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4화 (169/239)

174화. 37 – 2

아, 그렇군. 마법.

내 머릿속에 그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왕궁의 무도회장에 마법으로 등장했었지. 이동 마법은 그리 흔하지는 않지만 부유한 귀족들이 종종 사용하곤 한다. 물론 그날 엘리엇과 그의 동료들만큼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건 어렵지만.

당연하지만 부유한 귀족들이 사용한다는 건 비싸다는 뜻이다. 얼마나 비싼지는 모르겠다. 엄청나게 비싸다는 말만 들었거든. 아예 알아볼 생각도 안 했다.

“사실 가고 싶지 않습니다만.”

엘리엇은 그렇게 말하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꼭 가지 말라고 말해 달라는 것 같아서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럴 리가. 일 때문에 가는 건데 내가 어떻게 가지 말라고 할 수 있겠어?

그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최대한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제 부하를 곁에 두겠습니다.”

“혹시 모르다니, 왜요?”

내가 엘리엇의 부하가 필요할 일이 있을까? 잠깐.

머릿속에 최근 일어난 이상한 일들이 떠올랐다. 나를 마녀라고 부르던 사람들. 그중에는 나를 해치려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인상을 쓴 채 다시 물었다.

“누가 날 해치려는 것 같아요? 꿈꾼 사람들?”

“아닙니다.”

엘리엇의 대답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왔다. 그는 아주 빠르게 대답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누군가 당신을 해칠 것 같아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럼 왜요?”

부하들을 왜 두고 간다는 거야?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엘리엇이 다시 말했다.

“내가 곁에 없으니까요.”

“이틀 안에 돌아온다면서요?”

“이틀이 얼마나 긴지 아십니까?”

뭐라는 거야, 정말.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엘리엇은 웃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는 전에도 내 곁에서 멀어지는 걸 거부한 적이 있다. 왕비 전하가 수영장에 방문했을 때였지. 올리버를 도와달라고 했지만 절대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며 거절했다.

음. 그때의 일을 떠올려 보면 오히려 엘리엇이 이틀간 수도를 떠난다는 게 내가 안전하다는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웃음을 멈추고 물었다.

“지금은 내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왕비님이 오실 때와 달리?”

그제야 엘리엇은 왕비님이 방문하셨을 때가 생각난 모양이다. 정확하게는 올리버가 위험에 처했을 때겠지만.

그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언제나 안전합니다. 내가 지키고 있으니까요.”

그건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닌데?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엘리엇을 노려봤다. 그러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왕비님이 오실 때 좀 더 위험할 수는 있었죠. 왕비님을 노리는 자들이 당신을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요.”

“누가 왕비 전하를 노려요?”

“아닙니다.”

다시 엘리엇의 대답이 빨라졌다.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누가 왕족을 노리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모르니까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음, 무슨 소린지 알겠다. 왕족은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나라를 혼란하게 만들고 전쟁을 걸어 집어삼키려는 이웃 나라는 역사 시간에 한 번쯤은 들어 봤다. 그리고 왕을 죽이고 다음 왕이 되려는 야망을 가진 자들의 이야기도 들어 봤고.

하지만 나는 지금 발시안에서는 왕위 계승을 노린 암살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가장 가능성이 큰 사람이 거마로트 공작인데 그는 현 국왕에게 충성스럽다는 평이 있거든. 역사나 이야기와 달리 모든 이인자가 일인자를 제거하고 일인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만 해도 그렇잖아. 올리버가 사라지면 내가 비스컨 백작가의 재산을 모두 물려받는다. 그리고 내가 낳은 아이가 다음 비스컨 백작이 되고.

하지만 나 역시 거마로트 공작처럼 비스컨 백작가의 재산을 물려받고 싶지 않다. 아, 물론 비스컨 가의 재산이 물려받을 만큼 대단하지 않다는 것도 그 이유긴 하지.

비스컨 가는 물려받으면 돈을 쓰기보다는 빚을 갚는 게 더 급할 테니까.

또 다른 이유는 어쨌거나 내가 올리버를 사, 사, 사, 아니, 아끼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 오라버니니까.

거마로트 공작 역시 그렇겠지. 힘들게 피바람을 불어 가며 왕이 되어 봤자 골치 아픈 일만 한 가득이다. 그것에 비하면 공작가는 괜찮지. 명예와 부가 왕보다는 덜하지만, 귀족 중에서는 최고니까. 일도 많지 않고.

“혹시 거마로트 공작가를 걱정하는 거라면 난 걱정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엘리엇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공작가는 왕족의 위협이 되지 않을 거다. 하지만 엘리엇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제게도 말입니까?”

“오.”

그제야 머릿속에 그와 거마로트 공작가의 악연이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면 악연이라기보다는 힐데자르가 늘 그렇듯 멍청한 짓을 한 거고 엘리엇이 그 피해를 막아 준 거지만.

거마로트 공작 부부도 그렇게 생각할까?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엘리엇을 미워하겠지. 자기 아들을 구해 주지 않았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억울한 소리기도 하고.

그 상황에서 엘리엇은 기적을 일으켰다. 내가 드래곤이었다면 내 알을 깨 먹은 힐데자르는 물론 발시안도 가만두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건 힐데자르가 멍청한 남의 집 자식이라고 생각하는 내 입장이고 거마로트 공작가는 다르겠지.

