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3화 (168/239)

173화. 37 – 1

“그래서 조만간 아버지께서 전시회를 연다고 하세요. 레이디 비스컨, 초대해도 될까요?”

베라의 질문에 나는 차를 마시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까지 베라는 하몬 경이 모은 미술품을 자랑하고 있었다.

아니, 자랑이 아니라 소개였나?

굉장히 비싼 미술품이 있다고 했다. 왜 자랑이라고 느꼈냐면 베라가 그 미술품의 작가가 누군지 몰랐기 때문이고.

“지난번에 초대했던 점술가도 다시 부를 거예요. 굉장히 잘 맞춰서 다들 좋아했거든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베라는 슬쩍 내 눈치를 살피며 다시 말했다. 와 달라는 완곡한 표현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전 나와 이야기를 한 뒤, 베라는 나를 따라 하던 것을 포기했다. 정확히 말하면 내 외면을 따라 하는 것을 포기했다. 의상은 예전처럼 아주 고급스럽고 화려해졌고 착용하는 액세서리도 매일 달라지고 있다.

음, 예전보다는 조금 덜한가?

나는 전보다 덜 화려해진 베라의 드레스를 보며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그러니까 날 따라 하기 전 마지막으로 입은 베라의 드레스에는 보석이 달려 있었거든.

“점술가?”

흥미가 있다는 듯 로렌이 물었다. 베라는 그녀가 반응하자 기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머니가 발견했어. 이건 비밀인데.”

거기까지 말한 베라가 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나한테 이야기하고 싶은 모양이다. 다행히 로렌은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베라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러자 베라가 나와 로렌, 줄리아를 돌아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지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상아탑에 갇혀 있었대. 능력이 조금 떨어지니까 풀어 줬다더라고.”

“에이.”

제일 먼저 반응한 건 줄리아였다. 말도 안 된다는 그녀의 반응에 베라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에이라니, 내 말이 거짓말이라는 거야?”

“베라.”

나는 재빨리 베라를 불러 진정시켰다.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의 말에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걸 매우 불쾌해한다. 그건 별로 좋지 않다. 그걸 베라도 알았고.

고치고 싶다고 했다. 그것 외에도 다른 점들도.

물론 그걸 내가 도와줄 수 있을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줄리아는 그냥 믿기 어려운 이야기라 그렇게 반응한 거야.”

그렇지? 내가 돌아보자 줄리아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아가 조심해야 할 건 없다. 베라는 그녀에게 바라는 게 없는 사람들과 어울릴 필요가 있으니까.

베라는 잠시 줄리아를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한동안 우리 집에서 돌봐줬거든. 우리 집에서 여는 행사에서 점도 치고.”

이번에는 줄리아가 입술을 삐죽였다. 얘 뭐야? 그런 표정이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베라는 로렌에게 자기 집에서 돌봐주던 점술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한동안 하몬 가에 머물던 점술가는 거처를 찾았다며 떠났다고 한다. 그리고 도와줄 게 있다면 뭐든 돕겠다고.

하몬 부인은 행사를 열 때면 점술가를 불러 사람들의 여흥을 돋구는 모양이었다. 이야기가 거기까지 갔을 때쯤엔 입술을 삐쭉이던 줄리아도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베라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아가씨.”

그때, 빅스가 응접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서 조용히 나를 찾았다. 손님이 왔나? 이 시간에는 올 사람이 없을 텐데. 내가 고개를 들자 빅스가 명함을 내밀었다.

“다른 응접실로 모실까요?”

명함의 내용을 읽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검은색 종이를 명함으로 사용하는 건 엘리엇뿐이니까. 어떻게 할까. 나는 여전히 점술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베라와 로렌, 줄리아를 쳐다봤다.

“누군데요?”

그때, 줄리아가 물었다. 내가 검은색 명함을 들어 보이며 번즈 백작이라고 말하려 했을 때였다. 베라가 불쑥 말했다.

“리먼 경인가요?”

리먼 경이 누구지? 내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전에 줄리아가 말했다.

“그런트 경 아니에요?”

아니, 왜 이렇게 이름이 많이 나와? 나는 명함을 다시 쳐다보며 물었다.

“검은색 명함을 쓰는 사람이 그렇게 많아?”

“요즘 남자들 사이에서 인기인 것 같던데요.”

어어, 진짜? 나는 놀라서 로렌을 쳐다봤다. 이게 인기라고? 별일이 다 있네.

처음 엘리엇의 명함을 본 어머니는 눈살을 찌푸리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번즈 백작은 다 좋은데 취향이 가끔 이상한 구석이 있구나.

취향이 가끔 이상하다는 것보다 그 외엔 다 좋다는 게 더 놀랍다. 분명 어머니는 처음엔 엘리엇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셨는데.

“아가씨.”

그때, 집사가 어떻게 하냐는 듯 나를 재촉했다. 아차, 엘리엇이 기다리고 있었지. 하지만 내가 대답하려 한 순간, 빅스의 뒤로 엘리엇이 나타났다.

