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7화 (172/239)

177화. 38 – 1

“소문도 안 났지?”

나와 함께 거리를 걷던 줄리아가 로렌에게 물었다. 그녀는 막 친구가 약혼을 했다는 이야기를 한 참이었다. 친구의 약혼 파티에 초대받았단다.

그 약혼 파티에서 입을 드레스를 맞추러 가는 길이었고.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닌데. 나는 로렌과 줄리아의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조용하게 진행해도 결혼 문제는 소문이 약간은 나기 마련이다.

구혼 과정에서 남자는 여자의 집에 자주 찾아오기 때문이다. 찾아오지도 않고 구혼을 하는 바보는 없으니까.

그런데 줄리아와 로렌의 친구는 결혼한다는 소문도 안 났다고 한다. 그럼 대체 어떻게 결혼을 하느냐?

당사자와 상관없이 진행된 거다. 남자 쪽이 여자의 아버지에게 딸과 결혼시켜 달라고 한 거지.

“걔네 아버지, 엄청 옛날 사람인가 봐.”

내 생각과 똑같은 말이 로렌의 입에서 흘러나와서 나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예전에는 그랬다고 한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결혼하실 때보다 더 예전.

그때는 결혼이 여자의 의견과 상관없었다고 한다. 남자는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생기면 그녀의 아버지에게 찾아가 혼담을 나눴고 결혼이 결정되면 여자의 아버지는 지시를 내렸다.

그 남자와 결혼하거라.

어머니가 결혼하실 때는 상황이 조금 나아졌다고 한다. 남자가 여자의 아버지와 먼저 이야기를 나누는 건 마찬가지지만 형식적인 구혼을 하기 시작했거든.

그리고 지금 내가 결혼하는 시대에 와서는 남자들이 먼저 구혼을 하고 내 아버지에게 허락을 구한다. 내 자식 세대쯤 되면 구혼 없이 연애를 하고 결혼하게 되지 않을까.

머릿속에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떠올랐다. 흠. 부모의 허락 없이 자유롭게 연애를 하는 미혼 귀족이라.

올리버가 결혼하는 게 더 빠르겠다.

“조금만 더 옛날로 돌아가면 아주 용도 잡겠어.”

줄리아의 투덜거림에 나와 로렌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맙소사. 나는 줄리아에게 어른에게 말을 무례하게 하면 안 된다고 지적하는 것도 잊고 배를 잡고 웃었다.

우리가 웃을 줄 몰랐던지 줄리아는 민망하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금세 긍정적인 면을 생각해 내고 말했다.

“뭐, 그래도 덕분에 하몬 양의 티 파티까지 해서 새 드레스를 맞출 수 있으니까요.”

그게 긍정적인 부분이다. 에스컬레 경은 줄리아가 친구의 약혼 파티와 티 파티에 초대받은 것을 알고 새 드레스를 사는 것을 허락했다.

그게 지금 내가 이 아이들을 데리고 거리로 나온 이유다. 나와 어머니가 단골로 이용하는 의상실을 소개해 주려고 했는데 줄리아가 십 대가 이용할 만한 좀 저렴한 의상실을 찾고 싶다고 했거든.

이런 경험도 해 보는 게 좋겠지. 나는 그냥 내 단골 의상실을 이용하라고 말하지 않고 순순히 줄리아와 함께 거리로 나왔다.

너무 저렴한 비용을 받는 곳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저기로 가 볼까?”

나는 의상실이 줄지어 있는 거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마차를 타고 돌았으면 더 편했겠지만 하나하나 둘러보려면 걷는 게 제일 낫다.

하지만 슬슬 다리가 아파 와서 이번 가게만 확인하면 찻집에 가자고 해야겠다.

“아 참, 결혼하니까 생각났는데요.”

내가 가리킨 골목으로 들어서며 줄리아가 입을 열었다. 또 엘리엇과 언제 결혼할 거냐고 묻는 거면 드레스 안 봐 준다고 을러댈 테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녀가 뒤이어 물었다.

“올리버, 결혼해요?”

“응?”

