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8화 (163/239)

168화. 36 – 5

“마님.”

응접실에 앉아 있는 이자벨라에게 건장한 체격의 하인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이자벨라는 자신을 다시 부르는 하인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 됐지?”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전부?”

전부와 이야기를 했냐는 질문에 하인이 멈칫했다. 전부는 아니다. 두 명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으니까.

그는 공작 부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게 좋다는 걸 알았고 아들을 잃어버린 지금은 더더욱 그래야 한다는 걸 알았다.

“아닙니다. 두 명은 정신을 잃어 끝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전부 일치합니다.”

각각 한 명씩 불러다가 고문과 질문을 던진 끝에 얻어 낸 결론이다. 하인의 설명에 이자벨라는 멍하니 테이블에 손을 뻗었다.

하인은 그녀가 가느다란 손으로 그의 몇 년 치 연봉보다 비싼 찻잔을 들어 올리는 것을 지켜봤다. 원래도 그리 풍채가 좋은 편이 아닌 공작 부인은 몇 달 새에 홀쭉하게 말라 있었다.

그리고 그건 공작가의 하나뿐인 후계자이자 이자벨라의 아들, 힐데자르 때문이다.

“뭐라고 하던가.”

찻잔에 입술을 댄 다음에야 이자벨라는 차가 다 식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다 식은 차를 마시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고 하인에게 손짓했다.

설렁줄을 당기라는 손짓에 하인은 군말 없이 설렁줄을 당기고 돌아왔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둥지로 통하는 길이 부서진 건 사실인 모양입니다.”

그 배신자들이 일괄적으로 증언했다. 힐데자르를 버리고 도망칠 때 빠져나온 곳은 부서졌다고.

감히.

배신자들을 생각하자 이자벨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감히 그녀의 아들을 배신하고 뻔뻔하게 이 집에 와서 공작가를 농락해?

아들을 배신한 배신자 무리인 것도 모르고 힐데자르의 소식을 조금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싶어 지극정성으로 대접했다. 그 뻔뻔한 놈들을.

쨍그랑!

분노를 참지 못한 이자벨라는 앞에 놓여 있던 찻잔을 있는 힘껏 집어 던졌다.

하인은 그의 몇 년 연봉보다 비싼 찻잔이 박살이 나는 것을 침울하게 바라보았다.

때때로 귀족 부인은 누구를 고문하기는커녕 피를 보는 것조차 못한다고 생각하는 멍청한 놈들이 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적어도 이자벨라 거마로트 공작 부인은 남을 고문하거나 피를 보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배신자들에게 진실을 이끌어내는 걸 그녀가 아닌 하인이 한 이유는 간단하다. 공작 부인이 했다간 배신자들이 진실을 말하기도 전에 전부 사망했을 테니까.

“입구는?”

언제 찻잔을 집어 던졌냐는 듯 금세 감정을 조절한 공작 부인이 침착하게 물었다. 그것 역시 확인했다. 그들이 들어온 것을 확인한 드래곤이 막았다고 한다.

“막았다고?”

“네. 눈앞에서 막았다고 합니다.”

그건 좀 이상한 이야기다. 이자벨라는 물끄러미 창밖을 쳐다보다가 물었다.

“그렇다면 그 야만인은 어떻게 들어간 거지?”

힐데자르와 그 부하들이 들어간 입구를 드래곤이 막았다면, 번즈 백작은 대체 어떻게 들어간 거란 말인가.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저 배신자들이 나온 길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드래곤의 둥지로 통하는 길은 여러 개라는 뜻이다. 그중 하나가 번즈 백작이 들어온 입구고.

“결국 그놈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군.”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 드래곤의 둥지로 들어가야 한다. 둥지의 위치는 가둬 둔 배신자들에게서 알아냈다. 문제는 입구였다.

“마님, 차를 가져왔습니다.”

그때, 하인이 다시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녀는 소리 내지 않고 찻잔을 테이블 위에 놓더니 남은 컵 받침을 치웠다. 그리고 익숙하게 벽에 부딪혀 박살 난 찻잔을 치우기 시작했다.

“데려올까요?”

하인이 물었다. 번즈 백작을 납치하겠다는 거다. 하지만 이자벨라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번즈 백작에게 용병을 몇 번 보냈다.

그가 아들의 행방불명과 어떤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하지만 그녀가 보낸 용병이 그 야만인을 붙잡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용병은 사라지거나, 돌아와서 계약을 파기하고 떠났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번즈 백작을 데려올 수 없다는 뜻이다.

“이제 와서 초대한다고 순순히 올 리도 없고.”

이자벨라는 따듯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중얼거렸다. 어떻게 해야 한다. 적어도 말은 할 수 있는 상태여야 한다.

그때, 하녀가 부서진 찻잔을 모두 치우고 일어났다.

“안나.”

공작 부인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가려는 하녀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그녀가 다가오자 자신의 손을 펼쳐 보였다.

“손 보여 줘.”

손? 안나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의 손 안에는 부서진 찻잔밖에 없다. 안나는 순순히 손을 펼쳐 부서진 찻잔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이자벨라가 보려 한 건 찻잔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는 하녀의 손을 보고 가볍게 인상을 쓰며 타박했다.

“장갑을 끼고 치웠어야지.”

