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0화 (165/239)

170화. 36 – 7

다행히 엘리엇은 하몬 양을 나라 밖으로 납치해서 버릴 생각은 없었다. 첫 번째로 그랬다간 유제니가 이상하게 생각할 테고 두 번째로 베라 하몬은 그가 손쓰지 않아도 착실하게 파멸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으니까.

“봤어요?”

무도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베라 하몬의 차림새를 가지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왕궁 무도회는 수도에 있는 모든 귀족이 참석해야 한다. 즉, 지금 이 자리에 왕궁에 있는 모든 귀족이 모여 있다는 뜻이다.

왕족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춤을 출 수 없다. 때문에 악단의 음악을 배경으로 사람들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말이 담소지 가십을 교환하는 것에 가깝지만.

“하몬 양이요? 왜 저러는 거래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던데.”

젊은 신사의 말에 나이가 지긋한 여성이 그에게 부채를 내밀며 말했다.

“말이 좀 심하군요.”

“죄송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죽는다는 건 좀 심했다. 남자가 사과하자 다시 사람들의 이야기 주제는 하몬 양으로 돌아갔다.

그동안 베라 하몬이 이상한 짓을 한다는 말은 들었다. 같은 드레스를 반복해서 입는다거나, 친구들에게 못되게 굴었다거나.

“친구들에게 못되게 굴었다는 건 무슨 이야기예요?”

“어찌나 지적을 하던지, 어울리던 아가씨가 울면서 도망쳤다더군요.”

“지적이요?”

무슨 지적을 하지?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꺼낸 여자가 풋 하고 웃었다.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예의범절을 지적했다더군요.”

“친구들이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듣던 사람들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되물었다. 그러자 아까 주의를 받은 젊은 신사가 끼어들었다.

“아니요, 하몬 양이요.”

“세상에.”

말도 안 된다는 반응도 잠시,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베라 하몬이 다른 사람에게 예의범절을 지적한다고?

그녀가 이상해졌다는 소문이 돌기 전에 돌았던 소문은 하몬 양이 어느 티 파티에서 매우 무례하게 굴었다는 소문이었다. 열 살짜리 어린아이도 하지 않을 무례한 질문을 던졌다고 했다.

“베라 하몬 양이?”

“뻔뻔하기도 하지.”

“대체 왜 그러는 거죠?”

베라 하몬 양은 빈말로라도 예의가 바르다고는 말할 수 없다. 부유한 하몬 가의 아가씨인 데다 아직 어리기까지 해도 좋게 보면 당돌하고 나쁘게 보면 버릇이 없었다.

그런데 감히 타인의 예의범절을 지적하다니. 말 그대로 너나 잘하라는 말이 어울린다.

“좀, 누구 따라 하는 거 같지 않아요?”

누군가의 질문에 사람들의 말이 멈췄다. 다들 혹시 하고 생각하던 걸 입 밖으로 내뱉었기 때문이다.

잠시 조용해진 사람들을 둘러보며 젊은 신사가 물었다.

“어, 누구요?”

“모르겠어요?”

그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다들 눈치챈 모양이었다. 젊은 신사는 자신만 모른다는 사실에 눈을 깜빡였고 제일 먼저 말을 꺼낸 부인이 말했다.

“레이디 비스컨이죠.”

“역시 그렇죠?”

“하몬 양이 무례하게 군 곳이 레이디 비스컨의 티 파티였다면서요. 거기서 레이디 비스컨에게 혼났다던데요.”

“어머, 그래서 레이디 비스컨을 괴롭히려고 저러는 거예요?”

같은 드레스를 반복해서 입는 것. 가난한 집안의 아가씨라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물론 장식을 바꾸거나 상의의 천을 교체하거나 하는 식으로 다른 드레스처럼 꾸미기는 한다.

하지만 하몬 양은 가난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몬 가라고 하면 거리에서 신문을 파는 꼬마 애들도 알 정도로 부유한 집안이니까.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눈에는 베라 하몬의 행동이 레이디 비스컨을 조롱하는 것으로 보였다.

“날 따라 하는 거라고?”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왕궁 무도회장을 흘러 흘러 결국 소문의 주인공인 유제니에게까지 닿았다. 사람들이 그녀를 보며 수군거렸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설명해 준 리사는 자신이 잘못한 사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제니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어째서?”

그녀가 유행을 선도한다거나 누구나 따라 하고 싶은 대단한 센스를 가지고 있다면 모르겠다. 하지만 유제니는 평범한 사람이다.

“어, 으음. 글쎄. 유행을 타지 않아서가 아닐까요?”

거짓말이다. 하지만 리사는 꽤 그럴듯하게 대답했다고 생각했다.

유제니는 드레스를 최대한 기본으로, 유행을 타지 않게 만든다.

착용하는 보석 역시 그랬다. 드레스만큼이나, 드레스보다 비싼 액세서리를 유행하는 것으로 사면 유행이 지나면 촌스러워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리사는 다른 사람들처럼 하몬 양이 유제니를 조롱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 것 치고는 돈이 꽤 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지난번 음악회에 하고 온 머리핀이 그렇다. 루비와 사파이어를 적절하게 섞어 꽃을 만들어 장식한 머리핀이었는데 특별히 주문한 거라고 들었다.

