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9화 (164/239)

169화. 36 – 6

또 그 소리다. 아까는 치사하다더니.

엘리엇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녀에게 몸을 기울였다. 꽤 넓은 티 테이블을 사이에 뒀음에도 두 사람 사이는 금세 가까워졌다.

“머리핀 말이에요.”

방금 전 돌려준다길래 엘리엇이 이미 그녀가 사용했으니 그녀의 것이라고 받아쳤다. 덕분에 어제 엘리엇이 유제니에게 준 머리핀은 여전히 그녀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당신은 내가 거절할 수 있는 상황에서 줬어야 했어요.”

유제니는 선물을 거절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엘리엇은 그녀가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상황에서 머리핀을 건네주었다.

아니, 아예 그녀의 머리카락에 꽂아 주기까지 했지.

“죄송합니다. 꼭 드리고 싶었거든요.”

엘리엇의 사과에 유제니는 한숨을 내쉬며 손안의 머리핀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예상이 맞았다. 머리핀에 박힌 보석은 알이 작았지만 상당한 가치를 지닌 보석이었다. 투명도도 높았고 색상도 또렷했으니까.

“다시는 안 그러겠다는 말은 안 하네요.”

비난에 가까운 유제니의 말에 엘리엇은 빙그레 웃다가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 표정을 관리했다. 그리고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제가 뭘 가장 어려워하는지 아시잖습니까.”

아주 잠깐, 유제니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금세 기억이 떠올랐다.

엘리엇이 가장 어려운 게 그녀에게 거짓말하는 거라고 했다. 그러니 거짓말을 안 하겠다는 거겠지.

좋은 자세다. 특히나 거짓말 같은 건 애초에 안 하는 게 가장 좋으니까.

“요새 바쁘다면서요.”

결국 유제니는 한숨을 내쉬며 주제를 돌렸다. 번즈 백작이 여러 사업을 시작했다는 소문은 이미 예전부터 있었다. 커피 하우스와 찻집뿐 아니라 무역과 임대 사업은 그녀도 알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엘리엇이 손에 넣은 산이 광산이라는 게 밝혀졌다고 들었다.

“누군가가 당신께 거짓말을 했군요.”

차를 홀짝인 엘리엇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게 무슨 소리냐는 유제니에게 말을 이었다.

“바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들은 사업만 다섯 개다. 다섯 가문과 사업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엘리엇은 바쁘지 않다고 주장할 모양이라 유제니는 한숨을 내쉬며 질문을 바꿨다.

“커피 하우스와 찻집을 인수했다고 들었는데요.”

“그랬죠.”

“타겟이 완전히 다르잖아요? 왜 두 곳을 인수했어요?”

커피 하우스는 남성의 전유물이지만 찻집은 보통 여성이 많이 다닌다. 물론 남자들도 드나들긴 하지만 주 고객은 여성이다.

유제니의 질문에 엘리엇은 찻잔을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는 그녀에게 어떻게 말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커피 하우스의 지배인이 사라졌거든요.”

“그리어 존스요?”

맞다. 엘리엇은 찻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그를 압박한 사람이 있잖습니까. 그냥 두면 안 될 것 같아서요.”

그냥 두면 안 된다는 게 무슨 소리일까. 유제니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자 엘리엇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수도 밖으로 내보내 줬습니다. 애초에 그가 원한 게 그거였더군요.”

“아.”

그런 말을 했다. 적당한 돈을 주면 수도 밖으로 떠날 거라고 했었지. 유제니는 찻잔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엘리엇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커피 하우스 주인이 운영이 좀 어렵다고 하기에 제가 인수했습니다.”

다정하다. 유제니는 엘리엇에게 사과를 해야 할지 감사를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녀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

엘리엇은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걸 알았기 때문에 덤덤하게 말했다.

“전부터 커피 하우스를 소유하고 싶었거든요. 그러니 당신께 감사해야죠.”

“일이 너무 많아진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광산에 찻집까지.”

유제니가 광산을 이야기하자 엘리엇은 피식 웃었다. 그가 산 산이 광산이라는 게 밝혀지자 여기저기에서 그에게 한 번만 만나 달라며 연락해 왔다.

매일 아침 번즈 가의 집사가 편지를 분류하는 데만 한 시간 정도 사용할 정도로.

그 산이 광산이라는 게 밝혀진 건 꿈에서도 꽤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사람들을 보내 광산을 찾아내게 한 게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었고.

그래서 엘리엇은 광산을 아주 싸게 인수한 것에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그건 유제니의 것이다. 엘리엇의 시선이 그녀가 쥐고 있는 머리핀으로 향했다.

“많지 않습니다. 제겐 일을 도와주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 * *

“허허. 번즈 백작이 올 줄 알았는데.”

풍채가 좋은 하몬 경은 거래를 하기로 한 번즈 백작 대신 그의 부하들이 나타나자 웃으며 말했다. 물론 웃는다고 기분이 좋다거나 번즈 백작의 부하를 반긴 건 아니다.

번즈 백작이 광산을 발견했다고 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쓸모가 없는 줄 알고 싸게 사들인 산이 사실 광산이라는 게 밝혀졌다.

운이 좋은 녀석이군. 하몬 경은 그렇게 생각했다. 운도 결국은 실력이다. 특히나 사업 관련해서는.

그런 운 좋은 녀석과 동업을 하면 그에게도 운이 따를 것이다. 하몬 경은 미소를 띤 채 번즈 백작의 부하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번즈 백작이 많이 바쁜 모양이군. 앉게.”

