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9화 (154/239)

159화. 35 – 1

“아가씨, 손님이 도착했습니다.”

비스컨 저택에서 티 파티가 열리고 이틀 뒤, 유제니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이른 아침부터 방문 허락을 구했던 사람이다.

“어서 와요, 하몬 양.”

베라가 작은 응접실로 안내받았을 때, 유제니는 이미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행을 따르지 않는 검소한 드레스. 최소한의 장신구만 이용해 정리한 머리카락.

베라는 대체 레이디 비스컨의 어떤 부분을 보고 사람들이 그녀의 눈치를 보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유서 깊긴 하지만 가난한 집안이다. 나이가 꽉 찬 자식 둘 다 아직 결혼은커녕 약혼조차 못 하고 있고.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어머니인 하몬 부인은 볼 가치도 없다고 말했다. 이런 유서 깊은 집안의 노처녀가 되기 직전의 누이를 둔 남자는 골치 아프다고.

하몬 부인이 사윗감으로 눈독 들인 건 번즈 백작이었다. 하지만 베라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는 싸가지 없는 번즈 백작보다 유쾌하고 다정한 비스컨 남작이 훨씬 낫다.

그리고 비스컨 남작과 친해지려면 레이디 비스컨에게 사과를 하는 게 우선이었다.

“밖이 좀 서늘하죠? 낮에는 아직 덥던데 오전에는 이렇게 서늘하네요.”

유제니는 따듯한 차를 권하며 인사말을 건넸다. 보통은 이렇게 이른 오전에는 손님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하몬 양이 왜 방문 요청을 했는지 알기 때문에 허락했다.

마음이 급한 거겠지.

“저, 사과하려고요.”

사과라고? 생각하지 못한 말에 유제니의 손이 멈칫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의 잔에 차를 따랐다.

그리고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왜요?”

“제가 그날 무례했으니까요. 기분이 많이 상하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유제니는 줄리아 또래인 하몬 양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녀는 하몬 양이 중재를 부탁할 줄 알았다.

이틀 전, 티 파티에서 하몬 양은 무례했다. 예의라는 건 대화 상대자에게만 보이는 게 아니다. 그 대화를 보고 들을 수 있는 주변인들에게도 보인다.

그날 유제니의 티 파티는 역대 최고로 많은 인원이 모여 있었고 그 사람들 앞에서 하몬 양은 상당히 무례한 모습을 보였다.

즉, 사교계에 하몬 가의 베라 하몬 양은 상대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무례하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뜻이다.

젊은 사람들이 나이 든 사람들에게 예의를 지키는 것, 신사가 숙녀에게 점잖게 행동하는 건 그냥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이 문명화된 문명인이고 고도화된 귀족 사회에 어울릴 수 있다는 걸 시시각각 증명하는 것에 가깝다.

당연히 베라 하몬처럼 사교계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시선과 평가가 뒤따른다. 베라는 그날, 누구보다 가장 조심했어야 했다.

“제게 무례했나요?”

유제니의 질문에 베라가 멈칫했다. 그랬다. 그 티 파티는 레이디 비스컨의 티 파티였고 레이디 비스컨은 가난한 백작가의 딸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있었다.

이해할 수가 없다.

베라는 왜 유제니가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비스컨 남작처럼 눈에 띄는 미인도 아니고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다. 티 파티에서도 유제니는 사람들을 통솔하는 카리스마를 보여 주지 않았다.

그저 조용하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러니 그녀가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건 레이디 비스컨이기 때문이겠지. 베라의 어머니도 그랬다. 베라보다 더 잘난 것도 없는, 조금 있으면 노처녀가 될 이 여자가 번즈 백작의 구혼을 받는 건 그녀가 비스컨 백작가의 딸이기 때문이라고.

베라도 하몬 양이 아니라 하몬 영애나 레이디 하몬이었다면 지금보다 더 인정받았을 것이다. 그녀의 발언에 사람들이 더 귀를 기울이고 지난번처럼 비웃지 않았겠지.

베라는 얌전하게 대답했다.

“레이디 비스컨의 티 파티였잖아요. 소란을 피워서 죄송해요.”

“음, 그러니까 제 행사에서 소란을 피운 게 미안하다는 거죠? 라넌 경에게 무례하게 군 게 아니고요?”

“두 개가 다른가요?”

베라는 라넌 경이라는 여자에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한 것뿐이다. 그걸로 라넌 경이라는 여자가 상처를 받았다면 미안하지만 그게 사실이다.

문제는 그걸로 레이디 비스컨의 기분이 상했을 때다. 라넌 경은 무시해도 될 사람이지만 레이디 비스컨은 아니니까.

그런 베라의 태도에 유제니의 표정이 변했다.

“라넌 경에게는 미안하지 않지만 내게는 미안하다는 말이군요.”

“그, 그렇진 않아요.”

그녀는 찻잔을 들어 올린 채 물끄러미 베라를 바라봤다. 그리고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라넌 경에게 사과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거라면 들어줄 수 있어요. 하지만 제게만 사과하려는 거라면 사양할게요.”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베라는 유제니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미간을 찡그렸다. 라넌 경에게 사과하는 건 도와주겠지만 사과는 받지 않겠다고? 왜?

그녀는 인상을 쓴 채 물었다.

“라넌 경이 그렇게 중요한 사람인가요?”

저런.

유제니의 얼굴에 안됐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베라는 그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매우 부족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불만을 표하기 전에 유제니가 먼저 말했다.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고는 상관없어요, 하몬 양. 당신은 라넌 경에게 무례했고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면서요. 그렇다면 그녀에게 먼저 사과를 해야죠.”

“하지만, 하지만….”

내가 왜?

베라의 머릿속에 그런 의문이 떠올랐다. 라넌 경은 별것도 아닌 사람이다.

