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8화 (173/239)

178화. 38 – 2

안다.

하지만 나는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거절했대?”

“뭐? 네가 거절했다며.”

거기까지 말한 올리버가 멈칫했다. 그는 들켰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가 거절했다며. 왜 거절했는지 너는 알 거 아냐.”

거절한 것까지 알면서 왜 모르는 척하는 건지 모르겠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런 건 직접 물어봐야지. 클레어한테 물어봐.”

“어떻게 물어봐?”

어떻게 물어보냐니. 나는 한숨을 내쉬고 상냥하고 친절하게 말했다.

“우선 클레어에게 편지를 쓰는 거야. 몇 월 며칠 몇 시에 만나러 가고 싶은데 시간이 괜찮은지. 만나서 에스컬레 경의 권유를 왜 거절했는지 듣고 싶다고 쓰고.”

잠시 내 이야기를 듣던 올리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이를 악문 목소리로 말했다.

“약속 잡는 법 정도는 알거든?”

알아야지. 그건 인간관계의 기본이니까. 나는 진짜 그러냐는 표정으로 올리버를 쳐다봤고 올리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계단 손잡이에 등을 기대고 서더니 잠시 자기 구두를 내려다봤다. 아니면 내 구두를 내려다봤거나.

“너 그 구두를 신고 나갔다 온 거야?”

젠장, 내 구두였군.

내 구두를 확인한 올리버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뭐가 어때서? 나는 턱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올리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좀 높은 거 신고 다녀. 키도 작은 게.”

“어허. 오늘 줄리아와 몇 시간 걸어 다녔는지 알아? 오라버니가 같이 다닐 거 아니면 입 다물어.”

“키 너무 작으면 남자들이 싫어한다.”

하. 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오라버니지만 도저히 예뻐할 수가 없다. 나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남의 키나 구두에 신경 쓰는 남자도 여자들이 싫어해.”

평소라면 안 먹힐 공격이다. 올리버는 내가 이렇게 받아칠 때면 그런 남자도 잘생기면 상관없다고 말하곤 했다. 어우, 재수 없어.

하지만 내 말을 듣자마자 그는 약간 상처받은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래서 날 싫어하나?”

뭐라는 거야? 나는 올리버가 대체 왜 이러는지 몰라서 미간을 찡그렸다. 살면서 올리버가 이렇게 시무룩한 모습은 처음, 아, 아니다. 지난번에 조정 시합에서 두 번째로 들어왔을 때도 반나절 정도 시무룩했었다.

“누가 오라버닐 싫어하는데?”

내 질문에 올리버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는 다시 입을 다물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것보다, 라넌 경이 왜 검은 늑대로 안 갔는지나 알려 줘.”

그걸 왜 궁금해하는 걸까. 나는 가만히 올리버를 쳐다봤다. 올리버가 궁금해하는 게 이상한 게 아니다. 클레어가 에스컬레 경의 권유를 거절한 지가 언제인데 이제 와서 궁금해하느냐가 이상한 거지.

“그게 왜 이제 궁금해?”

내 질문에 올리버가 멈칫했다. 나는 뒤이어 물었다.

“클레어가 그 제안을 거절한 게 언젠데? 이제 와서 궁금한 이유가 뭐야?”

올리버와 클레어 사이에 뭔가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다. 둘이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렸거든. 저러다 클레어가 올리버를 진짜 한 번 호되게 혼내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기도 했다.

그러더니 올리버가 클레어를 도와주느라 흰 사자 기사단의 미움을 산 뒤로 두 사람 사이가 좀 좋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납치된 올리버를 구하는 걸 도와준 뒤로 클레어는 오히려 올리버를 피했다.

애초에 두 사람 사이가 왜 나쁜지도 모르겠다. 언제 한 번 클레어에게 왜 그렇게 올리버를 싫어하는지 물어봐야겠다.

“아, 됐어.”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던 올리버가 불쑥 그렇게 내뱉더니 몸을 돌렸다. 어어? 나는 그가 왜 그러는지 몰라서 올리버의 등에 대고 물었다.

“왜 이제야 궁금해졌냐니까?”

“아, 됐다고!”

아니, 대체 몇 살이야? 왜 저러는 건데? 짜증 낼 사람은 이쪽이다. 자기가 쫓아와서 물어봐 놓고 도망치는 건 무슨 경우래?

하지만 하필이면 그때 머릿속에 올리버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게 생각났다. 나는 재빨리 올리버를 따라 계단 아래로 내려가서 물었다.

“잠깐만.”

“왜, 또?”

또라니, 또는 내가 할 말이다. 나는 어린애처럼 심술부리는 올리버를 보고 콧잔등을 찡그렸다. 누가 데려갈지 몰라도 데려간 여자가 고생 좀 하겠다.

부디 그게 지금 내가 말하는 여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너무 미안하잖아.

“요즘 만나는 사람 있어?”

“뭐?”

