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화 (158/239)

163화. 35 – 5

“전하!”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쓰러졌다. 그녀가 화살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본 순간, 클레어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유제니의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조차도.

그리고 그대로 얼어 버렸던 클레어의 눈앞에서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언제 화살에 맞았냐는 듯 그녀의 주변에 떨어진 화살을 하나 집어 들더니 번쩍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이따위 화살은 내게 흠집도 낼 수 없다!”

잠시 얼어붙었던 성벽 아래에서 기운을 얻은 아군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멀쩡하다. 그녀의 말대로 화살 따위로는 그녀를 해칠 수 없다.

마녀 비스컨.

아군과 적군 모두에게 유제니의 별명이 각인되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세했던 적군의 기가 꺾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핸더슨 후작가입니다!”

적군의 뒤에서 핸더슨 가문의 문양이 수놓인 깃발을 든 병사들이 나타났다. 핸더슨 후작 부인이 약속한 지원군을 보낸 것이다.

수도는 지켜 냈다. 마녀 비스컨이 멀쩡한 것을 본 적군은 겁을 집어먹었고 아군은 용기를 얻었다. 지원군까지 합세하자 훨씬 적은 수였음에도 적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도망치는 놈들은 그냥 둬.”

도망치는 적군을 굳이 쫓아갈 필요는 없다. 이쪽의 수가 훨씬 부족하니까.

게다가 방금 전 저들은 마녀 비스컨의 힘을 목격했다. 본부로 돌아가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야기하겠지.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는 겁을 집어먹은 만큼 부풀려질 것이다.

엘리엇은 부하들에게 그렇게 지시하고 성 안을 돌아보았다. 괜찮을까. 그는 똑똑히 봤다. 화살 하나가 유제니의 몸에 박히는 것을.

“뼈는 괜찮습니다.”

번즈 백작이 성 밖을 정리하는 사이 성 안 침실로 이동한 유제니는 의사의 치료를 받고 있었다.

엘리엇이 똑바로 봤다. 화살은 유제니의 다리에 박혀 있었다.

클레어는 유제니가 덜덜 떠는 손으로 손수건을 꺼내 입에 무는 것을, 그리고 의사가 화살을 제거하는 것을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신음 하나 없군. 늙은 의사는 능숙하게 화살을 제거하고 상처에 붕대를 감으며 생각했다. 진짜 마녀인지는 모르지만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독한 건 확실하다.

“하지만 한동안 움직이지 않으셔야 합니다.”

유제니에게 그렇게 충고한 의사는 클레어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이 상태로는 일어나기도 힘들 테지만요.”

그렇겠지. 화살은 유제니의 다리를 관통했다. 의사는 화살을 두 개로 분리해서 빼내야 했다. 어찌나 끔찍했던지 멍하니 지켜보던 클레어조차도 눈을 질끈 감았을 정도다.

하지만 유제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통을 참아 내느라 지친 모양이라고, 클레어는 생각했다. 힘들었을 거다. 화살에 관통한 채 침실로 돌아와야 했으니까.

“사람들에게 알리겠습니다.”

의사가 떠나자 클레어는 유제니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조금 지쳤다고 둘러댔다. 하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다쳤으니 이제는 알려야 한다.

“아니.”

그때, 지친 듯한 목소리가 유제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녀는 곧 일어나 앉으려는 것처럼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전하.”

놀란 클레어가 그녀를 부축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간신히 클레어의 부축을 받은 유제니는 침대에 앉더니 다리를 침대 밖으로 빼기 시작했다.

“전하, 움직이지 마세요.”

이러다 정말 큰일 난다. 이런 몸으로 어떻게 화살에 맞자마자 벌떡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의사는 순간적으로 움직인 모양이라고 말했지만, 클레어는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정말로 마녀거나.

그럴 리 없다. 클레어는 하얗게 질려 땀을 폭포수처럼 흘리는 유제니의 얼굴을 보며 자기 생각을 부인했다. 마녀라면 저렇게 안간힘을 써서 일어나려 할 리가 없다.

“밖에, 사람들이 있을 거야.”

힘겹게 숨을 헐떡이며 유제니가 말했다. 가느다란 그녀의 팔에 힘줄이 솟아나 있었다. 클레어는 저도 모르게 창문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유제니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때, 누군가가 침실 문을 두드렸다.

“전하. 엘리엇 번즈입니다.”

번즈 장군이 왔다. 클레어는 평소 그를 싫어했다는 것도 잊고 재빨리 문을 열었다. 뒤늦게 유제니의 허락이 없었다는 게 생각났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전하를 말려 줘요.”

클레어의 부탁에 엘리엇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여기서 더 말릴 게 있어? 그의 고귀한 레이디는 위험하게 적군의 화살에 맨몸으로 나섰다. 그리고 화살에 맞았지.

대답도 없이 유제니에게 다가간 엘리엇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새하얗게 질린 채 땀을 뻘뻘 흘리며 유제니가 침대에서 나오려 하고 있었다.

“뭡니까.”

화가 난 나머지 무뚝뚝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뒤늦게 그녀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후회했다.

“밖에 사람들이 있어.”