“공작 부부가 당신 때문에 날 노린다고 생각하는군요?”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게 조용히 물었다. 왜 엘리엇이 내 곁을 떠나는 걸 걱정했는지, 왜 부하를 두고 가겠다고 했는지 이해가 된다.

“아마 그러진 않을 거예요.”

엘리엇이 날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괜한 일로 신경 쓰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빠르게 설명했다.

“공작 부부가 날 위험하게 만들지는 않을 거예요. 나는 비스컨 백작가니까요. 그리고 내 어머니가 공주님의 말벗이었고요.”

즉, 내 뒤에는 비스컨 백작가뿐 아니라 왕대비 전하가 계시다는 말이다. 그분이 내게 딱히 특혜를 주지는 않지만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도 피해를 입게 하지는 않을 거다.

물론 엘리엇을 공격할 수는 있겠지. 나는 그 부분을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참지 못하고 물었다.

“당신은 어때요? 공작 부부가, 공격적으로 구나요?”

엘리엇에게 무력으로 덤비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그는 신흥 귀족이고 공격할 부분이 많다는 뜻이다. 그가 귀족들 사이에 인맥이 적다는 것을 이용해서 엘리엇의 사업을 방해하려 할 수도 있다.

어쩌면 연회장이나 음악회에서 엘리엇의 예의범절이 부족하다고 지적할 수도 있겠지.

젠장.

나는 엘리엇이 참석할 모든 행사에 동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거마로트 공작이나 공작 부인이 엘리엇에게 예의범절이 부족하다고 지적할 걸 상상하니 머릿속에 열이 올랐다.

“공작 부부가 왜요?”

그때, 베라가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엄마야. 나는 깜짝 놀라서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자 엘리엇이 내게서 슬쩍 물러나는 게 보였다.

“베라, 다른 사람의 대화는 모르는 척해야지.”

남의 대화를 엿듣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처럼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다른 사람의 대화는 못 들은 척하는 게 예의다.

물론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나도 안다. 베라는 입술을 삐쭉이며 말했다.

“들리는 걸 어떻게 모르는 척해요.”

“맞아. 그거 어려워요.”

줄리아까지 합세하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비장의 방법인데 할 수 없지. 나는 줄리아와 베라를 향해 몸을 내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못 듣는 척해야 사람들이 대화를 계속할 거 아냐?”

“네?”

줄리아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로렌 역시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사람들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 궁금하잖아? 못 듣는 척해야 끝까지 들을 수 있다고. 지금 베라가 물어보는 바람에 나랑 번즈 백작이 대화를 멈췄잖니.”

“세상에, 유제니!”

줄리아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로렌은 이미 웃느라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엘리엇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 역시 웃고 있는 게 보였다.

“그래서 모르는 척하라는 거예요? 대화를 계속 엿듣기 위해?”

이어진 베라의 질문에 나는 킬킬대며 말했다.

“물론 아니지. 남의 사적인 대화를 모르는 척하는 게 예의인 것 맞잖아. 하지만 끼어들지 않고 못 견디겠다면 이걸 생각하라는 거야.”

“입 다물고 있어야 끝까지 듣는다는 말이죠?”

줄리아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덕분에 응접실 안에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좋아. 사람들의 관심이 거마로트 공작 부부가 아니라 왜 남의 대화를 못 들은 척해야 하는지로 넘어갔다. 나는 그대로 베라가 공작 부부에 관한 대화를 잊어버리게 하기 위해 주제를 바꿨다.

“사실, 번즈 백작님께서 광산을 이틀 안에 다녀온다고 하시네.”

“마법으로요?”

베라가 먼저 반응했다. 그녀는 알겠군. 하몬 가는 어마어마한 부자니까. 베라는 엘리엇이 아무 말도 없자 다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재빨리 말했다.

“언제 다녀오는지 물어보던 참이었어. 하몬 가에서 여는 연회에 나와 같이 참석하려나 싶어서.”

아마 하몬 경이 엘리엇에게도 초대장을 보낼 거다. 다행히 엘리엇은 내 박자에 맞춰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날짜가 겹치지는 않지만 하몬 저택에는 방문하지 않을 겁니다. 다른 일이 있어서.”

저런. 아쉽다는 내 표정에 엘리엇이 미소를 지었다. 베라를 확인하자 그녀는 왜인지 엘리엇이 참석하지 못한다는 소식을 반기고 있었다.

엘리엇을 안 좋아하나?

“아쉽네요. 하몬 양 말이 점술가도 부른대요.”

이번에는 로렌이 끼어들었다. 점술가 이야기도 했었지. 재빨리 엘리엇을 보자 그는 별 흥미가 없는 표정이었다. 흠, 이건 좀 의외네.

그는 꿈을 꿨다. 로렌처럼 자기 미래를 봤다는 말이지. 당연히 점술가에게 관심이 많을 줄 알았는데.

“점을 안 믿나 봐요?”

베라의 질문에 엘리엇은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로렌과 줄리아, 베라를 한 번 돌아보더니 다시 내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당신은요, 유제니? 미래를 본다는 걸 믿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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