하긴 했다. 하지만 칭찬이란 몇 번을 해도 부족하지 않은 법이지.
“감사합니다.”
내 칭찬에 미소를 지으며 인사한 베라가 한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유제니는 점 안 보고 싶어요?”
참석한 사람들 모두 베라가 쳐다본 쪽에 몰려 있다. 거기에는 베라의 부모님이 도와줬다는 그 점술가가 앉아 있었고.
나는 사람들에게 가려져 거의 보이지 않는 점술가를 한 번 쳐다본 뒤 고개를 저었다. 점을 본다는 것 자체는 재미있겠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내키지 않는다.
“사람이 많아서.”
저기 모여 있는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을 보고 싶은 거겠지. 그렇다면 내키지 않는 내가 물러나는 게 맞다. 내 말에 베라는 인상을 쓰며 점술가 쪽을 쳐다보더니 다시 내게 말했다.
“보고 싶으면 말해요. 유제니 먼저 봐 달라고 할게요.”
약간 뻐기는 듯한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로렌이 너무 어른스러운 거겠지. 보통 평범한 십 대 소녀라면 베라와 같을 테니.
줄리아도 이런 적이 있다.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었지. 몇 년 전 일이긴 하지만.
“그래. 보고 싶어지면 말할게.”
나는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런트 가보다 더 부유해서 그런지 하몬 저택은 아주 화려했다. 이 그림, 몇 달 전에 최고가를 기록하며 낙찰됐던 걸로 기억한다. 구매자가 하몬 경이었구나.
그리고 저기 있는 그림은 몇 년 전에 경매에 나왔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실제로 보고 싶었는데 하몬 경이 가지고 있었군.
솔직히 말하면 나는 점보다 이 저택에 있는 그림을 보는 게 더 좋았다.
“아, 그림 볼래요?”
내가 그림을 구경하는 것을 깨달은 베라가 신이 난 표정으로 물었다. 어린애 같다. 나는 자기 장난감을 자랑하는 것 같은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지난달에 아버지가 구매하신 거예요. 이거 하나면 이 집을 살 수 있을걸요?”
안타깝게도 베라는 화가나 화풍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벽에 걸린 그림을 구경하며 그림의 가격을 듣다가 물었다.
“전 주인이 누구였는지는 알아?”
“전 주인이요?”
모르는 모양이다. 베라의 얼굴에 그걸 왜 묻냐는 표정이 떠올랐다. 나는 그림을 제대로 보기 위해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이 그림, 세리길이 마지막으로 그린 거로 알려졌거든. 원래는 그녀의 남편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남편 사망 후 그 집에서는 발견이 안 됐대.”
알고 있어? 그런 표정으로 베라를 쳐다봤지만, 그녀는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었다. 음.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흥미가 없는 걸까.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인데.
“그림을 좋아하는군요?”
베라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물었다. 좋아한다. 그림뿐 아니라 음악도. 연극도 좋다. 책도 좋아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게 좋아. 어떤 상황에서 무슨 생각으로 만들어 냈을지 생각하는 게 재미있잖아.”
다시 베라를 쳐다봤지만, 그녀는 이번에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자연 경관을 보는 것도 좋긴 하다. 하지만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한정적이다. 아버지의 영지와 수도. 가끔 친구의 부모님 영지로 놀러 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올리버처럼 친구 몇 명과 단출하게 여행을 다니기는 어렵다. 결혼하면 남편과 다닐 수는 있겠지. 남편이 허락한다면.
아니면 내가 결혼하지 않고 혼자 늙는다면 하녀를 데리고 여행을 다닐 수도 있겠지. 그 정도로 돈을 벌어 둔다면 말이다. 흠, 결혼의 단점을 찾아낼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쨌거나 나는 아름다운 걸 보는 게 좋다. 자연이 만든 것도 인간이 만든 것도 좋다.
“그런 생각은 안 해 봤어요.”
베라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랬다. 내 가정 교사가 알려 주기 전까지. 나는 우리 앞에 선 그림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세리길은 재능 있는 화가였지만 아무 지원도 받지 못했대. 그녀의 남편도 그녀가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싫어했다지.”
“이렇게 비싼 그림을 그렸는데요?”
그녀의 그림이 각광받기 시작한 건 그녀가 죽은 다음의 일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서 세리길의 남편은 그녀의 그림을 모조리 헐값에 팔아 치웠다고 해. 아마 그가 지금 세리길의 그림이 얼마에 팔리는지 알면 무덤에서 기어 나올걸?”
술 한 잔에 그림 두 점을 넘긴 적도 있다고 한다. 그의 술값을 내준 사람은 아주 횡재했겠지. 이 그림도 팔았다는 기록이 없는데 여기 있는 거 보면 그런 식으로 헐값에 넘긴 그림일 것이다.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그림의 가치를 모르는 자가 가지고 있었다가 어떻게 망가졌을지 모르니까. 세리길의 남편이 죽고 나서 그 집에서 발견된 그림 중에는 관리되지 않아 곰팡이가 핀 것도 있었다고 한다.
내 이야기를 들은 베라는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그리고 내 옆에 서서 그림을 구경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