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6화 (161/239)

166화. 36 – 3

“오.”

무슨 말인지 알겠다.

행사를 열거나 여러 명의 손님을 초대할 경우 집주인은 손님들 관계를 파악해서 초대해야 한다. 서로 사이가 안 좋은 손님을 동시에 초대하면 분위기가 좋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리사는 나와 하몬 양을 동시에 초대한 것을 사과하는 거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하몬 양이 사과했거든요.”

“당신한테요?”

“네. 그리고 라넌 경에게도요.”

클레어가 이야기해 줬다. 하몬 양이 왕궁까지 찾아와서 사과하고 갔다고.

“어머, 뭐라고 사과를 하던가요?”

음. 나한테 한 사과는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리고 클레어와 나눈 대화도.

클레어가 그랬다. 하몬 양은 나를 부러워하는 것 같다고.

어마어마한 부자인 하몬 가의 하나뿐인 딸이 날 왜 부러워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날 부러워한다고 했다.

나는 단어를 골라 말했다.

“음, 평범한 사과예요. 자기가 잘못했다고 했죠.”

“그렇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리사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신통치가 않았다. 왜 그러는 거지? 나는 그녀의 태도가 신경 쓰여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요?”

“사과할 때는 하몬 양, 이상한 점이 없었던 거죠?”

이상한 점? 사과할 테니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잘해 달라고 부탁하는 걸 이상하다고 해야 하는 걸까. 평범하다고 해야 하는 걸까.

나는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리사는 고민하는 듯하더니 내게 말했다.

“요새 하몬 양이 좀 이상하다는 말이 있어요.”

“이상하다니, 뭐가요?”

“전부 다요. 행동도, 옷차림도요.”

행동이 이상한 건 이해가 되는데 옷차림이 이상하다는 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내 표정을 본 리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좀 다르게 행동한대요. 그리고 옷도 평소와 다르게 입고요.”

다르게 행동하고 다른 옷을 입는다고? 내 시선이 나도 모르게 로렌을 향했다. 그녀 역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하몬 양도 꿈을 꿨나?

“다들 대체 왜 그러는지 궁금해하는 중이에요.”

미쳤다는 소리는 안 하고? 나는 그렇게 묻고 싶은 것을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몬 양도 꿈을 꿨을까? 머릿속에는 온통 그 생각으로 가득 찼다.

내가 만난 꿈을 꾼 사람은 다들 나와 만나기 전에 꿈을 꾼 사람들이었다. 꿈을 꾼 시기도 비슷하다.

엘리엇을 만나기 일주일쯤 전이었으니까 몇 달 전이겠지.

하지만 하몬 양은 나를 만났을 때 꿈을 꾼 것 같은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레이디 데번처럼 나를 무서워하거나 싫어해서 숨긴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도 인사를 해야겠다며 떠나는 리사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재빨리 로렌에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로렌과 혹시 이 일에 대해 아는지 이야기를 나누려 했을 때였다.

“좀 이상하긴 해요.”

줄리아가 입을 열었다. 너도 알아? 나와 로렌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언제 받아 들었는지 음료 잔을 든 줄리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옷도 다 주변에 나눠 줬대요. 그리고 몇 가지 드레스로 돌려 입는 모양이라고 하더라고요.”

잠깐, 그게 술이 아닌지 확인해야겠다. 나는 줄리아가 말하는 동안 그녀의 손에서 음료 잔을 빼앗아 확인했다. 역시 술이었다.

내가 지나가는 하인의 쟁반에 빼앗은 술잔을 내려놓자 줄리아가 인상을 쓰며 투덜거렸다.

“고작 한 잔이잖아요.”

어떤 집은 가벼운 술 한 잔 정도는 용납해 주기도 한다. 하지만 에스컬레 경은 나를 믿고 줄리아를 내게 맡긴 거다. 나는 줄리아를 집에서 나올 때와 완전히 똑같은 상태로 돌려보내야 할 의무가 있다.

나는 대신 주스가 담긴 잔을 줄리아에게 건네며 말했다.

“시도는 좋았어.”

줄리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옆에서 로렌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나는 로렌에게도 주스를 건네준 뒤 물었다.

“다르게 행동하는 건 뭐야?”

옷차림이 다르다는 게 무슨 소린지는 알겠다. 자기 옷을 주변에 나눠 주고 몇 벌을 돌려 입는다는 거겠지. 하몬 가는 하몬 양이 매일 다른 드레스를 입어도 될 정도로 부유하다.

실제로 하몬 양은 같은 드레스는 연달아 입지 않는다는 말이 있고.

“음, 이건 좀 이상한데.”

입술을 삐쭉이던 줄리아가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그녀는 주스를 홀짝이며 말했다.

“착한 척한대요.”

“착한 척이라고?”

착한 척하는 게 뭐가 나쁜지 모르겠다. 내 표정을 본 줄리아는 인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저도 잘 몰라요. 그렇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대체 하몬 양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아니, 무슨 꿈을 꾼 걸까.

로렌에게 하몬 양이 꿈에서 어땠는지 물어보려고 했을 때였다. 내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디 비스컨.”

여기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목소리라 나는 처음에는 내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 정도로 엘리엇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 여기서 엘리엇의 목소리를 환청으로 들을 정도라니.

