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6화 (171/239)

176화. 37 – 4

“날이 많이 쌀쌀해졌군.”

오랜만에 정원으로 나온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말했다. 정말로 오랜만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난번 전투 때 다리에 화살을 맞았기 때문이다.

의사는 한동안 움직이지 말라고 권고했고 클레어와 엘리엇은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움직이지 못하게 막았다.

그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은 자신이 걷기 어려울 정도로 다쳤다는 걸 비밀로 했기 때문이다. 마녀는 죽거나 다치지 않는 법이니까.

두 사람은 제일 먼저 유제니 곁에 사람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기 위해 지금 이렇게 정원으로 나갈 때 준비물을 모두 클레어가 들어야 했지만 상관없다.

클레어는 정원 한쪽에 놓인 티 테이블에 다가가서 가져온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그사이, 엘리엇이 유제니가 앉을 수 있도록 의자를 잡아당겼다.

“고맙네.”

늘 그렇듯 유제니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고 의자에 앉았다.

물론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니냐고 의심한 사람도 있긴 했다. 하지만 유제니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그 의심은 사라졌다.

오히려 전혀 다른 소문이 났다.

수도까지 침범당했다는 사실에 화가 난 마녀 비스컨이 왕성의 탑에 올라가 이웃 나라를 저주한다는 것이다. 어떤 소문은 탑이 아니라 지하 감옥이라는 식으로 변형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상당히 널려 퍼져 있었다.

어느 정도냐면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숲에서 고귀한 마녀 비스컨을 봤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춥지 않으세요?”

“괜찮아.”

클레어의 질문에 유제니는 덤덤하게 말했다. 하지만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은 항상 이런다. 좀 덥고 추운 것쯤은 참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게 클레어는 마음이 쓰였다. 특히나 지금처럼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클레어는 그렇게 말하고 유제니가 말리기도 전에 건물 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가기 전에 엘리엇을 한 번 쳐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말해도 되네.”

클레어가 사라지자 유제니가 불쑥 말했다. 무엇을? 어리둥절해하는 엘리엇에게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러게 성곽 위로 올라가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이야.”

확실히 엘리엇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유제니가 성곽 위로 올라간 건 자살행위였다고.

그녀가 그렇게 한 이유는 이해가 된다. 아군이 열세였으니까. 지원군은 올지 안 올지도 모르고 적군의 수는 많았다.

성 안에는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이 대피해 있었고 성을 지키는 병사의 수는 턱없이 부족했다. 다들 이게 끝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엘리엇조차 여차하면 유제니를 납치해서라도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유제니는 성곽 위로 올라갔다. 아군의 기운을 북돋기 위해.

그녀는 마녀가 아니다. 그녀가 성곽 위로 올라간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마법으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유제니의 모습을 본 아군은 기운을 차렸고 적군은 겁을 먹었다. 그녀가 화살에 맞고도 벌떡 일어나 소리치자 적군은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니 달라지는 건 없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성곽 위로 올라가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녀는 마녀가 아니지만, 마녀보다 더 대단한 일을 해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상처를 입었고.

“제가 그렇게 말하면 다시는 안 하실 겁니까?”

뇌리에 화살을 맞아 낙엽이 구르듯 쓰러지던 유제니의 모습이 떠올라서 엘리엇은 인상을 쓰며 물었다. 그녀가 다치는 건 몇 번 봤지만 볼 때마다 끔찍했다. 그리고 매번 엘리엇은 악몽을 꿨다.

안 그랬으면 좋겠다. 유제니가 부디 편안하고 안전한 곳에서 평화롭게 머물렀으면 한다.

그의 바람이 담긴 질문에 유제니는 무심하게 물었다.

“내가 모든 충고와 조언을 받아들여야 할까?”

그렇지 않다. 충고와 조언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필요 없다면 오지랖일 뿐이다. 좀 더 잔인하게 말하면 엘리엇이 유제니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 모두 그녀에게 도움이 되는 말은 아니다. 엘리엇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럼 왜 말해도 된다고 하신 겁니까?”

그러자 다시 유제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에 엘리엇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이런 순간들 때문에 엘리엇은 그녀를 놓을 수가 없었다. 지독할 정도로 그를 밀어내다가도 아무것도 아닌 웃음 하나에 그의 마음은 다시 유제니를 향해 달려가곤 했다.

어쩌면 사람들 말대로 진짜 마녀인지도 모르겠다. 엘리엇은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다시 주변을 살피고 유제니를 쳐다봤을 때 그녀는 눈을 감고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쌀쌀하다고 했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바깥바람이 기분 좋은 모양이다.

엘리엇은 눈을 감은 유제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에게 하고 싶은 질문이 아주 많았다. 어떤 질문을 할지 생각하기도 전에 그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

“뭔가.”

여전히 바람을 느끼고 싶다는 듯, 유제니는 눈을 뜨지 않고 말했다. 엘리엇은 천천히 물었다.

“만약 다시 살 수 있다면, 지금 인생을 바꾸시겠습니까?”

그제야 유제니의 눈이 엘리엇을 향했다. 혹자는 마녀의 눈이라고 부르던, 그러나 엘리엇에게는 보석 같은 초록색 눈동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린 유제니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바보 같은 질문을 하는군.”

