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34 – 3
“그렇군.”
국왕이 말했다. 이자벨라 역시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거마로트 공작 부인이 날카롭게 물었다.
“자네의 말이 진실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지? 내가 내 아들의 친구들 말보다 자네의 말을 믿어야 할 이유가 있느냔 말이야.”
“맞습니다.”
엘리엇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자벨라의 의문이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똑같이 합당한 의문을 던졌다.
“공작 부인의 말씀대로라면 저는 자신이 공작의 후계자라고 주장하는 사내를 그들의 친구들 앞에서 무참히 살해하고 드래곤과 계약을 맺은 뒤, 증인들을 살려 뒀군요.”
말도 안 되는 지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거마로트 공작은 몰라도 공작이라는 이름에 머뭇거렸어야 한다. 아니, 엘리엇의 주장대로 힐데자르가 자기 자신을 이즈의 백작이라 주장했다면 그것만으로도 귀족이 아닌 자들은 힐데자르에게 손대는 것을 주저했을 것이다.
그러니 감히 공작의 후계자를 죽이고 그 친구들을 살려 둔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드래곤과 계약까지 맺어 놓고 증인들을 그냥 뒀다고?
누가 봐도 힐데자르의 친구들이 주장한 것보다 번즈 백작이 주장한 게 더 그럴듯했다.
“건방진 놈.”
하지만 이자벨라에게는 엘리엇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천박한 평민 주제에 감히 그녀의 앞에서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그녀가 틀렸다고 말해? 여기가 국왕 전하의 앞이 아니었다면 사람을 시켜 이 작자를 매우 쳤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국왕 루퍼트의 앞이었고 루퍼트는 엘리엇의 주장이 더 그럴듯하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번즈 백작. 자네는 힐데자르의 친구들이 힐데자르를 죽이고 도망쳐 나왔다고 생각하는 건가?”
“전하!”
끔찍한 이야기에 이자벨라가 소리쳤다. 루퍼트는 손을 들어 그녀에게 사과의 뜻을 전하고 다시 말했다.
“힐데자르의 친구들이 거짓말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다. 엘리엇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게다가 거마로트 공작 부인의 아들에 대한 것도 거짓말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거짓말? 무슨 거짓말?”
이걸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네. 엘리엇의 얼굴에 딱 그런 표정이 떠올랐다. 뭔데? 다시 초조해진 이자벨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에는 루퍼트도 그녀에게 앉으라고 말하지 않았다. 엘리엇은 가볍게 인상을 썼다가 차를 마신 뒤 말했다.
“아마 공작 부인의 아들은 살아 있을 겁니다.”
“뭐라고?”
이자벨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가 희망으로 약간 붉어졌다. 엘리엇은 그녀가 아닌 왕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가 죽었다면 드래곤이 친구들을 보내 줬을 리가 없으니까요.”
엘리엇은 동료를 이끌고 둥지에서 빠져나왔다. 남은 건 힐데자르와 그 동료들뿐. 애초에 드래곤이 벌을 내린 힐데자르뿐 아니라 그 친구들도 살려 준 이유는 단순했다.
힐데자르와 교대로 알을 잡고 있으라는 이유였다.
물론 드래곤이 관대한 이유로 그런 건 아니다. 힐데자르와 그 동료들을 살려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관대하긴 하지만 힐데자르가 힘들까 봐 그런 건 아니라는 말이다.
드래곤은 힐데자르가 지쳐 쓰러지면 알을 잡고 있는 인간이 없어진다는 걸 알았고 힐데자르의 대타로 그 친구들을 남겨 뒀을 뿐이다. 하지만 힐데자르의 친구들은 둥지에서 도망쳐 나왔고 드래곤은 그들을 뒤쫓지 않았다.
“힐데자르가 살아 있다는 말이군.”
루퍼트의 말이 도화선이 되었다. 이자벨라는 그대로 몸을 돌려 알현실에서 떠나려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자신이 국왕 앞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몸을 돌려 간청했다.
“전하, 부디….”