하지만 내 맞은편에 서 있는 줄리아와 로렌의 표정이 달라졌기 때문에 나는 그게 환청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상에.

“번즈 백작.”

나는 곧바로 몸을 돌려 엘리엇을 향해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그가 여기 왔을 줄은 몰랐다. 바로 어제 만났지만, 그런트 가의 음악회에 초대받았다는 말은 안 했는데.

“번즈 백작님도 오실 줄은 몰랐어요.”

내가 묻고 싶던 그 질문이 줄리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엘리엇은 줄리아를 한 번 쳐다보더니 나를 향해 말했다.

“그런트 경과 동업을 하고 있어서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런트 경과도 동업을 하고 있어? 나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하몬 경과 하는 게 아니고요?”

“하몬 경과도 동업을 하고 있죠.”

이 남자가 동업을 안 하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내 표정을 본 엘리엇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많은 사람과 친분을 쌓아 두는 게 중요하니까요.”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친분을 쌓기 위해 동업을 한다는 말이다. 그건 좀 부럽다. 친분을 쌓기 위해 부유한 사람들과 사업을 할 수 있다니.

동시에 엘리엇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신흥 귀족인 그에게 가장 부족한 건 사교계의 인맥이다. 그걸 위해 동업을 한다는 거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내가 도와줄 건 없고요?”

친분을 쌓는 건 엘리엇이 스스로 해야 할 일이지만 다른 사람들을 그에게 소개해 줄 수는 있다.

지난번 티 파티 때 억지로라도 부를 걸 그랬나. 물어봤는데 안 오겠다고 하길래 그냥 뒀었다. 내 지인들을 초대하는 자리인데 엘리엇은 심심할 것 같았거든.

“괜찮습니다.”

엘리엇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때도 이런 말투였지. 티 파티에 참석하는 게 꽤 싫은 모양이라 속으로 웃었던 게 기억난다.

“좋아요. 그럼 어서 가 봐요.”

나는 엘리엇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이상해졌다. 엘리엇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딜 말입니까?”

“친분 쌓으러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눠야 하잖아요.”

이런 음악회나 무도회, 연회 등등에 참석하는 이유가 그거다. 다른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서.

물론 춤을 추는 게 좋다거나 음악 감상을 하고 싶다는 이유가 더 강한 사람도 있긴 하다. 나와 줄리아처럼.

하지만 엘리엇은 친분을 쌓아야 하고 내가 그를 독점하고 있는 건 옳지 않다.

“괜찮습니다.”

어쩐지 아쉬운 것처럼 엘리엇이 다시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으응? 나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고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과 있는 게 더 좋거든요.”

맙소사.

순간적으로 얼굴에 열이 확 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것보다 더 당황스러웠던 건 우리 옆에 있던 줄리아와 로렌이 서로를 쳐다보더니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했다는 거다.

아니, 얘들아. 가지 마!

“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인사는 해야겠죠.”

내 당황한 표정을 본 모양이다. 엘리엇은 곧바로 그렇게 말하더니 내 손을 놓고 물러났다. 안심되면서도 동시에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참.”

내게서 한 걸음 물러났던 엘리엇이 갑자기 뭔가를 발견한 것처럼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뭐, 뭐 하는 거지?

놀라서 뒤로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정확하게는 나와 엘리엇에게 향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엘리엇은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처럼 뭔가를 주워 들더니 일어나서 내게 내밀며 말했다.

“이거, 떨어트리셨더군요.”

내 것이 아니다. 나는 엘리엇의 손 안에 있는 머리핀을 발견하고 미간을 찡그렸다.

“제 것이….”

“자, 제가 대신 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머리핀을 내 머리카락에 꽂아 버렸다. 아니, 내 것이 아니라니까? 나는 다시 한 번 그렇게 말하려다 그의 표정을 보고 엘리엇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깨달았다.

이 머리핀은 내 것이 맞다. 그가 내게 주려고 가져온 거니까.

바닥에 떨어진 걸 주운 것도 진짜 주운 게 아니라 줍는 척했을 뿐인 모양이다. 나는 그의 연기에 놀라야 할지, 아무도 모르게 품에서 머리핀을 꺼낸 걸 놀라야 할지 몰라 미간을 찡그렸다.

“별거 아닙니다.”

내 표정을 본 엘리엇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머리핀을 주워서 내 머리카락에 꽂아 준 게 별게 아니라는 말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이 머리핀이 별게 아니라는 것처럼 들린다. 아까 잠깐 봤을 때 반짝였는데. 그 보석, 가짜겠지?

“번즈 백작과 가깝게 지내나 보군요?”

엘리엇이 떠나고 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내게 다가와서 물었다.

가깝게 지내냐고? 나는 곧바로 사람들이 무엇을 묻는지 알아차렸다. 엘리엇은 한동안 내 구혼자처럼 우리 집에 드나들었지만, 최근에는 전혀 방문하지 않고 있다. 그건 핸더슨 후작가와 거마로트 공작에 얽힌 소문들 때문이고.

그러니 사람들은 나와 엘리엇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궁금한 거겠지. 엘리엇이 내게 흥미를 잃은 건지, 아니면 우리가 싸운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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