갑자기? 내가 아니라?

나는 생각도 못 한 질문에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올리버가 결혼하냐고? 내가 아는 그 올리버?

“어, 내 오라버니 말하는 거지? 올리버 비스컨?”

올리버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내 질문에 줄리아는 당연하다는 듯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올리버가 결혼한다는 말이 있거든요.”

“어디서 그런 말이 돌아?”

우리 집에도 없는 말이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주 잠깐, 나는 내가 한 일주일이나 한 달 정도 의식이 없었는지 고민했다. 오늘이 며칠이지? 내가 어제 잠들어서 오늘 아침에 일어난 거 맞지?

올리버가 결혼한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다. 심지어 오늘 아침에 올리버가 실없는 농담을 해서 분위기가 싸늘해졌었단 말이지.

어머니는 그런 올리버에게 제발 장가 좀 가라고 타박하셨고.

“어, 아카데미 모임에요.”

줄리아가 로렌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카데미 안에는 수많은 모임이 있다. 올리버가 아직까지 즐기는 조정도 아카데미에서 시작한 클럽 활동이었고.

“오늘 아침에 친구들하고 만났거든요.”

아카데미 친구들과 아침 식사를 한 모양이다. 가끔 그런다고 들었다. 아카데미 근처에 있는 찻집에서 늦은 아침에 만나 차와 스콘, 샌드위치를 먹는 거다. 아카데미 근처에 있는 가게는 학생들 주머니 사정에 맞춰서 꽤 저렴하다고 들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부러운 건 늦은 아침에 만나 같이 식사를 할 수 있는 친구들의 존재였다. 나한테도 친구는 있지만, 아카데미처럼 하루의 대부분을 같은 공간에서 함께 보낸 추억은 없거든.

“거기서 초대장을 받았다며?”

나는 제일 앞에 보이는 의상실을 향해 걸어가며 물었다. 저기는 내가 보기엔 너무 저렴해 보인다. 슬쩍 로렌을 확인하자 그녀 역시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줄리아가 적극적이잖아.

“거기서 아이다가 그러더라고요.”

“파딜라 양? 잘 지내지?”

아이다 파딜라라면 기억한다. 줄리아, 로렌, 아이다는 완전 삼총사라 어릴 때 우리 집에도 놀러 온 적이 있거든.

나중에 아이다가 그 파딜라 상회의 사람이라는 걸 알고 놀랐다. 파딜라 상회라면 하몬 상회만큼이나 유명하거든.

“걔야 뭐, 잘 지내죠. 걔도 아버지가 엄청 귀찮게 하나 보더라고요.”

“귀찮게?”

아버지가 딸을 귀찮게 할 일이 뭐가 있어?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줄리아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결혼이요. 여기저기 데려가서 남자를 소개해 준대요.”

“허.”

‘좀 이르지 않나?’ 싶었지만 이해가 안 되는 건 또 아니다. 하몬 경과 달리 파딜라 씨는 엘리엇처럼 자수성가한 사람이거든. 즉, 집안에 귀족이 없다는 뜻이다. 귀족과 연을 만들기 위해 딸을 귀족 집안으로 시집보내고 싶은 거겠지.

그러려면 아이다가 아카데미에 다니는 지금부터 부지런히 이런저런 모임과 행사에 얼굴을 비춰야 한다.

아이다도 힘들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줄리아가 다시 말했다.

“아이다 말이, 새로 알게 된 친구가 올리버라는 남자를 만나고 있다는 거예요.”

“이름이 비슷한 거 아냐?”

올리버라는 이름이 그렇게 드문 이름은 아니다. 귀족 사회에서도 찾아보면 올리버라는 이름이 몇 명 나올 거다. 귀족이 아니라면 더 많겠지.

하지만 줄리아의 말은 달랐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올리버 비스컨이라고 했대요.”

애초에 아이다에게 자기가 올리버라는 남자와 만나고 있다고 이야기한 여자는 자랑한 거라고 한다. 비스컨 백작의 아들을 만나고 있다고. 어쩌면 백작 부인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나는 줄리아가 아이다에게 들은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전하는 것을 듣고 입을 딱 벌렸다.