그 보석에 상당한 돈을 지불했을 것이다.

“유행을 타지 않는 게 멋있어 보였을 수도 있고요.”

어쩌면 진짜 그런지도 모르겠다. 리사는 이번에는 좀 더 확신을 담아 말했다. 뭔가가 유행하면 한 번쯤은 유행을 따라 보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다.

비스컨 가가 가난하다고 해도 딸이 한 번도 유행을 따르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건 아니다. 유제니 역시 유행하는 드레스나 보석을 한 벌 정도는 가지고 있다.

유제니는 리사의 말에 민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유행을 타기도 해요.”

“어쩌다 한 번이죠.”

리사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유제니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유행은 전혀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어울리면 유행이 지나도 그냥 착용하곤 했다.

그게 리사의 눈에도 가끔은 대단해 보이곤 했다. 촌스럽다는 말에 좌우되지 않는 게.

정말 그런가. 유제니는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따라 하고 싶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그때, 왕족의 등장을 알리는 연주가 시작됐다. 무도회장의 모든 사람이 대화를 멈추고 고개를 들자 시종이 큰 소리로 외쳤다.

“국왕 전하 납시오!”

국왕과 그 가족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제니는 재빨리 왕족이 지나갈 수 있도록 한쪽으로 물러났다.

엘리엇은 어디로 갔지? 물러나며 그녀는 제일 먼저 엘리엇을 찾았다. 오늘 그녀는 그와 함께 왔다. 잠깐 하몬 경과 인사를 해야겠다며 자리를 떴던 터다.

“그냥 서 있으면 됩니까?”

다행히 엘리엇의 목소리는 그녀의 뒤에서 들려왔다. 하몬 경과 인사를 하고 돌아온 모양이다. 유제니는 고개를 돌려 그를 확인했다.

그녀와 리사의 이야기를 들었을까. 리사가 하몬 양의 머리핀에 대해 이야기해 줬다. 엘리엇이 유제니에게 선물해 준 것과 같은 디자인의 머리핀을 하고 왔더라고.

유제니의 기분도 좋은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엘리엇이 들었을지 신경 쓰인다. 그건 그가 일부러 유제니를 위해 디자인한 거라고 들었다.

“어, 네. 일단은요.”

엘리엇의 표정에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유제니는 재빨리 대답했다. 왕족이 앞으로 오면 무릎을 살짝 구부리면서 고개를 숙여야 한다. 그리고 왕족이 지나가면 다시 자세를 바로 하면 되고.

“가끔 말을 걸기도 하세요.”

가깝거나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말을 건다. 잘 지내는지 평범하게 안부를 묻는 거지만 다들 그걸 영광으로 여긴다.

왕족이 관심을 가지는 거니까.

“레이디 비스컨.”

국왕과 왕비는 유제니를 보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안부를 묻기도 하지만 보통은 이름을 부르는 정도다. 유제니가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하자 국왕 부부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녀와 엘리엇을 쳐다보며 말했다.

“레이디 비스컨 곁에 잘 붙어 있게, 번즈 백작.”

“이 방 안에서 자네에게 예절을 가장 잘 알려 줄 사람이거든.”

칭찬을 섞은 농담에 엘리엇과 유제니 주변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국왕 부부는 두 사람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다음 귀족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레이디 비스컨.”

국왕 부부 다음에는 왕대비였다. 그녀는 국왕보다 조금 여유 있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유제니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그녀가 무릎을 굽혀 인사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엇에게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이 같이 왔나?”

“네, 전하.”

유제니보다 엘리엇이 먼저 대답했다. 왕대비 안드레아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떠오르려 했지만 금세 사라졌다. 그녀는 잠시 유제니를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아직 약혼은 안 했고?”

개인적인 장소였다면, 그러니까 여기가 철의 궁이었다면 유제니는 ‘전하!’ 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입을 막은 그녀의 옆에서 엘리엇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엘리엇.”

이건 못 참겠다. 결국 유제니는 견디지 못하고 팔꿈치로 엘리엇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만하라는 신호에 엘리엇은 씩 웃으며 멈췄다.

그러자 주변에서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안드레아는 그런 유제니와 엘리엇을 보고 피식 웃었다. 유제니가 어서 번즈 백작의 구혼을 받아들여야 할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다음 사람에게 넘어가려 했을 때였다.

엘리엇이 물었다.

“마법석이 유행인가 보군요.”

응?

안드레아의 눈이 다시 엘리엇을 향했다. 그는 그녀의 왼손을 쳐다보고 있었다. 손가락에 낀 반지 중 하나가 검기 때문에 마법석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저건 진주예요.”

그때, 유제니가 엘리엇에게 재빨리 속삭였다. 그녀의 말대로 안드레아가 낀 반지는 진주 반지다. 엄지손톱만 한 흑진주가 박혀 있는.

용병 출신이라 그런가 보석은 잘 모르나 보군. 안드레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움직였다. 하지만 문득, ‘왜 하필 마법석일까?’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흑진주보다도 흔하지 않은 게 마법석이다. 그걸 액세서리로 만드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

용병이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전투 중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마법을 품은 마법석을 액세서리로 만들어서 착용하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안드레아의 눈에 마법석이 들어왔다. 그리 큰 건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확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너, 이걸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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