귀족 사회에서 여자가 결혼을 포기했다는 건 어떤 보호도, 성공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베라는 운이 좋다면 비스컨 백작 부인이 되겠지만, 라넌 경은 죽을 때까지 노처녀인 라넌 경일 뿐이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라넌 경에게 사과를 한다면 사람들에게 저를 다시 초대해 달라고 편지를 써 주시겠어요?”

역시. 유제니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몬 양의 얼굴에는 딱히 사과하고 싶다는 감정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굳이 유제니를 찾아와서 사과하는 건 바로 그것 때문이라고 예상했다.

유제니의 티 파티에서 하몬 양이 무례하게 굴었다는 소문이 퍼졌고 사람들은 그녀에 대한 초대를 취소했던 것이다. 하몬 양을 초대했다가 공들여 연 행사에 소란이 일어나면 골치 아프니까.

“내가 편지를 쓴다고 사람들이 당신을 다시 초대할까요?”

유제니는 솔직하게 물었다. 아마도 상대가 그녀와 나이가 비슷했다면 더 이상 이야기할 가치가 없다고 하몬 양을 내쫓았을 것이다.

하지만 베라 하몬은 줄리아 또래였고 유제니는 그게 마음이 쓰였다. 어리다는 건 경험이 적다는 거다. 그건 잘 모른다는 말이 될 수도 있고.

“당신은 중요한 사람이니까요, 레이디 비스컨.”

“내가요?”

뜻밖의 대답에 유제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베라는 진지하게 말했다.

“사람들은 당신의 말이라면 듣고 보잖아요. 이번 일도 사람들은 내가 라넌 경에게 무례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티 파티에서 소란을 피워서 이러는 거고요.”

“왜, 왜 그렇게, 아니….”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묻는 건 의미가 없다. 유제니는 진정하고 다시 물었다.

“누가 그래요?”

어느 누가 베라에게 레이디 비스컨의 티 파티에서 소란을 부려서 초대를 취소하겠다고 했단 말인가? 대체 누가? 어리둥절해하는 유제니에게 베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누가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고요? 왜요?”

당연히 그냥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다. 하몬 부인이 그랬다. 이게 다 레이디 비스컨의 행사라 그런 거라고. 그녀가 백작가의 딸이라 다들 눈치를 보는 거라고.

물론 아니다. 유제니는 물론 하몬 양의 초대를 취소한 사람들이 들으면 펄쩍 뛸 이야기였다.

“왜, 왜냐면….”

베라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제가 틀린 말을 하진 않았잖아요?”

맙소사. 유제니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베라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틀린 말을 한 게 아니라고. 그리고 그게 나쁘지 않다고.

결국 하몬 양이 라넌 경에게 자진해서 사과할 일은 없다는 말이다. 유제니는 그만 나가 달라고 할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 물었다.

“전 그게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요, 설령 맞는 말이라 해도 해도 되는 말은 아니잖아요?”

“왜요? 다들 알잖아요? 그 여, 아니, 라넌 경이 실패자라는 걸요. 다들 가식을 떨고 있는 것뿐이잖아요.”

가식이라고? 유제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다가 물었다.

“그래서 가식 떨지 않고 말한 거라고요?”

“맞아요.”

베라의 얼굴에 뿌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적어도 그녀는 가식 떨고 얌전 떠는 귀족 아가씨들과 다르다. 솔직하고 거침이 없다. 그녀는 그런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유제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베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하몬 부인이 꽤 늦게 결혼한 걸 알아요?”

응? 베라가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하몬 부인의 또래는 다들 스무 살쯤에 결혼을 했다. 하지만 하몬 부인은 스물세 살에 결혼했다. 그건 그 또래 중에는 좀 늦은 편에 속한다.

베라도 알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든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녀가 아는 어머니 또래의 여자 중에서 가장 잘 사는 사람이었다.

“원래 하몬 경은 결혼할 사람이 있었대요. 하몬 부인은 스무 살이 넘을 때까지도 약혼자는커녕 구혼자도 없었고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지? 베라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유제니는 찻잔을 들고 시선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하몬 부인은 운이 좋았어요. 하마터면 당신 말대로 실패자가 될 뻔했죠. 하몬 경의 약혼녀가 병으로 사망했거든요.”

몰랐다. 입을 딱 벌리는 베라를 유제니가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내가 너무 가식을 떨고 있군요. 약혼녀가 아니에요. 하몬 경과 죽은 약혼녀는 결혼식을 치렀거든요.”

“자, 잠깐….”

결혼식을 치렀다고? 베라는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맞은편에서 유제니가 침착하게 말했다.

“혼인 신고는 안 했대요. 결혼하고 이 주 만에 사망했거든요.”

“거짓말!”

“혼인 허가서가 있을 거예요.”

귀족이라면 결혼하기 전에 국왕에게 혼인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니 유제니의 말이 사실이라면 하몬 경이 받은 혼인 허가서의 복사본이 왕실에 보관돼 있을 것이다.

유제니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베라를 쳐다봤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유제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로 몰랐던 모양이다. 유제니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당신이 몰라도 되는 일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입 밖에 내지 않은 거고요. 그걸 가식이라고 생각하나요?”

베라의 눈에 분노가 어렸다. 유제니의 말대로 그녀가 몰라도 되는 일이다. 어머니가 스무 살이 넘도록 구혼자가 없었다는 것도, 아버지에게 사망한 부인이 있다는 것도.

그리고 하몬 부인이 그녀와 베라가 그렇게 비웃던 간신히 구제받은 여자라는 것도.

거짓말이다. 레이디 비스컨이 심술을 부리는 거다. 베라는 그대로 인사도 없이 비스컨 저택에서 떠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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