“레이디 비스컨.”

엘리엇이 빅스보다 머리 하나는 큰 탓에 빅스가 가리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엘리엇은 여유롭게 나를 향해 인사를 건넸고 나는 좌절하는 빅스에게 괜찮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엘리엇에게 집사가 안내해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게 예의라고 다시 한 번 알려 줘야 할 모양이다.

“번즈 백작님.”

“백작님.”

엘리엇의 등장에 줄리아와 로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베라 역시 긴장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보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엘리엇에게 말했다.

“들어올래요?”

“허락해 주신다면, 기꺼이.”

가끔 보면 이 남자는 예의를 아주 잘 알고 있는데 일부러 무시하는 것 같단 말이지. 나는 아주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응접실로 들어오는 엘리엇을 보고 인상을 썼다.

빅스가 빠르게 하인에게 지시한 덕에 엘리엇의 차가 뒤이어 나왔다. 엘리엇은 자신의 찻잔을 들어 올리며 응접실을 돌아보더니 잠시 베라에게 시선을 멈췄다.

그리고 내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하몬 경이 귀족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검술 수업을 시작했다던데요.”

순식간에 베라의 표정이 굳는 게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들었다. 여러 사람에게. 그 여러 사람에는 베라도 포함돼 있었고.

나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네, 하몬 양이 알려 주더군요.”

“그렇습니까?”

엘리엇은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차를 홀짝 마셨다. 베라가 날 속이는 건 아닌지 걱정된 모양이다. 그때, 베라가 끼어들었다.

“저도 안 하는 게 좋다고 말하긴 했는데요.”

거기까지 말한 베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몬 경이 뭐라고 했을지는 뻔하다. 오히려 나는 베라가 그녀의 아버지에게 안 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왜?”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물었다. 왜 안 하는 게 좋다고 말했어? 베라는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뭐가 왜예요?”

질문을 한 건 줄리아였다. 나는 그녀를 돌아보며 설명했다.

“하몬 경도 귀족 여성들을 위한 검술 수업을 제공한다며? 좋은 일이잖아. 그걸 왜 말렸냐는 거지.”

“어, 하지만 유제니가 하는 것과 비슷하잖아요.”

비슷하지 않다. 우리는 검술이라기보다는 체력 단련에 가깝다. 위기의 순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익히는 거고.

게다가 비슷하면 또 어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수도에 의상실이 딱 하나만 있지 않잖아?”

식당도 그렇고 찻집도 그렇다. 심지어 귀족 남성들만 사용하는 클럽 하우스도 여러 곳이 있다.

수도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한 곳으로 감당하겠어? 여러 곳이 있는 게 좋지.

베라는 약간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버지가 당신의 그, 사업을 따라 해도 괜찮아요?”

괜찮지 않나?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괜찮을 게 뭐 있어? 하몬 경의 자유인데.”

유행하는 드레스는 따라 입으면서 유행하는 사업은 따라 하면 안 될 게 뭐란 말인가.

내 말에 베라뿐 아니라 줄리아와 로렌도 놀랍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게 놀랄 만한 이야기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엘리엇을 쳐다보자 그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음, 커튼을 쳤는데 안이 왜 이렇게 밝은가 했더니.

“아, 참.”

잠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줄리아와 로렌은 자기들끼리 뭔가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나는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나처럼 차를 음미하는 듯싶던 엘리엇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어느 자리? 나는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엘리엇을 쳐다봤다. 지금 이 자리를 비운다는 거라면 내 허락을 구할 필요 없다. 그리고 수도에서 벗어난다는 말이라면 그거야말로 내 허락을 구할 필요 없고.

엘리엇이 말한 건 후자였던 모양이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광산을 살펴봐야 할 것 같아서요.”

“오래 걸리겠네요.”

광산을 보고 오려면 오고 가는 데만 이 주 정도 걸릴 거다. 어쩌면 날씨에 따라 더 걸릴 수도 있고. 하지만 엘리엇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길어야 이틀일 겁니다. 가능하면 하루 안에 다녀오고 싶은데….”

거기까지 말한 엘리엇이 한숨을 내쉬었다. 덕분에 어떻게 광산을 이틀 안에 다녀올 수 있냐는 의문이 떠올랐던 내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렸다.

한숨 쉬는 모습이 꼭 조각상 같다. 아니, 조각상 같은 게 아니라 이런 조각상을 본 것 같은데. 나는 그가 눈을 내리깔고 한숨을 내쉬는 걸 멍하니 바라보다가 시선이 부딪치자마자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가능하면, 어….”

무슨 말이든지 해, 어서!

다행히 내 혀가 내 머리와 상관없이 움직였다.

“하루 안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예요?”

“그럼요.”

엘리엇은 그렇게 말하며 빙그레 웃었다. 음, 안 웃었으면 좋았을 텐데. 다시 머릿속에 하얗게 됐다. 하지만 나는 침착하게 질문을 하는 데 성공했다.

“어떻게요?”

“마법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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