내 질문에 올리버의 얼굴이 확 굳었다. 이게 정곡을 찔려서 놀란 표정인지, 어이가 없어서 놀란 표정인지 모르겠다.

“만나는 사람 말야. 여자.”

혹시라도 친구라고 오해할까 봐 나는 콕 집어서 여자라고까지 말해 주었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올리버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걸 왜 물어보는 거야?”

그동안 내가 올리버의 결혼 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으니 이상하기도 하겠지. 걱정하는 어머니와 달리 나는 올리버가 누구와 결혼할지 별 관심이 없었다.

그야 그동안 나는 내가 결혼해서 비스컨 가를 떠날 줄 알았으니까. 그리고 올리버와 어머니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거니 했지.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음, 오라버니가 누굴 만난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누구?”

어, 아닌가?

올리버는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아니야?”

“누구와 만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누구와 만나냐고 물었는데 그 누구가 누구냐니. 꼭 진짜 만나는 사람이 있는 것같이 구네.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만나는 사람이 있어?”

올리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아니, 없어.”

“그런데 누군지 왜 자꾸 물어봐?”

“누가 그런 헛소문을 퍼트리는지 궁금하잖아.”

아, 그건 그렇겠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헛소문인가 봐. 줄리아가 아카데미 모임에서 오라버니가 결혼한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하더라고.”

그 순간, 올리버가 웃음을 터트렸다. 깜짝이야. 놀란 내게 올리버는 킬킬대며 말했다.

“결혼? 내가?”

“뭐, 오라버니라고 평생 혼자 살 건 아니잖아.”

나는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차기 비스컨 백작으로서 올리버는 결혼을 하고 후계자를 봐야 한다. 그리고 비스컨 가문을 물려줄 아들을 잘 키워야 하고.

올리버의 상태를 보건대 그 여자가 아주 현명한 사람이어야겠지. 나는 우리 집안의 미래를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그렇지.”

다행히 올리버는 평생 혼자 살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어깨를 으쓱하더니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올리버가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니. 나는 생소한 장면에 어쩔 줄 몰라 눈을 깜빡였다. 다행히 생소한 장면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평생 혼자 살 건 아니야.”

우리가 방금 한 이야기가 그 이야기 아니었나? 나는 올리버가 왜 이러는지 몰라 인상을 썼다. 하지만 올리버는 내 의문을 해소해 줄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그대로 현관을 향해 걸어가면서 말했다.

“어머니께 저녁 먹고 들어온다고 전해 줘.”

어머니가 계시는 응접실이 바로 옆에 있다. 직접 말하라고 소리치려 했지만, 올리버는 이미 빅스의 배웅도 마다하고 나가 버린 뒤였다.

“도련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빅스가 내게 다가와서 물었기 때문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점이 짜증 난다는 거야, 올리버 비스컨.

“비스컨 남작님이 구혼 중이라던데, 사실이에요?”

놀랍게도 올리버가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꽤 널리 퍼진 모양이다. 나는 리사와 차를 마시다가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들었다.

“어디서 들었어요?”

리사도 아카데미에서 들었나? 리사의 백부가 아카데미 이사긴 하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리사의 백부인 그런트 백작님도 이 소문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아니면 리사는 전혀 다른 데서 들었을지도 모르고. 어느 쪽이건 이 소문이 엄청나게 널리 퍼졌다는 뜻이다.

“음. 누구라고 말해 줄 순 없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다. 리사는 여러 정보를 산다. 사소한 가십에서부터 어느 귀족이 무슨 사업을 한다는 정보까지. 아마 그녀에게 누군가가 올리버가 결혼한다는 정보를 판 거겠지.

“부디 그 정보에 많은 돈을 안 썼길 바라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차를 홀짝였다. 과연 부유한 그런트 가라 그런지 손님에게 대접하는 차도 아주 고급이다.

잠시 리사가 내놓은 차를 만끽하는데 그녀가 말했다.

“그런 건 괜찮아요. 그보다, 결혼 안 한다는 말이죠?”

“네. 우리 집은 결혼 준비를 전혀 안 하고 있답니다.”

딸이고 아들이고 하나같이 어째 결혼할 생각이 없냐고 오늘 아침에도 어머니께 혼이 났다. 얄미운 올리버는 슬쩍 도망쳐 버렸고.

덕분에 나만 혼났다. 아예 기약 없는 올리버와 달리 나는 번즈 백작이라는 훌륭한 사윗감이 있거든.

“비스컨 남작이 그래요? 결혼할 사람이 없다고?”

다시 리사가 물었기 때문에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녀를 쳐다봤다. 요즘 이상하네. 어제 올리버도 같은 소리를 하더니.

나는 방금 전 리사에게 그렇게 말했다. 우리 집은 결혼 준비를 전혀 안 하고 있고 올리버는 구혼 중이 아니라고.

다행인 건 리사도 내 말을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내가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비스컨 남작이 숨기고 있는 건 아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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