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7화 (162/239)

167화. 36 – 4

“오, 그럼요. 우린 친구인걸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사교계에 데뷔한 지 좀 된 사람들이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유제니 비스컨은 엘리엇 번즈와 멀어질 생각이 없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소문들을 모르거나 헛소문이라고 믿는다.

대부분은 이러면 물러난다. 굳이 그 소문을 모르냐고 이런 장소에서 묻는 건 심술을 부리는 거거나 생각이 짧다는 걸 보여 주는 거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내게 다가온 사람 중에 한 남자가 불쑥 물었다.

“번즈 백작님도 당신이 커피 하우스에 드나드는 걸 알까요?”

그리어 존스인 줄 알았네. 하지만 남자는 그리어 존스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키가 크고 젊은 데다 약간 낯이 익기까지 했다.

누구더라. 내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자 남자가 고개를 까딱하며 말했다.

“모스 분입니다.”

누군지 기억났다. 샤일록 경과 함께 있던 자다.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까딱하며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분 경.”

그는 내가 자신을 기억하는 줄 몰랐던 모양이다. 어떻게 잊겠는가. 그날, 내가 지팡이로 후려쳐서 기절했거든.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뒤통수는 괜찮아요?”

솔직히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거 보고 내가 사람을 죽인 게 아닌지 걱정했다. 그 뒤에 에스컬레 경에게 죽거나 크게 다친 사람은 없다고 들어서 안심했지만.

분 경은 내 질문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말했다.

“괘, 괜찮습니다.”

그래?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요. 내가 어딜 드나든다고요?”

분 경의 얼굴은 아까 전보다 더 붉게 변했다. 저러다 터지는 거 아냐? 그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확인하더니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깨달은 표정이었다.

이대로 계속 질문하는 척 나를 공격했다간 내가 그날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말할 수 있다. 물론 나는 떠들고 다닐 생각이 없지만 기사가 일반인, 그것도 귀족 여성의 지팡이에 고작 한 대 맞고 나가떨어졌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겠지.

다행히 분 경은 자신의 실수를 수습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로 웅얼거리며 자리를 떠난 것이다.

“이상한 사람이네요.”

“왜 저러는 거죠?”

분 경이 떠나자 남아 있던 사람들이 그의 뒷모습을 보며 수군거렸다. 그러게요. 나는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여 보였다.

“그런데 레이디 비스컨, 그 드레스, 누구에게 주문한 거예요?”

그때, 맞은편에 서 있던 중년 여성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이 드레스? 나는 반사적으로 내 드레스를 내려다봤다가 상대방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건 작년에 주문한 거다. 어닝과 무도회에 참석해야 해서 어닝의 재킷과 맞춰서 주문했었다. 그걸 앞판만 떼서 다른 천으로 갈았지.

같은 옷을 두 번 입지 않는 게 예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몬 양 정도로 부유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드레스 한 벌을 한 번만 입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다들 드레스를 사면 상의만 천을 바꾸거나 드레스 자락에 장식을 더하는 식으로 다른 드레스처럼 꾸며 입는다.

그리고 그건 아마 두 왕족의 기 싸움으로 시작된 예법이었지.

바보 같은 싸움이었다. 왕자 둘이 차례로 무도회를 열었는데 서로의 무도회가 더 낫다고 싸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동생 쪽이 형의 옷차림을 비난했다는 거다. 형이 주최자로 무도회를 열었을 때와 자신의 무도회에 손님으로 참석했을 때 둘 다 같은 옷을 입고 왔다고.

열심히 준비한 주최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비난에 당시 국왕도 동생 쪽의 손을 들어 줬다고 들었다. 그 뒤로 같은 옷을 두 번 입지 않는 게 예의가 되었고.

자기들끼리만 그러면 되지 우리는 무슨 죄로 이래야 하는지 모르겠네.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물었다.

“예전에 단골 가게에서 주문한 건데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그 디자인이 젊은 아가씨들 사이에 유행하는 건가 싶어서요.”

유행이냐고? 그럴 리가 없다. 나는 가능하면 유행을 따르지 않으려 노력하거든.

이유는 간단하다. 유행을 따르는 데는 많은 돈이 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그렇게 유행에 민감한 성격도 아니고 가끔 내게 안 어울리는 유행도 있다.

유행에 따르기보다는 기본에 충실하는 게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내가 그럴 리 없다고 말하려는 순간, 맞은편에 있던 부인이 내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봐요. 저 아가씨도 비슷한 드레스를 입고 있죠?”

비슷한 드레스라고? 고개를 돌려 보자 확실히 나와 비슷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있었다. 내 것보다 훨씬 새 드레스긴 했지만.

신기하긴 하지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으니까. 일부러 유행을 타지 않는 드레스를 주문했겠지.

하지만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다.

“하몬 양?”

베라 하몬이었다.

그녀는 약간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내 목소리를 듣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반가운 표정으로 내게 다가오려다가 멈췄다.

“오, 오랜만이에요. 레이디 비스컨.”

그렇게까지 오랜만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하몬 양이 입은 드레스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예전 드레스를 고쳐 입었거니 했겠지만 이 사람은 하몬 가의 아가씨가 아니던가.

