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2화 (167/239)

172화. 36 – 9

그렇겠지. 베라의 한탄에 유제니는 피식 웃으려다 멈췄다. 그녀는 진심으로 힘들다고 하는데 거기서 웃을 수는 없다.

“같은 드레스를 입는 것도 지긋지긋하고요, 내일 또 입어야 하니까 깨끗하게 입어야 하는 것도 너무 힘들어요. 그리고 이 팔찌, 제 취향이 아니란 말이에요!”

마지막이 가장 서러웠나 보다. 자기 취향도 아닌 팔찌를 유제니를 닮고 싶어서 하고 나왔는데 그걸로 혼이 났으니 더 그렇겠지.

베라는 팔찌를 풀어 던지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손에 쥔 채 다시 손수건에 얼굴을 묻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힘든가? 유제니는 고개를 갸웃했다가 살짝 휴게실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는 줄리아를 발견했다.

괜찮아. 그런 의미로 손을 흔들자 줄리아는 도와줄 게 없냐고 입 모양만으로 물었다.

정말 괜찮다. 아직은. 유제니가 고개를 젓자 줄리아는 문을 닫고 문틀에 기대 서 있는 엘리엇에게 말했다.

“괜찮대요.”

그렇겠지. 엘리엇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기서 유제니가 나설 줄은 몰랐다. 그가 계획한 건 하몬 양이 왕대비에게 혼이 나고 유제니를 따라 하는 걸 멈추는 거다.

하지만 늘 그렇듯 유제니는 그의 계획에 개입했다. 자신이 그런다는 것도 모르고.

“내가 여기 있을 테니 가도 좋아.”

무뚝뚝한 엘리엇의 말에 줄리아는 잠시 로렌을 쳐다봤다. 그녀는 춤을 추고 싶다. 하지만 유제니가 저 얄미운 하몬 양과 단둘이 있는 걸 두고 떠나기 꺼려졌다.

아, 물론 조금 전 하몬 양과 유제니의 대화를 듣고 하몬 양을 얄밉다기보다는 어이없다고 생각하게 되긴 했지만.

“제가 있을게요. 두 분은 가세요.”

그때, 클레어가 다가와서 줄리아와 로렌에게 말했다. 그래도 되나? 줄리아가 다시 한 번 엘리엇과 클레어를 쳐다봤을 때 로렌이 말했다.

“가자.”

어어, 정말? 줄리아는 로렌이 팔짱을 끼는 바람에 엉겁결에 그녀를 따라 휴게실에서 멀어졌다. 그래도 라넌 경과 번즈 백작에게 맡겨도 되나.

그렇게 생각하는 그녀에게 로렌이 말했다.

“저건 가도 된다가 아니라 가 달라는 거지.”

그런가?

줄리아는 로렌의 말에 당황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도 꽤 눈치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로렌은 훨씬 더 좋다. 원래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몇 달 전부터 부쩍 눈치가 더 좋아졌다.

“일부러 우릴 불러서 상황을 살펴봐 달라고 부탁했잖아. 자기들은 들여다보지도 않고. 그게 무슨 의미겠어?”

“저기가 여자 휴게실이라는 거?”

그래서 그런 줄 알았는데? 어리둥절해하는 줄리아에게 로렌이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줄리아가 좋았다. 그녀의 꿈 이야기를 모두 듣고도 편견 없이 로렌을 받아들여 준 사람이라서가 아니라도 솔직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꿈을 꾸지 않은 게 부럽기도 했지만.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 거지, 저 두 사람은.”

그런가? 로렌의 말에 줄리아는 다시 한 번 휴게실을 돌아보았다. 굳게 닫힌 휴게실 문 양옆으로 마치 수문장처럼 라넌 경과 번즈 백작이 서 있었다.

누구라도 이 안으로 들어오고 싶다면 두 명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처럼.

“하몬 양, 나는 패션이나 유행에 별 관심이 없어요.”

베라가 진정하자 유제니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받았던 것과 같은 시선을 기다렸다.

“관심이 없다고요? 하나도?”

그럴 리 없다. 적어도 사교계의 여자라면 패션에 관심이 있어야 한다. 다들 유행을 따라 새로운 드레스나 머리 스타일, 액세서리에 신경 쓰니까.

유제니는 말도 안 된다는 베라의 반응에 쓰게 웃었다. 이런 반응은 익숙했다. 그녀의 어머니조차도 유제니에게 넌 참 이상하다고 말했으니까.

“사람마다 관심 분야는 다르니까요. 유행을 따르는 건 부지런하고 성실해야 하잖아요.”

그런 생각은 안 해 봤다. 유행을 따르려면 부지런하고 성실해야 한다는 말에 베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유제니는 빙그레 웃으며 설명했다.

“늘 유행하는 게 뭔지 조사하고 관심 있게 봐야 하죠. 이건 부지런하고 성실해야 해요.”

유제니는 그리 부지런하지도 성실하지도 않다. 그러려고 노력하기는 하지만 관심 없는 분야에 부지런하고 성실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당신은 아니죠. 나와 달라요. 그렇죠?”

유제니의 질문에 베라는 넋이 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녀는 유행을 따라 드레스를 맞추는 게 좋다.

물론 유행을 선도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매번 유행하는 드레스를 갖는다는 부러움과 선망을 받는 게 좋았다.

잠깐.

거기까지 생각한 베라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그녀가 더 깊이 생각하기 전에 유제니가 물었다.

“나처럼 행동해서 뭘 얻으려고 한 거예요?”

유제니의 질문에 베라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아주 많았다. 그중에서 가장 원했던 건.

“다른 사람의 존경이요.”

그게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닐 것 같은데. 유제니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고 베라는 부연 설명을 위해 입을 열었다.