날카로운 도자기 조각을 치운 탓에 하녀의 손에 가벼운 상처가 나 있었다. 이자벨라는 컵 받침 위에 유리 조각을 내려놓게 한 뒤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하녀의 손을 감싸 주었다.

그리고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집사에게 가서 의사를 불러 달라고 하렴. 다음부터는 장갑 끼는 걸 잊지 말고.”

공작 부인의 말에 안나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부끄러움 반, 감동 반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이런 점이 공작가의 하인들이 공작가에 충성하는 이유다. 하인은 안나가 상기된 얼굴로 나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이 닫히자마자 말했다.

“하몬 가는 어떻습니까.”

“하몬 가?”

“핸더슨 가는 어려울 테니까요.”

그의 말이 맞다. 이자벨라와 함께 번즈 백작을 공격하던 핸더슨 후작 부인은 갑자기 아들의 상태가 좋지 않다며 물러났다.

그럴듯한 이야기지만 이자벨라는 후작 부인의 심정에 어떤 변화가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들의 상태가 좋지 않다면 더더욱 번즈 백작을 끌어내야 한다. 그래야 그가 감히 후작가를 차지하려 하지 못할 테니까.

대체 어떤 영악한 짓을 한 걸까. 공작 부인의 머릿속에 레이디 비스컨이 떠올랐다. 그녀의 짓이 분명하다. 얌전하고 조용한 아가씨지만 그녀는 사교계의 여자들을 겉보기만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걸 잘 알았다.

솔직히 말하면, 이자벨라는 레이디 비스컨이 마음에 들었다. 성정이 급하고 욕심이 많은 아들에게는 조용하지만 단호한 레이디 비스컨 같은 여자가 어울릴 테니까.

“이래서 여자애들한테 검술을 가르치면 안 된다니까.”

이자벨라는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레이디 비스컨이 어릴 때 검술만 배우지 않았다면 벌써 힐데자르와 결혼했을 거다.

하필 비스컨 백작 부부가 딸에게도 검술을 가르치겠다는 허무맹랑한 짓을 하는 바람에 힐데자르가 레이디 비스컨을 질색하게 되지 않았던가.

“그래. 하몬 가로 하지.”

이자벨라는 다시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핸더슨 후작가가 안 된다면 하몬 가로 하면 된다. 그녀는 고개를 꾸벅하고 물러나는 하인을 쳐다보지도 않고 창밖을 바라보다가 그가 문을 닫기 전에 불쑥 물었다.

“그 마법사는 어떻게 됐지?”

“마법사요?”

마법사. 하인의 머릿속에 지하에 갇힌 멍청이들이 한 목소리로 말한 마법사가 떠올랐다. 여행을 즐기던 힐데자르에게 접근해 드래곤의 둥지를 알려 준 사람이 있다고 한다.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는 자신을 마법사라고 소개했다.

“탑에서는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마법사라는 말에 거마로트 공작가는 제일 먼저 마법사의 탑에 문의했다. 하지만 탑에서는 아직 아무 대답도 없다.

재촉하냐는 하인의 질문에 이맛살을 찌푸린 공작 부인은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다른 이름으로 문의했다.

아주 옛날에는 드래곤과 마법사가 한 편이라는 말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드래곤에게 마법을 배운 인간이 최초의 마법사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마법사는 요정의 피를 이어 태어나 선천적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과는 다르다. 때문에 마법사의 탑에서는 발시안의 왕족을 경계하고 있었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요정의 힘을 짙게 타고 태어난 제네비브 공주가 이웃 나라로 시집가기 전에는 왕족과 사이가 매우 안 좋기도 했다.

“물론 북부로 사람을 보내 찾고 있기도 합니다.”

힐데자르를 드래곤의 둥지에 가둔 게 엘리엇 번즈의 죄라면, 힐데자르가 드래곤의 둥지로 들어가게 한 죄는 다른 자에게 물어야 한다.

어쩌면 엘리엇 번즈를 잡아 올 필요 없이 그 마법사를 찾아서 둥지로 가는 길을 안내하게 할 수도 있고.

하지만 힐데자르가 마법사를 만난 건 북부 이즈 근처였고, 그쪽은 험준한 산 때문에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그래.”

이자벨라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다시 차를 홀짝였다. 그녀의 아들이, 하나뿐인 아들이 드래곤의 둥지에 갇혀 있다. 그것도 사악한 드래곤에게 고문을 받으면서.

다시 분노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힐데자르는 그런 꼴을 당할 사람이 아니다. 고귀한 거마로트 공작이 될 사람이고 국왕의 조카다. 이자벨라가 열 달 동안 품었다가 배 아파 낳은 귀하디귀한 아들이기도 했다.

쨍그랑!

닫힌 문 너머로 다시 도자기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하인은 침울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도자기 조각에 마님이 다치기 전에 치우기 위해 청소도구를 찾아 움직였다.

* * *

“좀 치사한 구석이 있어요.”

응접실에서 유제니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던 엘리엇은 유제니의 말에 무슨 소리냐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치사하다고? 그의 어리둥절한 표정에 유제니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어제 음악회에서 말이에요.”

“즐거우셨습니까?”

엘리엇은 얼굴만 비췄다. 사실, 음악 따위는 관심도 없다. 그가 거기에 간 건 그런트 경과 사업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유제니의 얼굴도 보고 싶었고.

“음악회는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당신은 좀 비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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