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36 – 1
“라넌 경.”
왕궁을 나서던 클레어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멈춰 섰다. 여자 목소리였는데.
주변을 두리번거린 끝에 그녀는 왕궁 밖, 담장 밑에 서 있는 하몬 양을 발견하고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베라 하몬이 여기는 무슨 일인 걸까.
마지막으로 만난 게 레이디 비스컨의 티 파티에서였다. 그때 하몬 양이 클레어에게 빈정거린 탓에 분위기가 이상하게 끝이 났지.
애꿎은 레이디 비스컨만 클레어에게 사과했다.
그날,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클레어는 피식 웃었다. 훨씬 더 미안해하는 표정이긴 했지만 사과하는 말투는 그녀의 기억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과.
레이디 비스컨을 떠올리자 클레어의 마음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늘 긴장하고 날 서 있던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과 달리 지금의 레이디 비스컨은 평화로워 보인다.
그리고 그 짜증 나는 비스컨 남작도.
“라넌 경.”
클레어가 말없이 다가오자 베라는 침을 꿀꺽 삼키며 클레어를 불렀다. 죽어도 하기 싫은 일을 하러 왔다. 그녀는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클레어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제 무례한 행동을 사과하러 왔어요.”
응? 클레어의 눈이 동그래졌다. 사과하러 왔다고? 심지어 자신의 행동이 무례했다고 정확하게 짚기까지 했다.
“그날, 레이디 비스컨의 티 파티에서 라넌 경에게 했던 말과 행동은 제 잘못이에요. 제가 무례했고 해서는 안 될 말과 행동을 했어요.”
어어.
클레어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하고 잠시 생각했다. 이렇게 정식으로 사과를 받는 건 처음이다. 기사단에서 수많은 기사가 그녀에게 무례하게 굴었지만, 사과를 받은 적은 손에 꼽는다.
기껏 해 봐야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네가 기분이 상했다니 유감이라는 정도가 최고의 사과가 아니었던가.
“정말 죄송합니다.”
베라는 열심히 연습해 온 말을 끝까지 또박또박 내뱉었다. 얼굴이 붉어졌는지 화끈화끈한 게 느껴졌다. 하지만 자기 일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그녀는 잘못을 했으니 사과하는 게 당연하다.
“으음.”
클레어는 베라의 사과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제일 처음 궁금했던 건 누가 시켰냐는 거였다.
하지만 그걸 물어보는 건 무례한 짓이겠지.
“알았어요.”
잠시 고민하던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다. 그만 가 봐도 된다는 태도에 베라가 고개를 들었다. 괜찮다거나, 왜 그런 말을 했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없었다.
혹은 왜 사과를 했는지도.
어쩌면 이게 지금 그녀의 위치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해도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레이디 비스컨이 무슨 말을 하면 다들 귀를 기울였는데.
“하나만 여쭤봐도 되나요?”
몸을 돌리던 베라는 마음을 바꿔 클레어에게 물었다. 그녀를 보내고 집으로 가려던 클레어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왜 결혼하지 않냐는 질문일까.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이자 베라가 물었다.
“왜 레이디 비스컨의 말을 존중해요?”
이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질문인지 모르겠네. 클레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자 베라가 재빨리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음, 그러니까, 다들 레이디 비스컨의 말에 귀를 기울이잖아요?”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다들 관심을 가지고 듣는다. 듣기로는 왕대비 전하조차도 왜 레이디 비스컨은 자주 입궁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셨을 정도라고 한다.
물론 그건 유제니가 부르지 않으면 안 오니까 하는 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베라와 하몬 부인에게는 대단하게 느껴졌다.
베라와 하몬 부인이 입궁하지 않는다고 어느 누가 관심을 가질까.
지금까지 베라는 사람들의 레이디 비스컨을 향한 그런 관심들이 그녀가 백작가의 딸이라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번에 만나서 대화를 나눈 뒤로는 생각이 조금 달라지고 있었다.
“이쪽으로.”
클레어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베라를 한쪽 구석으로 안내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이 왜 레이디 비스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지는 모르겠어요.”
클레어는 솔직하게 말했다. 알 것도 같다. 하지만 확실하게 아는 건 아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레이디 비스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는 간단해요. 그분을 믿을 수 있거든요.”
믿을 수 있다는 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베라는 가만히 클레어를 올려다보다가 물었다.
“무엇을 믿어요?”
레이디 비스컨이 라넌 경을 지켜 준다고 믿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누가 봐도 라넌 경이 레이디 비스컨을 지켜 줘야 할 것처럼 보이니까.
조용하고 창백한 데다 체구가 작은 편인 레이디 비스컨과 키가 크고 기사인 라넌 경. 믿는다면 반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클레어가 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당신과 다르다는 말이에요.”
약간 날카로운 말이 클레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사과했다고 해서 하몬 양을 믿을 수는 없다. 갑자기 레이디 비스컨에 대한 질문은 왜 하는 걸까.
클레어의 불신하는 눈빛과 맞닥트린 베라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그녀가 레이디 비스컨의 티 파티에서 소란을 피운 뒤, 사람들은 다들 이런 식으로 그녀를 대하기 시작했다.
뭘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거나 그녀를 멀리하는 티가 났다. 물론 아닌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똑같았다. 베라가 주는 것들.
한 번 입고 안 입겠다며 주는 옷. 리본, 장갑 같은 것들.
