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2화 (157/239)

162화. 35 – 4

“어떻습니까? 생각을 좀 해 봤습니까?”

그리어 존스는 다음 날 다시 찾아왔다. 생각 좀 해 봤냐는 말에 나는 그가 참 뻔뻔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하인을 시켜 차를 내오라고 한 뒤 물었다.

“당신에게 연락한 이름을 말할 수 없지만, 영향력 있는 사람이 내가 커피 하우스에 드나든다는 거짓말을 하게 시켰다는 말이죠?”

“엄밀히 말하면 거짓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커피 하우스에 한 번 들어간 적이 있으니 거짓말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무표정으로 그를 바라봤고 그리어는 씩 웃으며 말했다.

“저는 레이디 비스컨께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이 고난에서 벗어날 기회죠. 당신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건데 감사의 표시는 하셔야죠.”

이상하네. 엘리엇이 당신이라고 할 때는 참 듣기 좋았는데 이 남자가 나를 당신이라고 부르자 기분이 매우 나빴다. 나는 차를 가져온 하인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그리어에게 차를 권했다.

“당신에게 거짓말을 시킨 그 나쁜 사람이 누군지는 말 안 해 줄 거죠?”

“말씀드렸잖습니까. 레이디 비스컨보다 더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요.”

뭐, 그 말도 하긴 했지. 나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지나가듯 물었다.

“그렇다면 내게 돈을 받아도 그 영향력 있는 사람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을 텐데요?”

그저 그런 공격이었나 보다. 그리어가 잠시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물론 아주 괜찮은 공격이었다면 그가 평정심을 잃었겠지.

아쉽게도 그저 그런 공격이었던 탓에 그리어는 금세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죠. 당신의 돈을 받으면 수도를 떠날 생각이니까요.”

그러니 영향력 있는 사람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헛소리.

나는 차를 홀짝이며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그리어가 내게 요구한 돈은 상당한 금액이긴 하다. 하지만 절대로 그가 말하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제시한 돈보다 많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그리어라면, 물론 그리어가 아니지만. 내게 돈을 받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 시킨 대로 해서 돈을 이중으로 받을 거다. 그리고 수도를 떠나도 되거든.

뭐, 그 영향력 있는 사람이 정말 영향력이 있다면 나와 우리 가문에게서 그리어를 지켜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유제니!”

그때, 올리버가 응접실을 박차고 들어왔다. 나는 차를 마시던 자세 그대로 올리버를 쳐다봤고 그리어는 흠칫 놀라 자리에서 일어날 뻔했다.

“이상한 소문이 났던데? 네가 커피 하우스에 드나든다고?”

어, 오.

그걸 올리버가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올리버를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멍청한 그리어가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제가 그 일로 레이디 비스컨을 도와드리려고 왔죠.”

넌 또 뭐야? 올리버는 눈빛만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어는 눈빛에 움츠러들었지만, 멍청 아니, 용감하게 말을 이었다.

“잠깐.”

“레이디 비스컨이 커피 하우스에 드나든다는 걸 증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거든요.”

난 말리려고 했다. 진짜로. 정말 말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리어 존스가 그렇게 수다쟁이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리고 올리버의 주먹이 말보다 빠른 것도.

퍽!

“악!”

그리어 존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올리버가 그에게 덤벼들었다. 고소하다는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다. 안 들었다면 올리버가 덤비기 전에 그리어에게 경고를 해 줬겠지.

나는 올리버가 그리어의 몸 위에 올라타자 재빨리 두 사람에게 다가가 올리버를 말렸다.

“올리버, 그만해.”

그사이에 이미 올리버는 그리어의 얼굴에 주먹을 한 번 더 날린 뒤였다.

“올리버 비스컨!”

그리어를 한 대 더 때리기 위해 주먹을 들어 올린 올리버가 내 부름에 멈칫하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리어를 한 번 내려다보더니 그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꽉 잡으며 투덜거렸다.

“어머니처럼 부르지 좀 마.”

“내가 처리할 수 있어.”

엘리엇에게도 똑같이 말했다. 문제는 엘리엇과 달리 올리버는 내 의견을 무시한다는 거고.

올리버는 나를 보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그리어에게 이를 갈며 말했다.

“감히 내 동생을 협박하고….”

“올리버.”

이래서 올리버에게 말을 안 했던 거다. 나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 올리버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내가 처리할 수 있다니까?”

게다가 올리버의 방법은 아주 좋지 않다. 맞은 그리어가 호락호락하게 나올 리가 없으니까.

“두 배! 돈을 두 배로 내지 않으면 당신이 커피 하우스에 드나든다고 내가 나서서 소문을 내 주지!”

거봐.

나는 한숨을 내쉬며 올리버를 흘겨봤고 올리버는 다시 그리어에게 주먹을 들어 올렸다. 아니, 그거 소용없다니까?

“두 배야!”

올리버의 주먹이 무서웠던지 그리어는 머리를 감싸 안으며 소리쳤다. 나는 올리버가 그리어를 때리지 못하도록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그리어 존스, 오라버니가 당신을 때린 건 사과하지.”

“유제니!”

귀 아프다. 나는 내 바로 뒤에서 버럭 소리 지르는 올리버를 다시 흘겨보았다. 그러자 그리어가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사과하면 다인 줄 알아? 세 배야! 세 배 더 내놓지 않으면….”