자식을 구할 수 있도록 떠나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간청에 루퍼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떠나도 좋다. 그 신호에 이자벨라는 예의범절 따위는 잊어버리고 달려나갔다.
“자네는 이럴 줄 알았던 거지.”
거마로트 공작 부인이 떠나자 단둘이 남은 알현실에서 루퍼트가 불쑥 말했다. 차를 마시던 엘리엇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루퍼트는 이 남자의 이런 점이 좋은 건지 싫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국왕인 그의 앞에서 여유로운 태도를 보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사벨라처럼 오래 알고 지낸 귀족이 아니라면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안절부절못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엘리엇은 늘 여유가 있었다. 심지어 그가 귀족 작위를 받기 전이었던 처음 만난 그때에도.
루퍼트는 엘리엇의 여유로움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가 대체 뭘 믿고 이리 여유로운 건지 궁금했다. 유서 깊은 가문이 뒤에 있는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용병이다.
드래곤의 둥지에서 가져온 어마어마한 재산이 있다고 하지만 그건 국왕이 핑계를 대고 압수해 버리면 끝이다.
하지만 그리 길지 않는 시간 동안 번즈 백작에 대해 알아본 바에 따르면 그는 꽤 안목이 있었다. 어떤 사업에 손을 대면 되는지 알았고 어떤 무역품이 잘 팔릴지도 알았다.
가끔은 재난조차도 미리 알아차리고 피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가 모르는 거라곤 레이디 비스컨의 마음뿐인 게 아닐까.
“다아리브혼의 둥지에서 만난 자가 힐데자르라는 걸 알았지?”
루퍼트의 질문에 엘리엇은 씩 웃었다. 알았다. 사실 그는 힐데자르를 실제로 보기 전까지 그가 꽤 궁금했다. 얼마나 멍청하길래 고작 열 명 남짓한 용병과 친구들을 이끌고 드래곤의 둥지에 들어갔는지가.
솔직히 말하면 힐데자르를 살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안 했다. 그가 아는 한, 힐데자르는 그 둥지에서 사망했으니까.
아마 이번에도 힐데자르는 그 둥지에서 벗어나지 못하지 않을까. 엘리엇은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거마로트 공작가의 후계자라면 당연히 얼른 알려 드려야죠.”
“그리고 그를 구하기 위해 이 나라는 위험에 처했을 테고.”
거마로트 공작은 왕의 숙부다. 즉, 힐데자르는 왕의 조카라는 말이다. 조카가 드래곤에게 잡혀 있으니 루퍼트는 그를 구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야 했을 것이다.
그건 드래곤의 분노를 샀겠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부러 루퍼트에게 거마로트 공작의 아들이 아니라 이즈의 백작이라고 말한 게 아니냐는 지적에 엘리엇은 빙그레 웃었다.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이다. 힐데자르는 정말로 자신이 거마로트 공작의 후계자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드래곤이 자신의 몸값을 요구할까 봐 걱정됐던 모양이지.
우습게도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드래곤이 자신을 죽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거다. 멍청하고 우매한 인간. 엘리엇은 왜 드래곤이 인간을 그렇게 부르는지 이해했다.
“정말로 힐데자르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나?”
국왕의 이어진 질문에 엘리엇은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 아마도 살아 있을 거다. 죽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는 자기 생각을 말했다.
“다아리브혼에게 중요한 건 인간에게 벌을 주는 게 아닙니다. 알을 지키는 거죠. 만약 알에 문제가 생겼다면….”
벌써 드래곤이 발시안을 공격했겠지. 그리고 발시간이 아직 평화롭다는 건 알에 아직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그건 힐데자르가 살아서 알이 깨지지 않게 붙잡고 있다는 뜻일 수 있고.
“물론 그가 죽었지만, 알은 멀쩡할 수도 있고요.”
이어진 엘리엇의 말에 루퍼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이 맞다. 지금 중요한 건 힐데자르가 죽었느냐 살았느냐가 아니다.
알이 무사하느냐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도하는 것밖에 없군.”