“그렇습니까?”

어느 부분이 바보 같다는 걸까. 엘리엇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유제니가 말했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인생을 바꿀 거냐는 질문이잖나.”

다른 대륙에서 전생의 기억을 가진 아이가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디까지나 그렇다더라는 이야기라 신빙성은 없지만.

하지만 엘리엇의 질문은 과거로 돌아가는 거다. 그러니 다시 산다는 말은 잘못됐다. 그런 걸 지칭하는 용어가 있기나 할까.

유제니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무엇 하러 불가능한 상황을 상정하고 이야기를 하나.”

가능한 상황을 상정하고 대안을 세우기도 바쁘다. 당장 저 산 너머로 적군이 진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엘리엇은 궁금했다. 그 불가능한 상황이. 그는 유제니가 차를 한 모금 마시는 것을 지켜보다가 다시 물었다.

“만약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요?”

“글쎄.”

유제니는 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다시 정원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별로 달갑지 않네.”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기회인데요?”

“바꾼 인생이 이보다 나을 거라 확신할 수 있나?”

엘리엇의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말대로 바뀐 인생이 이것보다 나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어떤 인생도 지금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의 인생보다는 나을 거다.

아니, 안다. 어떤 사람은 지금 유제니의 자리가 탐이 나서 안달하고 있다는 걸. 하지만 그가 아는 유제니는, 그리고 지금의 유제니는 그 자리를 원하지 않는다.

원하지 않는 자리에서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유제니가 엘리엇은 안타까웠다. 유제니가 그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안다면 감히 그런 건방진 생각을 했냐며 그를 쫓아내겠지만.

“확신할 수는 없지만 바꿀 수는 있지 않습니까.”

엘리엇은 용기를 내서 다시 말했다. 더 나아질 거라는 확신은 없다. 운이 없다면 유제니는 드래곤이 화가 나서 커런트에 침략했을 때 사망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엘리엇의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는 자신에게 아직 심장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놀라 멈칫했다.

그리고 재빨리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군가 당신의 인생이 어떤지 알려 준다면, 그래서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좋지 않습니까?"

이어진 엘리엇의 질문에 유제니는 다시 그를 쳐다봤다. 차가운 인상을 가진 이 잘생기고 젊은 백작은 간혹 이상한 말을 하곤 했다.

처음에 유제니는 그가 자신을 싫어하는 줄 알았다. 그건 괜찮다. 어차피 미움받기로 결심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건 아니지만.

다행히 그녀는 금세 번즈 백작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유제니는 번즈 백작이 안타까웠다. 왜 그런 짓을 하는 걸까.

번즈 백작은 전도유망하다. 젊을 뿐 아니라 아주 잘생겼고 부유하니까. 그는 심지어 전장에서 수많은 무훈을 세운 전쟁 영웅이다.

지금이 평화로운 발시안이었다면 번즈 백작의 집 앞에 매파가 줄을 섰을 것이다. 어쩌면 유제니도 번즈 백작과 만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부질없는 가정에 유제니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설령 발시안이 평화롭다 해도 그녀는 번즈 백작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렌시드 경과 결혼했을 테니까. 그리고 아주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겠지.

“자네는 괴짜야.”

유제니는 비난 아닌 비난을 엘리엇에게 던졌다. 번즈 백작이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가 그를 곁에 두는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남자들과 달리 번즈 백작은 유제니를 유혹하려 들지 않았으니까.

이보다 더 못한 얼굴을 가지고도 많은 남자가 그녀를 유혹하려 했다. 현 발시안 최고 권력자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유제니는 그 남자들이 모두 멍청하다 생각했다. 그녀는 부서진 유리성 위에 맨발로 서 있다. 그런 그녀를 유혹해 봤자 다가오는 건 빠른 죽음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번즈 백작은 그녀 주변에 있는 모든 남자 중에 가장 나았다. 이런 이상한 소리를 할 때만 빼면.

“압니다.”

능청스러운 대꾸에 유제니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앞으로 그녀의 인생이 어떨지 알려 준다고? 그건 점술가나 할 짓이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유제니는 점술가를 믿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차를 마시고 번즈 백작을 쳐다봤다. 그의 뒤로 클레어가 담요를 들고 다가오는 게 보였다.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현명해진다고 하지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 사람의 나이는 현명해질 기회에 가깝지.”

입을 연 유제니는 찻잔을 들여다보더니 정원으로 시선을 던졌다. 서늘한 바람이 슬슬 겨울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정원에는 꽃이 피어 있었고 유제니는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 기회가 없이 현명해질 수 있다면, 그건 현자겠지.”

다시 엘리엇에게 고개를 돌린 유제니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 처음 엘리엇을 봤을 때 그녀는 어쩌면 이렇게 예쁜 눈을 가졌을까 하고 감탄했었다.

“번즈 백작. 나는 현자가 아니네. 하지만 내가 겪은 경험만큼은 현명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어.”

물론 겪은 경험만큼 현명해지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유제니는 자신이 그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아니, 믿고 싶었다.

그녀는 다시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찻잔에 입을 대며 물었다.

“내가 현명해질 기회를 뺏는 자를 믿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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