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1화 (166/239)

171화. 36 – 8

왕대비가 베라 하몬의 팔을 낚아채며 소리치자 무도회장 안이 얼어붙었다.

다른 귀족들과 대화하던 왕과 왕비는 이게 무슨 소린가 하고 돌아보았다가 왕대비를 보고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그들이 아는 한, 왕대비가 저렇게 흥분한 적은 없다. 어지간한 사건 앞에서도 늘 침착한 분이 아니던가.

“어머니.”

먼저 나선 건 국왕, 루퍼트였다. 그는 재빨리 어머니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의 시선에 드디어 베라 하몬이 들어왔다. 누구더라?

당연하다. 부유한 하몬 경이라면 몰라도 그의 딸까지 알 리가 없다. 물론, 하몬 경의 딸이 예절을 제대로 못 배웠다더라는 소문 정도는 들었다.

하지만 루퍼트는 자신의 어머니가 격노한 상대가 베라 하몬이라는 것은 몰랐다.

“이 아가씨가 어머니께 무례라도 범했습니까?”

그랬다. 왕대비는 베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이 낚아챈 그녀의 손목을 쳐다봤다.

이 팔찌. 똑똑히 기억한다. 가운데에 마법석이 걸린 조잡한 팔찌다. 이걸 그녀의 딸이 그녀에게 보여 준 날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이게 어디서 났지?”

다시 안드레아가 물었다. 하지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베라 하몬은 겁에 질려 있었고 왕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랐으니까.

“이건 내 딸의 것이야. 세상에 이런 게 두 개나 있을 리 없어.”

안드레아의 말에 베라는 그제야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깨달았다. 팔찌를 말하는 거다.

하지만 내 딸이라니? 다시 베라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이건 레이디 비스컨의 팔찌를 똑같이 따라서 만든 거다.

“무슨 일이에요?”

그때, 왕비가 세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왕대비가 잡은 베라의 손목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이걸 누구에게 받았지?”

질문이 좀 달라지긴 했지만 결국은 같았다. 이 팔찌가 어디서 났냐는 것.

왕비는 베라가 대답하지 못하자 왕대비에게 말했다.

“제가 이걸 레이디 비스컨에게 줬거든요. 사과의 표시로.”

“사과의 표시?”

“레이디 비스컨?”

사과의 표시에 의문을 품은 건 왕이었고 레이디 비스컨에 의문을 품은 건 왕대비였다. 그제야 안드레아는 베라가 찬 팔찌가 그녀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고급스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기억하는 팔찌는 마법석이 달렸을 뿐 보석은 훨씬 조잡한 거였다. 아니, 보석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거였다.

“전하.”

그때, 레이디 비스컨이 다가왔다.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부르는 줄 알고 다가온 것이다. 그녀는 베라 하몬의 팔을 잡고 있는 왕대비와 그녀를 둘러싼 국왕 부부를 돌아보았다.

“부르셨습니까?”

안 불렀다. 하지만 왕비는 조금 안도했다. 그녀는 제네비브 공주의 팔찌를 레이디 비스컨에게 줬다. 그렇다면 이 아가씨가 찬 팔찌가 어디서 난 건지 유제니가 알려 줄 것이다.

동시에 왕비는 왕대비가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미 이웃 나라로 시집간 지 이십몇 년이 지난 공주의 물건이다.

가져갈 건 다 가져갔고 보내 달라고 청한 건 다 보내 줬을 거다. 왕비 역시 왕대비에게 공주가 쓰던 궁의 물건을 마음대로 처분해도 된다는 말을 들었고.

“레이디 비스컨, 잘 왔네. 여기 내가 자네에게 팔찌를 하나 줬는데….”

거기까지 들었을 때 유제니는 자신의 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것 말입니까?”

똑같은 팔찌가 유제니의 팔에 걸려 있었다. 아니, 비교해 보면 거기 달린 보석이 조금씩 다르긴 했다. 하지만 가운데에 마법석이 있다는 특징 때문에 같은 팔찌처럼 보였던 거다.

안드레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유제니에게 물었다.

“그걸 왜 네가….”

“제가 레이디 비스컨에게 사죄의 표시로 주었습니다.”

그제야 왕대비의 머릿속에 얼마 전에 왕비가 공주가 쓰던 궁을 정리해도 되는지 물어봤던 게 기억났다. 그쪽에 침입 시도가 몇 번 있었다고 했다. 생각 없는 신입 기사들이 내기 같은 걸 하는 모양이라고.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됐거나 어린 기사나 시종들이 담력 시험이나 내기 같은 걸 한다. 빈 궁이 있으면 침입하는 거다.

당연히 왕과 왕비는 보고를 받지만, 적당히 모른 척하고 있다.

“죄송합니다, 전하. 하몬 양이 제 팔찌를 보고 너무 예쁘다고 해서 제가 비슷하게 만들 수 있게 도와줬습니다.”

