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35 – 3
“그 작자가 무엇을 요구하던가요?”
그리어 존스가 방문한 다음 날, 나는 엘리엇을 찾아가 그에게 들은 이야기를 모두 토해 놓았다. 그는 산처럼 쌓인 케이크를 사이에 두고 내 맞은편에 앉아 아주 심각한 얼굴로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를 멀리하는 걸 반쯤 포기한 모양인데. 무슨 소리냐면 아직도 그는 우리 집에 방문하지 않고 있지만 내가 그의 집에 방문하는 걸 막지는 않고 있다는 말이다.
심지어 기다렸다는 듯 하인들이 디저트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나는 테이블 가득 놓인 케이크에 잠시 시선을 빼앗겨 입을 다물었다.
복숭아 파이, 생크림과 잼을 듬뿍 바르고 위에 과일을 장식한 파운드 케이크, 바삭한 머랭 사이에 크림과 과일을 듬뿍 발라 층층이 쌓은 머랭 케이크. 진한 초콜릿 시트 사이에 초코 크림을 바른 초코케이크까지.
중간중간에는 손가락 크기의 갖가지 쿠키들까지 잔뜩 놓여 있었다. 잼이 발린 것, 초코칩이 박힌 것, 크림과 과일을 올린 것 등등등.
“자, 드십시오.”
내 시선이 케이크 쪽에 오래 머물자 내가 먹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는지 엘리엇이 케이크를 한 조각 잘라서 내게 내밀었다. 아니, 먹고 싶어서 쳐다본 게 아닌데.
물론 먹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보다 이 많은 케이크가 준비돼 있었던 이유가 궁금하다.
나는 예의 바르게 그가 내민 접시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미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누가 오기로 했어요?”
그러자 엘리엇의 얼굴에 이상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나는 테이블 위를 시선으로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손님을 대접하려고 만들어 둔 건가 해서요.”
이 정도면 티 파티가 열리는 수준인데. 진짜로 티 파티가 열리나?
문득 겁이 났다. 티 파티를 열었는데 혹시 날 초대 안 한 건가? 그런데 내가 눈치도 없이 방문한 거고?
“맞습니다.”
엘리엇은 빙그레 웃더니 다시 접시에 쿠키를 하나씩 얹기 시작했다. 그리고 접시를 내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당신을 대접하려고요.”
다음 순간, 나는 농담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나 하나 때문에 이 많은 디저트를 만들게 했다고? 케이크에 가려져 있지만 아래쪽에 타르트와 쿠키, 머핀과 스콘도 가득 있다. 아, 비스킷을 빼먹었군.
하지만 엘리엇은 진심이라는 표정이었다. 어, 거짓말이 아니네.
진심이야?
나는 다시 한 번 테이블 위를 쳐다보고 엘리엇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많은 걸 저 하나 때문에 준비했다고요?”
“때문이 아니죠.”
엘리엇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맛있게 먹는 걸 보고 싶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이 많은 걸 내가 어떻게 다 먹어요?”
“남는 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엘리엇은 그렇게 말하며 빙그레 웃었다. 그렇긴 하다. 보통 부유한 집은 음식을 많이 한다. 그리고 남는 건 집에서 일하는 하인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준다.
엘리엇에게는 많은 부하가 있고 나눠 줄 사람은 많겠지.
나는 한숨을 내쉬고 엘리엇이 잘라 준 케이크를 한 입 맛봤다.
젠장, 맛있네.
엘리엇의 요리사는 케이크도 끝내주게 잘 만드는 모양이다. 내가 찻잔을 들어 올리자 엘리엇이 주제를 원래대로 돌렸다.
“그리어 존스라는 녀석이 당신을 협박했다면서요.”
아, 그래. 그 이야기를 하러 왔지.
나를 찾아온 그리어 존스는 이상한 소리를 했다. 내가 커피 하우스에 드나든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누군가가 자신에게 내가 커피 하우스에 드나든다는 증언을 해 달라고 했대요.”
그리고 그 누군가는 이름은 밝힐 수 없지만,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해 드릴까요?”
이어진 엘리엇의 질문에 나는 그를 흉내 내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려 했다. 하지만 그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거 생각보다 어렵네.
“당신에게 뭘 해 달라고 온 게 아닌데요.”
대신 나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나는 그냥 이런 일도 있다고 엘리엇과 대화를 하러 온 것뿐이다. 줄리아나 리사에게 하는 것처럼.
엘리엇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가 한 말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내뱉었다.
“하지만 제가 처리해 드릴 수 있습니다.”
엘리엇에게 내 일을 대신 처리해 달라고 부탁할 생각은 없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화를 내야 할지, 속상해해야 할지 모르겠네. 나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나는 내 일을 알아서 처리할 수 있어요. 당신에게 부탁할 생각도 없고요.”
엘리엇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자세를 고치며 말했다.
“당신의 능력을 무시하거나 의심하는 게 아닙니다. 귀찮은 일을 대신 해 주고 싶은 것뿐이죠.”
날 무시하는 게 아니라는 말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리고 귀찮은 일을 대신 해 주고 싶다는 말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올리버도 같은 말을 했을 거다. 그리어 존스라는 어떤 이상한 남자가 찾아와서 내 명예에 먹칠을 하려고 했다고 내가 그에게 이야기한다면, 그는 그리어 존스를 찾아 죽여 버리겠다고 펄펄 뛰겠지.
그게 올리버와 어머니에게 그리어 존스가 찾아온 것을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기도 하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침착하게 말했다.
“그리어 존스 정도는 내가 처리할 수 있어요.”