“다들 당신 말을 귀담아듣잖아요. 에스컬레 양도 그렇고, 리즈 양도 그렇고.”

“그 두 사람은 저와 친한 동생이니까요.”

당신도 가까운 연상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냐는 유제니의 질문에 베라는 고개를 흔들었다.

“두 사람뿐만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의 집에 가서 참석자를 비난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드레스를 너무 촌스러운 걸 입고 온 사람에게 드레스를 고르는 안목을 좀 키워야겠다고 조언한 적도 있다.

그녀도 베라의 조언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가 보낸 드레스를 전부 돌려보내기까지 했다.

“뭘 했다고요?”

유제니는 베라의 말에 깜짝 놀라서 물었다. 남의 드레스를 대놓고 지적한 데다가 심지어 새 드레스를 보내기까지 했다고?

“알고 보니 사정이 어려운 분이더라고요. 그래서 불쌍해서 몇 벌 보냈는데 무시하지 뭐예요?”

속상하다는 베라의 말에 유제니는 입을 딱 벌렸다. 얘가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잠시 베라의 얼굴을 살핀 그녀는 베라가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맙소사. 내일 아침 일찍 그분한테 가서 사과해요.”

“제가요?”

내 성의를 무시한 그 여자가 사과하는 게 아니라 선물을 주고 무시당하기까지 한 내가 사과하라고? 베라는 유제니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유제니는 대체 하몬 경이 자식 교육을 어떻게 하는 건지 의심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다른 사람의 의상이나 외모를 지적하는 건 아주 무례한 행동이라고 가르쳤다.

결국 베라의 행동은 조롱이다. 하지만 그걸 그녀가 이해할지는 알 수가 없었다. 유제니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드레스가 촌스러우면 불쌍한 건가요?”

“그렇죠. 가난한 거잖아요.”

“그럼 당신은 제가 불쌍한가요?”

곧바로 이어진 질문에 베라는 입을 다물었다. 불쌍하냐고? 그렇지 않다. 그녀는 유제니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좀 얄밉기도 했고.

하지만 대단하다는 감정이 더 컸다. 그러니 그녀를 따라 하는 거지만.

“그건, 아니지만요.”

“왜요? 비스컨 가도 가난하잖아요.”

“그건, 그것과는 다르죠.”

비스컨 가는 유서 깊다. 그리고 올리버 비스컨이 인기도 많고. 비스컨 백작 부인은 공주님의 말벗이었으며 유제니는 나라 안의 고명한 학자들과 학문을 나눈다고 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신을 존경하는 거고요.”

베라의 설명에 유제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앞뒤가 안 맞는다. 유제니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다면 왜 나를 따라 하는 건데요?”

왜 따라 하냐니. 아까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그녀처럼 되고 싶다고. 베라는 그렇게 말하려 했다. 하지만 유제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나를 존중하는 건 내가 유서 깊은 비스컨 가의 사람이기 때문이라면서요. 어머니가 공주님의 말벗이었기 때문이고요.”

그리고 그녀가 학자들과 학문을 나누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건 누가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집안은 본인이 선택하는 게 아니니까. 유제니는 태어나 보니 유서 깊은 비스컨 가의 아가씨였을 뿐이고 어머니가 공주님의 말벗이었을 뿐이다.

운이 좋았다. 그건 그냥 운이 좋았던 거다. 운을 따라 할 수는 없는 거다.

유제니의 설명에 베라는 입을 딱 벌렸다. 그리고 자신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말했다.

“검소하고 예의범절을 잘 지키기 때문이기도 하대요.”

“그럴 수 있어요?”

그러고 있다. 아주 힘들지만 베라는 유제니처럼 행동하고 있다. 검소하게 드레스를 입고 사람들에게 예의범절을 지키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이어진 유제니의 질문에 베라는 입을 다물었다.

“앞으로 적어도 이십 년 넘게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그럴 수 있어요? 어쩌면 평생일지도 몰라요.”

유제니는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검소하고 예의범절을 지키면서. 그건 그녀가 살아온 세월 동안 차곡차곡 쌓인 거다.

고작 몇 주, 몇 개월 따라 한다고 사람들이 베라를 유제니처럼 생각할 리가 없다.

“그럼 어쩌란 말이에요? 이대로 사람들의 무시나 받으면서 살라고요?”

베라는 억울해서 물었다. 그녀가 무슨 짓을 해도 사람들은 베라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예의범절도 모르는 철없는 부잣집 아가씨로 대했고 그녀의 어머니가 운 좋게 하몬 가로 시집갔다며 비웃었다.

몰랐을 때가 나았다. 유제니의 말을 듣고 나자 모든 게 다시 보였다.

그냥 농담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말이 사실은 가시였다. 그걸 못 알아들었다는 게, 사람들의 조롱을 농담으로 알아듣고 웃었다는 게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몬 부인은 시집을 참 잘 갔다는 말에 맞다고 맞장구를 치며 웃었던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정신 차리라고 자신의 뺨을 세게 때리고 싶었다.

“당신 때문이에요. 당신이 그런 말만 안 했어도….”

베라는 억지라는 걸 알면서도 유제니를 원망했다. 그녀도 이게 말이 안 되는 억지라는 걸 안다. 그래도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으면 스스로가 초라하고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정말요?”

가만히 베라를 지켜보던 유제니가 물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정말 모르는 게 더 나아요? 과거로 돌아간다면 모르고 싶어요?”

“당….”

당연하다. 당연하다고 말하려던 베라의 입이 멈췄다. 모르는 게 낫나? 아무것도 모르고 바보처럼 그녀를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우월감을 느끼며 웃을 때가 나을까?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멍청하다고 비웃을 텐데?

베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유제니에게 말했다.

“아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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