올리버가 평민을 만난다고? 평민을 만나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일단 엘리엇도 평민 출신인걸.

잠깐. 그를 평민 출신이라고 말해도 되나? 친아버지, 아니, 엘리엇의 표현대로 말하자. 엘리엇이 태어나는 데 일조한 사람이 귀족이잖아. 그럼 엘리엇도 평민 출신이라고 말하기 어렵지 않나?

어쨌든, 내가 올리버가 평민을 만난다는 사실에 놀라는 이유는 상대방이 평민이라서가 아니다. 우리는 평민과 만날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나는 평민은 보통 하인이다. 아니면 가게 사장이나 직원이고.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재빨리 줄리아에게 물었다.

“노동자야?”

“아니요. 거기도 무슨 상회의 아가씨라고 하던데요?”

상회의 아가씨라면 꽤 부유한 상인의 딸이라는 말이다. 아이다와 비슷한 입장이겠지. 딸을 귀족에게 시집보내기 위해 아버지가 일부러 일을 시키지 않고 이런저런 무도회에 다니게 할 거다.

그러면 무도회에서 만났나? 어쩌면 그런 건지도 모른다. 나는 줄리아에게 올리버가 만난다는 그 아가씨의 이름을 물었다. 어쩌면 올리버는 만나는 아가씨가 귀족이 아니라서 이야기를 못 하는 건지도 모른다.

“어머니.”

로렌과 줄리아의 쇼핑을 도와주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어머니를 찾았다. 줄리아가 어떤 드레스를 주문했을지 어머니께서 매우 궁금해하고 계실 테니까.

줄리아와 로렌에게 들은 놀라운 이야기는 어머니께 할지 말지 아직 고민 중이다. 먼저 올리버와 이야기를 하는 게 좋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응접실 문을 여는데 내 눈앞에 어머니 맞은편에 앉아 있는 올리버가 들어왔다.

“잘 다녀왔니?”

“줄리아 드레스 주문하는 거 도와줬다며?”

줄리아와 로렌에게 들은 것과 달리 올리버는 꽤 편안해 보였다. 아무리 봐도 저 얼굴은 가족들 몰래 비운의 사랑을 하는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데 말이지.

“음. 오늘은 일찍 왔네?”

웬일로 이렇게 일찍 집에 들어왔냐는 질문에 올리버는 살짝 비틀린 코를 찡그렸다. 그리고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날이 추워져서 슬슬 물에 들어가기 어려워지더라고.”

그렇긴 하지. 아니, 그보다. 아직도 물에 들어가고 있었어? 내가 배를 정리한 게 언젠데?

나는 이제야 그걸 깨달았냐는 표정으로 올리버를 쳐다봤고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대단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겠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어머니를 쳐다봤고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올리버가 말했다.

“감기 안 걸렸어.”

감기 걸렸냐고 안 물어봤는데? 나는 다시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올리버를 쳐다봤다. 그러자 내 친애하는 오라버니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아까 어머니께서 감기 걸렸을지도 모르니 의사를 불러온다고 하셨거든.”

의사는 필요 없다고 어머니를 설득하느라 혼났다는 말에 나는 다시 어머니를 쳐다봤다.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고 있었다.

으음. 바보는 감기에 안 걸린다는 말이 있던데.

하지만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면 어머니께 혼이 나겠지. 나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응접실 밖으로 나왔다. 줄리아와 로렌이 어떤 드레스를 구매했는지는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하면 될 거다.

저녁을 먹기 전에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으려고 위층으로 올라가는데 올리버가 내 뒤를 따라오며 물었다.

“듣기로는 에스컬레 경이 라넌 경에게 검은 늑대로 오라고 했다던데.”

이건 또 무슨 이야기야. 나는 오라버니가 무슨 소릴 하는지 몰라서 걸음을 멈췄다. 그 소식을 올리버가 몰랐을 리가 없다. 나와 어머니가 식사 시간에 이야기했으니까 말이다.

내가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짓자 올리버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왜 거절했는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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