“잘 지냈어요?”

나는 평범하게 인사를 건네다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하몬 양이 우리 집에서 무례를 저지른 사건이 꽤 많이 알려진 모양이다. 그러니 하몬 양도 저렇게 내 눈치를 보는 거고.

하지만 클레어에게 사과를 했다고 들었다. 클레어는 진심인 것 같다고 했다. 나 역시 그렇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클레어에게 사과한 뒤 내게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뭔가를 바라고 클레어에게 사과를 했다면 내게 찾아와서 사과했다고 알렸겠지.

나는 머뭇거리며 내게 다가오는 하몬 양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드레스 예쁘네요.”

왜 아까 전 그 부인이 요즘 유행하는 드레스냐고 물어봤는지 알겠다. 하몬 양이 입은 드레스는 내 드레스와 매우 비슷한 디자인이었다. 게다가 무늬나 장식도 거의 흡사했다.

다른 건 앞판뿐이었는데 그건 내가 앞판을 바꿨기 때문이겠지.

“정말요?”

내 칭찬에 하몬 양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곧 미소로 휘어졌다. 그녀는 안심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레이디 비스컨도….”

재빨리 뭘 칭찬해야 할지 찾는 것처럼 하몬 양의 눈동자가 나를 훑었다. 꼭 칭찬할 필요는 없는데. 하지만 그게 예의처럼 느껴지기는 하지.

다행히 하몬 양은 뭘 칭찬해야 하는지 금세 찾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내 머리핀을 보며 말했다.

“머리핀이 아주 예쁘네요.”

방금 엘리엇이 주고 간 거다. 문제는 방금 줬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는 거고. 나는 하몬 양의 관심을 머리핀에서 팔찌로 옮기기 위해 팔찌를 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고마워요.”

드디어 하몬 양의 시선에 팔찌가 들어왔다. 그녀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팔찌도 예쁘네요. 가운데에 있는 보석은 어떤 거예요?”

다행이다. 이 팔찌를 보면 다들 가운데에 있는 보석이 뭔지 묻곤 한다. 보석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보석이기 때문일 거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보석이 아니다. 나는 그녀가 보기 쉽도록 팔을 들며 말했다.

“마법석이래요. 아무 마법도 들어 있지 않지만요.”

“마법이 들어가요?”

마법석이 뭔지 모르는 모양이다. 나는 천천히 설명했다.

“마법을 보관할 수 있는 보석이에요. 마법사가 아니어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죠.”

예전에는 전쟁터로 나가는 사람들이 마법석을 두세 개씩 지니고 나갔다고 한다. 보호 마법과 공격 마법을 넣어서.

마법석이 클수록 더 강한 마법을 넣을 수 있다는 설명에 하몬 양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이 정도면 어떤 마법을 넣을 수 있어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난 마법사가 아니라서. 아마 마법사에게 감정해 달라고 하면 알려 줄 테지만 어차피 장식품이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저거, 베라 하몬이에요?”

하몬 양과 헤어지고 나자 어디에 있었는지 줄리아와 로렌이 손에 음료 잔을 들고 나타났다. 너희 어디 갔다 왔니? 나는 재빨리 줄리아의 잔을 확인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로렌이 말했다.

“주스예요. 제가 확인했어요.”

고맙다, 로렌. 나는 그녀를 향해 윙크를 해 보였다. 같은 나이인데 줄리아보다 로렌이 더 믿음직스럽다. 이건 성격 탓인 걸까, 그녀가 꿈으로 한 번 살아 봤기 때문인 걸까.

“뻔뻔하네. 그 짓을 해 놓고 유제니한테 와서 말을 걸어요?”

줄리아는 나와 로렌의 대화를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 나는 재빨리 주변을 살피고 줄리아에게 말했다.

“목소리 낮춰.”

“소문 다 났어요. 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줄리아.”

그렇다면 더더욱 큰 목소리로 말할 필요는 없다. 나는 줄리아에게 그만하라고 한 뒤 덧붙였다.

“클레어에게 사과했대.”

“그래서요?”

줄리아는 콧방귀를 뀌었다. 사과했다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라는 태도다. 나는 대신 로렌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소문이 다 났다고?”

“여기서 모르는 사람이 없던걸요?”

그렇군. 정말로 하몬 양과 내 사이에 있었던 일이 많이 알려진 모양이다.

“게다가, 방금 그 옷차림, 정말 못됐어요.”

“옷차림이 왜?”

이어진 줄리아의 말에 나는 그게 무슨 소린지 몰라서 그녀를 쳐다봤다. 줄리아는 정말 모르냐는 표정이었고 로렌 역시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제니랑 비슷한 드레스였잖아요.”

“드레스 정도야 겹칠 수도 있지.”

특히나 유행하지 않는 드레스라면 더더욱 그렇다. 아닌가? 나는 로렌의 표정을 확인하고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행하는 드레스라면 겹칠 수 있죠. 하지만 유제니의 드레스가 겹친다고요?”

그렇게 말한 로렌이 줄리아를 쳐다봤다. 잠깐, 그러면 하몬 양이 일부러 나와 비슷한 드레스를 맞췄단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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