이제 엘리엇의 얼굴에는 ‘당연히 그러시겠죠’라는 표정과 미소가 떠올랐다. 올리버라면 날 비웃는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엘리엇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당신을 찾아온 이유는 그리어 존스에게 그런 증언을 시킬 영향력 있는 사람이 누구일지 같이 생각해 보고 싶어서예요.”
과연 누구일까.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고 했으니 적어도 귀족. 어쩌면 아주 부유한 사람일 거다. 엘리엇 역시 내 지적에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고작해야 커피 하우스의 지배인 아닙니까.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을 리가 없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어 존스가 한 가지 사실을 일깨워 주기 전까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믿을 수도 있어요. 내가 커피 하우스에 간 걸 본 사람들이 있거든요.”
“갔다고요?”
오, 저 표정은 확실히 못 믿겠다는 표정이다. 그러니까 방금 전 당연히 그러시겠죠 라는 표정은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가 모르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전에 커피 하우스에 쳐들어간 적이 있거든요.”
“쳐들어가요?”
“어닝하고 싸울 때요. 그가 커피 하우스에 있다는 걸 알고 쫓아가서….”
“사내답게 굴라고 조언하셨죠.”
음, 그때 나와 어닝의 대화를 조언이라고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게다가 난 사내답게 굴라고 한 적 없다. 감히 나와 내 가족을 속였다고 비난했지.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엘리엇은 그게 사내답게 굴라고 조언한 거라고 말할 것 같다. 나는 말없이 차를 마셨고, 엘리엇은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말했다.
“그렇군요. 당신이 커피 하우스에 간 적이 있죠.”
그리고 그건 사교계에 널리 퍼졌을 거다. 시간이 지나서 다들 잊어버렸을 뿐이지.
“누구일 것 같습니까?”
뒤이어 엘리엇이 그리어 존스가 말한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주제를 바꿨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잘 모르겠어요. 처음엔 하몬 부인이나 하몬 양을 의심했거든요?”
하몬 양이라면 가능성이 있다. 나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그리 유쾌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아닐 것 같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하몬 양이라고 하기엔 너무 빨라요.”
“뭐가요?”
“소문이요. 며칠 됐다고 하더라고요.”
그리어 존스는 하몬 양과 유쾌하지 않은 대화를 한 날 찾아왔다. 소문은 하몬 양과 대화를 하기 전부터 돌고 있었고.
하몬 양이 내게 오래전부터 불만이 있었다면 모를까, 순서가 다르다. 나는 하몬 양을 의심한 이유를 엘리엇에게 간단하게 설명했고 엘리엇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 전부터도 문제가 있었잖습니까? 하몬 부인이 당신의 사업을 따라 한다고 들었는데요.”
그렇긴 하다. 하지만 그거랑 소문이랑 상관이 있을까?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하몬 부인이 내 명예를 더럽혀서 얻을 게 없잖아요.”
“그녀가 수영장뿐 아니라 검술 수업도 따라 하려는 거라면 그럴 수도 있죠.”
검술 수업도 따라 한다고? 나는 다시 콧잔등을 찡그렸다. 정확히 말하면 검술 수업이 아니라, 음, 뭐라고 하지?
위험한 순간에 대처할 수 있는 전반적인 수업이다. 가장 문제는 별로 인기가 없다는 거고.
올리버를 구한 클레어가 수업을 한다는 말에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배우는 게 검이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했다.
귀족 아가씨들이 검을 배우고 싶어 하는 줄은 몰랐는데. 나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했다.
“하몬 부인이 검술 수업을 하려는 거라면 환영이에요.”
“그렇습니까?”
“검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귀족 아가씨들 말입니까?”
의외라는 엘리엇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다. 검술 수업이라는 말에 찾아왔던 귀족 아가씨들은 검을 배우지 않는다는 말에 실망해서 떠나갔다. 어리둥절해하는 엘리엇에게 나는 킬킬대며 말했다.
“다들 어릴 때 한 번쯤은 기사가 되고 싶어 하거든요.”
생각해 보면 나도 그랬다. 망토를 휘날리고 빛나는 검을 든 멋진 기사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지. 엘리엇은 내가 기사가 되고 싶어 했다는 사실에 놀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공주님이 아니고요?”
“공주님은 재미없잖아요.”
대부분의 동화와 모험 소설은 기사가 주인공이다. 다들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가.
나는 차를 홀짝 마시고 말했다.
“난 어릴 때 이름을 랑스로로 바꾸고 싶었어요.”
놀랍게도 엘리엇은 랑스로가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멋진 기사죠.”
랑스로를 한 번에 알아듣는 사람은 오랜만이다. 랑스로. 내가 읽은 책에선 그렇게 번역돼 있었다. 원어로는 랜슬롯에 가깝다지만. 이건 어쩔 수가 없다.
다른 대륙에서 전해져 오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니까.
나는 어떻게 아느냐는 표정을 지었고 엘리엇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당신에게 들었습니다.”
“오.”
꿈에서 나는 정말 엘리엇과 가까웠던 모양이군. 어릴 때 읽은 외국의 동화 이야기까지 했을 정도면.
“당신이 랑스로라면 상황은 더 쉬웠을 테지만 제게는 다행스럽게도 유제니 비스컨이군요.”
엘리엇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전설의 명검으로 용과 싸워 이긴 기사 랑스로. 나는 랑스로가 되고 싶었다. 너무 멋지잖아.
엘리엇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일단 그리어 존스에게 제안을 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겠습니다.”
그거라면 괜찮다. 나도 나름대로 알아볼 거니까. 하지만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당부했다.
“그리어 존스는 내가 처리할 수 있어요.”
그러니 그에게 손대지 말라는 말이다. 엘리엇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불만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자신에게 그리어 존스의 처분을 맡기지 않아서인지,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해서인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