번즈 백작이 직접 오지 않은 건 못마땅하지만 어쨌거나 이들은 대신 계약하러 온 거다. 하몬 경은 그의 직원이 번즈 백작의 부하들에게 계약서를 내미는 사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광산에서 보석이 채굴됐다면서?”

듣기로는 꽤 괜찮은 품질의 보석이 채굴됐다고 한다. 사파이어와 루비였던가. 하몬 경은 말없이 계약서를 읽는 용병들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봤나?”

“네.”

데이빗은 읽어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 계약서를 읽는 것을 포기하고 대답했다. 어차피 로지가 그보다 머리가 좋다. 문제는 전투 실력도 그녀가 그보다 좋다는 거지만.

“어때. 진짠가?”

“진짜니 백작님과 동업을 하려 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때, 계약서를 살펴본 로지가 반문했다. 다들 그 이유로 엘리엇에게 연락을 한다. 광산을 발견했다는 건, 그리고 그 광산에서 사파이어와 루비가 나온다는 건 엘리엇 번즈가 지금보다 훨씬 더 엄청난 부자가 된다는 뜻이니까.

“그렇긴 한데 보석을 못 봐서 말야. 자네들은 봤나?”

봤다. 로지의 머릿속에 제일 처음 발견한 광석이 떠올랐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번즈 백작이 조용히 가공해서 머리핀으로 만들었다.

“이 부분 말입니다.”

대신 그녀는 하몬 경에게 다른 의문을 제기했다. 그녀가 미리 전달받은 것과 좀 다르다. 로지의 지적에 하몬 경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허, 그렇군. 내 부하가 실수한 모양이야.”

하몬 경의 시선이 곁에 서 있던 직원에게 향했다. 곧바로 직원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하몬 경은 로지와 데이빗에게 말했다.

“미안하게 됐군. 다시 고쳐 오라고 하겠네. 일이 이렇게 됐으니 자네들도 나가서 즐기는 게 어떻겠나?”

지금 하몬 저택에서는 무도회가 열리고 있다. 그래서 일부러 오늘 번즈 백작을 계약하자고 부른 거기도 하다. 번즈 백작이 왔다면 그가 하몬 가의 무도회에 참석했다는 소문을 낼 수 있을 테니까.

어떻게 할래? 데이빗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로지를 쳐다봤다. 그는 귀족의 무도회가 궁금했다. 번즈 대장은 그의 집에서 무도회 같은 걸 열 생각이 없어 보여서 더더욱.

로지는 하는 수 없이 잠시 나갔다가 오겠다며 데이빗과 함께 서재를 나섰다. 그리고 복도 저편의 환한 빛과 악사들이 곡을 연주하는 광경을 보며 말했다.

“실망인데.”

이런 식으로 계약으로 장난질을 치려는 귀족이 벌써 세 명이다. 로지가 본 것만 셋이니 더그가 본 것까지 합치면 그 수는 더 늘어나겠지.

누가 귀족은 명예를 안다고 했던가. 다 개소리다. 입술을 비틀며 데이빗을 따라 홀로 들어선 로지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한밤인데도 이 저택 안은 한낮처럼 밝았다. 그리고 화려하게 치장한 사람들 때문에 더더욱 눈이 부셨다.

“잠깐 기다리게. 내 딸에게 자네들을 사람들에게 소개해 주라고 하지.”

뒤늦게 따라 나온 하몬 경이 로지와 데이빗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뭘 어째야 할지 고민하던 참이다.

“베라, 이리 와 봐라.”

하몬 경은 저 멀리서 보이는 딸을 불렀다. 그리고 로지와 데이빗에게 변명처럼 말했다.

“요즘 애들은 무슨 생각인지 영 알 수가 없다니까. 괜찮은 옷 다 내버려 두고 같은 옷을 몇 번 돌려 입는 건지.”

참 알 수가 없다니까. 투덜거리는 하몬 경 앞으로 베라 하몬이 다가왔다. 하몬 경의 말대로 베라 하몬의 드레스는 생각보다 훨씬 수수했다.

이 홀에서 가장 수수한 드레스를 고르자면 그녀의 것이 선택될 정도로.

하지만 데이빗은 베라의 드레스가 아니라 다른 것을 보고 로지를 쳐다봤다. 베라의 머리에 꽂힌 머리핀이 아주 익숙했기 때문이다.

“저거….”

번즈 대장이 광산에서 제일 처음 채굴한 보석을 가공해서 만든 머리핀이다. 데이빗보다 늦게 베라의 머리핀을 발견한 로지의 눈살도 찌푸려졌다.

“요즘 유행하는 디자인은 아니겠지?”

로지의 질문에 데이빗은 고개를 저었다. 저런 디자인이 유행하는 건 본 적이 없다. 무엇보다 번즈 대장이 레이디 비스컨에게 선물하기 위해 주문한 거다. 유행하는 디자인일 리가 없다.

“허.”

로지의 신음에 데이빗 역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로지에게 물었다.

“설마 저 여자도 나라 밖에 버리고 와야 하는 거 아니겠지?”

바로 며칠 전에 남자 하나를 납치해서 나라 밖에 버리고 왔다. 이름이 뭐더라? 남자의 이름을 떠올리려는 데이빗에게 로지가 속삭였다.

“그리어 존스? 아닐걸. 그놈은 레이디 비스컨을 협박했다며.”

“저 여자는 대장이 레이디 비스컨에게 선물한 머리핀을 훔쳐서 쓰고 있는데?”

로지와 데이빗이 아는 한, 레이디 비스컨에게 해를 끼치는 자라면 번즈 대장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치워 버리려고 한다.

“저렇게 어린애를 갖다 버리는 건 좀 그런데.”

골치 아프다는 데이빗의 말에 로지 역시 인상을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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