유제니는 늘 그렇듯 엘리엇의 감정을 무시하고 말했다. 엘리엇이 그녀에게 어떤 감정을 품는지는 그녀와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엘리엇의 고개도 클레어와 마찬가지로 창문으로 향했다. 그제야 두 사람의 귀에 밖에서 사람들이 외치는 구호가 들려왔다.

“비스컨! 비스컨! 비스컨!”

다들 유제니를 부르고 있다. 이번 전투에서 이기고 수도를 지켜 낸 유제니 비스컨을.

보통 때라면 유제니는 테라스로 나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내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몸 상태로 그럴 수 없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해산하라고 하겠습니다.”

엘리엇이 그렇게 말하며 테라스로 통하는 문으로 다가가려 했을 때였다.

“아니.”

유제니가 말했다. 이제 그녀는 거의 일어나 있었다. 그제야 유제니의 상태를 깨달은 클레어가 깜짝 놀라 그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전하! 누우셔야 합니다!”

“내가 건재하다는 걸 보여야 해.”

“그럼 제가 부축하죠.”

엘리엇의 제안에 유제니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평소와 똑같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아니, 아니다. 엘리엇은 다음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깨달았다. 슬픔, 두려움. 그리고 갈망.

유제니 역시 그걸 원하고 있었다. 엘리엇의 부축을. 아니, 부축이 아니라.

뭔가 다른 거였다. 하지만 엘리엇이 유제니의 감정을 더 살펴보기 전에 감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유제니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괜찮아.”

“전하.”

말도 안 된다. 부축받지도 않고 움직이다니. 저기까지 걸어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심지어 테라스에 서서 손을 흔들어야 한다.

클레어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

“당신은 마녀가 아니에요.”

평범한 인간이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은 다치면 피를 흘리고 고통을 느낀다. 화살을 막을 수 있는 그런 마녀가 아니다.

천천히 유제니의 시선이 클레어에게 향했다. 그녀는 지친 표정으로 클레어를 쳐다보더니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매일 밤, 내가 무엇을 기도하는지 아나?”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엘리엇과 클레어의 시선이 부딪쳤을 때 유제니가 말을 이었다.

“나를 마녀로 만들어 달라고 기도하네.”

그녀가 마녀였다면 더 나았을 것이다. 고통도, 슬픔도, 두려움도 느끼지 못하는 강력한 마녀. 눈앞에서 아는 사람이 자신을 지키다 다치거나 죽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사악한 마녀.

하지만 유제니는 마녀가 아니다. 그녀는 아무 힘이 없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그게 유제니는 괴로웠다. 그녀가 아무 힘이 없는 평범한 인간이라는 게.

“자네 말이 맞아. 나는 마녀가 아니야.”

유제니의 시선이 붕대를 감은 자신의 허벅지로 향했다. 그녀가 마녀였다면 다치지 않았을 것이다. 쏟아지는 화살을 번즈 백작이 준 반지가 없어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수도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병사들 앞에서 쓰러지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나 굳건하게 서서 발시안이 무사할 것이라고, 사람들을 안심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이웃 나라에서 감히 발시안을 침략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나라에는 마녀가 필요하지.”

신은 발시안을 버렸다. 드래곤은 발시안을 증오한다.

발시안을 지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인간만이 남았다.

하지만 인간은 나약하고 너무나 상처 입기 쉬운 존재라 발시안을 지킬 수가 없었다.

유제니는 고개를 들어 클레어를 쳐다봤다. 그녀가 자신을 걱정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 걱정에 감동할 여력이 유제니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발시안에 쏟아야 하니까.

“나는 마녀가 돼야 해.”

클레어의 앞에서 유제니가 일어났다. 그 순간, 엘리엇이 그녀에게 팔을 뻗었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괜찮네, 번즈 백작.”

“하지만….”

걸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엘리엇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 유제니가 발을 떼려다가 비틀거렸다.

“전하!”

“전하.”

깜짝 놀란 클레어와 엘리엇이 달려들었지만, 유제니는 다시 손을 들어 막았다. 그리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일어났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은 사람들 앞에 나설 때 누군가의 부축을 받은 적이 없다. 병약한 편이긴 했지만 걷는 데는 문제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하필 오늘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 나온다? 기껏 한 연극이 소용이 없어진다.

“번즈 백작.”

유제니는 테라스로 향하는 문을 향해 눈짓하며 엘리엇을 불렀다. 문을 열어 달라는 신호에 엘리엇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스컨! 비스컨!”

테라스로 향하는 문을 열자 사람들의 함성이 더 뚜렷하게 들려왔다. 유제니는 엘리엇에게 고맙다고 눈짓하고 천천히 테라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의 함성이 더욱 거세졌다.

“전하.”

방금 상처를 치료했는데 움직이다니. 걱정스러운 마음에 클레어는 유제니를 따라 테라스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때 엘리엇이 그녀를 향해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자네는 여기 있게.”

“하, 하지만….”

“그 얼굴로는 나오지 않는 게 좋겠어.”

그제야 클레어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맙소사. 그녀는 품을 뒤져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문질렀다. 하지만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마녀가 돼야 해.

분명 아주 조용하게 한 말이었는데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의 말이 그녀의 귀를 아프게 때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고개를 숙인 클레어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붉은 자국이 들어왔다.

그 자국은 침대에서 테라스 문을 향해 점점이 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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