“가서 말해.”

나는 냉정하게 말했다. 돈을 주지 않으면 헛소문을 퍼트리겠다고? 상관없다.

그리어는 내 말에 멈칫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소리쳤다.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아? 다시는 사교계에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해 주지!”

“이 자식이!”

다시 올리버가 덤벼들었지만, 이번에는 내가 더 빨랐다. 나는 재빨리 올리버의 팔을 잡아 그를 말렸다. 그리고 피식피식 웃으며 그리어에게 물었다.

“네가 감히?”

명백한 경멸에 그리어의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소문내. 내가 커피 하우스를 드나든다고. 네가 날 커피 하우스에 드나들게 해 줬다고. 어떻게 될 것 같아?”

그리어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어떻게 될 것 같냐고?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내게 물어볼 거야. 커피 하우스에서 뭘 봤는지. 자기 남편이, 부인이 정부와 밀회를 즐기던지 묻겠지.”

그뿐만이 아니다. 그리어의 얼굴이 굳기 시작했다. 나는 피식피식 웃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오, 그래. 몇 주 전에 있었던 사기 사건. 그 범인들도 커피 하우스에서 봤다고 말할 거야. 누가 그들을 들여보내 줬을까?”

그리어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 얼굴을 보자 나는 몇 주 전에 어떤 사기 사건이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그건 그냥 던져 본 거였거든.

“그, 그걸 사람들이 믿을 거 같아?”

“왜 안 믿겠어? 커피 하우스 지배인이 내가 커피 하우스에 드나들었다고 증언했는데.”

또 뭐가 있을까. 잠시 머릿속을 뒤진 끝에 나는 한 가지 더 재미있는 기억을 찾아냈다.

“아, 맞다. 저먼 경도 거기서 너와 이야기하는 걸 봤다고 말할 거야.”

안타깝게도 그리어 존스는 저먼 경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의 기억을 되살려 주기 위해 덧붙였다.

“너와 이야기하고 전하께 이 나라가 멸망할 거라는 헛소리를 떠들어 댔다고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아니.”

사람들이 문제가 아니다. 그때 국왕 전하께서 어땠더라? 저먼 경은 물론 저먼 자작가에도 화를 냈다고 들었다. 아들이 그런 헛소리를 했다는 사실에 저먼 자작은 쩔쩔맸다고.

여기 그리어 존스가 저먼 경이 그런 헛소리를 하는 데 어떤 연관이라도 있다는 소문이 나면 저먼 자작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겠지.

나는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국왕 전하와 저먼 자작가에서 어떻게 나올까? 궁금하지 않아?”

그리어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나는 핏기가 가신 그를 보며 그의 뒤에 있을 영향력 있다는 사람이 누구일지 생각했다.

저먼 자작보다는 더 영향력이 있겠지. 하지만 국왕 전하의 미움을 받았다고 생각한 저먼 자작이 그리어를 가만둘까? 사람들이 그리어 존스의 거짓말을 믿는다면 내 거짓말을 안 믿을 거라는 보장 또한 없다.

“혀, 협박이잖습니까.”

그리어 존스의 말투가 변했다. 나는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어머, 그래? 난 기회를 주는 건데? 네가 고난에서 벗어날 기회지.”

“감사의 표시를 하는 게 어때?”

그때까지 내 뒤에서 가만히 있던 올리버가 나섰다. 고맙기도 하지. 나는 오라버니를 돌아보고 씩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리어에게 말했다.

“그만 가 봐. 가서 마음대로 해.”

그리어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머뭇거리며 응접실에서 나갔다. 아마 빅스가 그를 밖으로 안내하겠지.

맙소사.

그리어가 밖으로 나가자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다른 사람을 협박하기는 처음이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괜찮아?”

올리버가 내 옆에 앉으며 물었다. 오라버니가 와서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네. 나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행이라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올리버가 저자를 몇 대 때려 줘서 속이 좀 시원했다. 물론 누군가를 때려서 속이 시원해지는 거에 익숙해지면 안 되겠지만.

“응, 괜찮아.”

나는 올리버에게 내 잔을 건네 달라고 부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식긴 했지만 차를 마시자 손이 떨리던 게 조금 가라앉았다. 올리버가 재빨리 아무도 손대지 않은 비스킷을 내게 내밀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왔어?”

이 시간이라면 클럽에 있을 때인데. 내가 시계를 확인하며 묻자 두 번째 비스킷을 입에 넣던 올리버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상한 소문이 돈다는데 어떻게 안 와 봐?”

그래, 그 소문. 올리버가 그 소문을 몰랐다는 것보다 어떻게 지금 그 소문을 들었는지가 더 궁금하다. 원래 소문은 당사자와 그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늦게 들어가기 마련이니까.

“소문은 어떻게 들었는데?”

세 번째 비스킷을 입에 넣던 올리버의 눈동자가 한 바퀴 굴렀다. 아니, 네 번째인가? 그는 곧 손에 묻은 비스킷 가루를 털며 대답했다.

“테드한테.”

그렇군. 아주 잠깐 엘리엇이 자기 대신 올리버를 보낸 게 아닐까 하고 의심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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