“레이디 비스컨이 그랬거든요. 제 어머니도 실패자가 될 뻔했다고요.”
베라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작게 말했다. 몰랐다. 어머니가 결혼을 못 할 뻔했다는 걸. 레이디 비스컨의 말을 듣고 찾아봤더니 사실이었다. 진짜로 베라의 아버지에게는 혼인 허가서를 받고 결혼식까지 올린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신혼여행지에서 감기에 걸려 죽었고 그 뒤에 아버지와 결혼한 사람이 지금의 하몬 부인이었다.
그 사실을 알자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드레스와 리본을 받아 가던 사람들이 은근슬쩍 던지던, 결혼은 언제 할 거냐는 질문들이 사실은 조롱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레이디 비스컨이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때, 클레어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든 베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진짜예요!”
이런 것도 안 믿어 주는구나. 억울해하는 그녀의 앞에서 클레어가 다시 말했다.
“아니요. 그분은 누군가를 실패자라고 부를 리가 없습니다.”
“그건….”
맞다. 레이디 비스컨이 하몬 부인을 실패자라고 말한 적은 없다. 그저, 하몬 부인도 늦게 결혼했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하몬 부인과 베라와 달리 그걸 입 밖에 내지 않는다고 지적했고.
그제야 베라는 클레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일그러졌던 얼굴이 풀어지자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는 레이디 비스컨을 믿습니다. 그녀가 당신과 나를 공평하게 대할 것이라는 걸요.”
상대의 위치에 따라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레이디 비스컨은 상대가 왕대비 전하라 해도, 그녀의 집에서 일하는 하녀라 해도 똑같이 대했다.
그건 쉬워 보이지만, 어려운 일이다.
클레어는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다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아니죠.”
하몬 양은 상황에 따라, 그리고 자신의 기분에 따라 타인을 전혀 다르게 대할 것이다. 그녀가 레이디 비스컨의 티 파티에서 라넌 경을 공격했던 것처럼.
자신의 잘못을 지적받자 베라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화를 내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그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나도 공평하게 대해요.”
클레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베라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이건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에게 배운 거다. 그녀는 때때로 잘못을 한 사람을 말없이 응시하곤 했다. 그리고 대부분 상대방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물론 인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반대로 벌컥 화를 내다가 끌려나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다행히 베라는 인정하는 쪽이었다. 그녀는 클레어가 비난은커녕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자 다시 얼굴을 붉혔다.
“가끔 안 그랬을 뿐이에요.”
아주 가끔이다. 꼴 보기 싫은 사람을 만나거나, 그날 기분이 안 좋았을 때. 가끔은 그녀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그렇게 굴기도 했었다.
“쉬운 일이 아니긴 하죠.”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도 이상한 사람을 만나면 태도를 바꾸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없다. 그리고 어쨌든 일반 상식으로 클레어는 이상한 사람이고.
미쳤냐는 말도 들어 봤다. 물론 아주 완곡한 표현이었지만.
“내가 결혼하지 않고 기사로 살겠다고 했을 때 태도가 바뀌지 않은 건 레이디 비스컨뿐이었어요.”
클레어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속으로 어떻게 생각했건, 유제니는 클레어의 앞에서 태도가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클레어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고.
어떤 식으로든 유명해지면 유명인과 말을 나눈 사람들은 자신이 유명인과 대화했다는 걸 자랑하고 싶어 한다. 클레어는 흰 사자 기사단이고 사교적으로 교류하는 집안이 있는 귀족 가문의 사람이다.
심지어 그녀의 동생들조차도 클레어가 기사단에 들어가자 태도가 바뀌었다. 처음에는 신기하고 자랑스러워하던 동생들이 사람들의 관심과 비난에 클레어를 부끄러워하고 미워했다.
하지만 레이디 비스컨은 아니었다. 그녀는 클레어가 생각하고 기대하고 기도했던 그대로 행동했다. 클레어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녀를 신기해하거나 자랑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평범하게 다른 사람들처럼 대해 주었다.
“쉬운 일이 아니니 레이디 비스컨은 대단한 사람이네요.”
베라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들 왜 그렇게 레이디 비스컨과 어울리려 하는지 알겠다. 라넌 경이나 그런트 양뿐만이 아니다.
에스마 양이나 로고소 양도 레이디 비스컨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번즈 백작도.
베라와 하몬 부인이 레이디 비스컨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건, 번즈 백작 때문이다. 사교계의 돌풍. 갑자기 나타난 신흥 귀족 번즈 백작은 잘생긴 외모와 엄청난 부를 가진 사람이 늘 그렇듯 거만했다.
단 한 번도 사람들을 자기 집에 초대한 적이 없고 다른 사람의 초대도 매우 선별해서 받아들이곤 했다. 베라의 아버지와 사업을 하고 있음에도 단 한 번도 초대에 응한 적이 없을 정도니까.
그런 사람이 비스컨 가에는 거의 매일 방문한다는 게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가 레이디 비스컨을 대하는 태도 역시 그러했고.
“대단한 분이죠.”
클레어는 베라의 입에서 유제니에 대한 순수한 감탄이 나오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걸 보자 베라의 기분이 이상해졌다.
레이디 비스컨이 조금 얄미웠다. 하지만 그것보다 그녀가 부러워졌다.
그리고 그 두 가지 감정보다 더 큰 건, 레이디 비스컨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