재빨리 유제니가 말했다. 왕대비가 왜 화가 났는지 알겠다. 외국으로 시집간 딸의 물건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 사람이 가지고 있으니 당황스럽고 화도 났겠지.

어쩌면 훔쳤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유제니가 나선 덕에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사람들은 왕대비가 화낸 것을 이해했고 동시에 하몬 양을 동정했다. 방금 전 유제니의 발언은 하몬 양이 그녀를 조롱한 게 아니라 동경했다는 뜻이 된다.

“그렇군.”

진정한 왕대비는 베라의 손을 놓고 유제니를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없다. 그녀는 유제니가 공주의 팔찌를 하사받고 그걸 다른 사람이 복제하게 둘 정도로 경망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 방금 전 발언은 이 여자아이를 지키기 위한 거짓말이다.

유제니의 거짓말이 왕대비의 기분을 흡족하게 했다. 그녀는 잠시 유제니를 바라보다가 베라에게 말했다.

“내가 오해를 했어.”

왕대비와 국왕 부부가 떠나자 베라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그녀를 부축해 준 건 유제니였다. 유제니는 그대로 베라를 데리고 휴게실로 향했다.

“괜찮아요?”

안 괜찮다. 어찌나 놀랐던지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베라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유제니는 밖으로 나가서 진한 차를 찾았다. 어지럽거나 지친 사람을 위해 진한 차에 술을 넣어 주곤 한다. 하지만 유제니는 술은 스물한 살부터 마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베라의 차에 술을 넣지는 않았다.

“자, 마셔요.”

유제니가 차를 가지고 돌아오자 베라는 울고 있었다. 그녀의 코가 빨갛게 되도록 우는 것을 본 유제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놀랐겠지. 놀라고 무서우면 눈물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녀는 베라의 옆에 앉아서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품을 뒤져 찾아낸 손수건을 내밀며 말했다.

“그 팔찌는 어떻게 된 거예요?”

언뜻 보기에는 유제니의 팔찌와 비슷하게 생겼다. 최근 유행하는 팔찌와 다르기 때문에 눈에 확 띈다. 이러니 사람들이 하몬 양이 레이디 비스컨을 따라 한다고 수군거린 거겠지.

한숨을 내쉬는 유제니 옆에서 베라는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이 팔찌가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

유제니는 휴게실에 누가 들어오는지 확인하기 위해 문을 쳐다봤다가 다시 베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의 통곡이 잦아들자 다시 물었다.

“그거, 진짜 내 팔찌를 따라 한 거예요?”

아니라고 하면 그렇냐고, 가족들을 불러 주겠다고 하고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베라는 유제니의 손수건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리며 말했다.

“네.”

그녀가 울어 댄 탓에 유제니의 손수건이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손수건은 매우 부드러웠고 정말 좋은 냄새가 났다.

대체 무슨 향수를 쓰는 걸까. 손수건에서 얼굴을 뗀 베라에게 유제니가 다시 물었다.

“왜요?”

간단하다. 베라는 고개를 들고 유제니를 쳐다봤다. 어찌나 울었던지 코뿐 아니라 눈까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훌쩍이며 대답했다.

“당신처럼 되고 싶었으니까요, 레이디 비스컨.”

얼마나 멋진 이름인가. 비스컨 양도, 비스컨 영애도 아닌 레이디 비스컨. 게다가 꼴사납게 통곡하는 사람 옆에서 당황하지도 않고 침착하게 진한 차를 가져오고 손수건까지 선뜻 빌려주는 여유로운 태도라니.

다시 베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 사람처럼은 못 될 것이다.

허어. 유제니는 대체 왜냐고 물어보려다가 멈췄다. 나처럼 되고 싶었다고? 왜?

유제니는 자신이 누군가가 되고 싶어 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비스컨 가의 아가씨긴 하지만 그것뿐이다. 그녀는 가족 중에서 가장 못생긴 비스컨이었고 엘리엇처럼 지나가는 모든 사람을 홀릴 정도로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같은 옷을 계속 입은 거예요?”

유제니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처음엔 그녀도 자신을 조롱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롱할 거라면 어쩌다 한 번 하겠지.

베라 하몬처럼 부유한 아가씨가 계속 같은 드레스와 같은 장신구를 한다는 건 스스로에게도 고역이었을 것이다.

“당신은 검소하니까요.”

베라의 말에 유제니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검소한 게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별 관심이 없는 쪽에 가까웠다.

드레스나 장신구 같은 것들. 유행을 따르지 않는 이유도 같았다. 매번 유행을 따르려면 늘 예민하게 사교계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유제니는 그러는 게 귀찮았다. 관심이 없으니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만 드레스를 수선해서 입었을 뿐이다.

“그래서, 좋던가요?”

이어진 유제니의 질문에 다시 베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마치 둑이 무너지는 것처럼 펑펑 쏟아지는 베라의 눈물에 유제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요! 힘들었어요! 너무 힘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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