용사 발시안과 요정 마고조차 물리치지 못하고 쫓아내기만 한 드래곤이다. 심지어 쫓아내는 데만도 발시안이 사망했다.
루퍼트는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알이 무사하기를.
* * *
“무엇을, 무엇을 하시려고요?”
빙글빙글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유제니를 따라가며 클레어가 물었다. 붉은 망토와 검은 뿔. 가녀린 체구를 부풀리듯 입은 거대한 드레스에도 유제니는 거침없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기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잖나.”
적이 수도까지 몰려왔다. 핸더슨 후작 부인이 약속한 군대는 아직 얼마나 왔는지도 모르고.
클레어는 과연 번즈 백작이 적을 물리칠 수 있을지 걱정했다. 그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한 명이다. 그의 부하들까지 있다 해도 쳐들어온 군대를 막아 낼 수 있을까.
“전하.”
유제니가 성벽으로 다가가자 클레어는 깜짝 놀라서 그녀를 말렸다. 거기 서 있다가 적군의 화살이라도 맞으면 어쩌란 말인가.
하지만 유제니는 꿋꿋했다. 그녀는 성벽에 다가가 자신의 모습을 아군과 적군 앞에 드러냈다. 그리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보아라! 이곳에 허락 없이 발을 들이는 자, 저주를 받을 것이다!”
어찌나 크게 소리쳤던지 말을 끝낸 유제니가 기침을 했을 정도다. 클레어는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효과는 생각보다 컸다.
풍성한 검은 드레스와 붉은 망토. 하늘을 찌를 듯한 검은 두 개의 뿔. 적군들은 성벽에 서 있는 여자가 소문의 그 마녀라는 것을 깨달았다.
부모를 죽이고 약혼자를 잡아먹은 마녀. 왕위를 찬탈한 가짜 여왕.
적군뿐 아니라 아군조차도 겁을 집어먹었다. 소문뿐만 아니라 외모조차 마녀였으니 그럴 만했다.
“전하!”
성 아래에서 적을 막아 내던 번즈 백작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위험하다. 화살이 날아오기라도 한다면.
다음 순간, 적군이 쏜 화살이 아슬아슬하게 유제니의 곁을 비켜 갔다.
“아악!”
비명을 지른 건 클레어였다. 놀라서 주저앉은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가 유제니가 꼿꼿하게 서 있는 것을 확인했다.
“전하, 전하.”
피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겁에 질린 나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하나둘 화살을 쏘던 적군이 어느 순간 일제히 유제니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전하!”
깜짝 놀란 엘리엇이 성벽으로 올라가려 했을 때였다. 그의 눈앞에서 놀라운 상황이 펼쳐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방패가 있는 것처럼 일제히 유제니를 향해 날아오던 화살이 그녀의 앞에서 힘을 잃고 떨어졌다.
“뭐, 뭐야.”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적군은 물론 아군조차도 넋을 잃고 유제니를 바라봤다. 공중에 멈춘 화살이 힘을 잃고 그녀의 주변에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창백한 얼굴에 눈동자만 형형하게 빛나는 유제니가 적군의 뒤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살려서 돌려보내지 마라!”
마법이다.
엘리엇은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을 뒤늦게 이해했다. 그가 유제니에게 준 선물이었다. 마법석이 박힌 반지. 마법석 안에는 반지를 소유한 사람의 주변에 보이지 않는 방패를 만들어 주는 마법이 들어 있다.
“맙소사.”
엘리엇의 등 뒤로 땀이 주룩 흘러내렸다. 대담하기도 하다. 그녀가 그런 반지를 가졌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은 저걸 마녀 유제니의 힘이라 생각할 것이다.
문제는, 방금 전 정도의 공격이라면 마법석 안의 마력을 전부 소진했을 거라는 거고.
이제 그만 내려오도록 설득해야겠군. 엘리엇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성벽으로 올라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적군 사이에서 화살 하나가 날아들었다.
“전하!”
화살이 유제니의 몸에 박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몸이 뒤로 확 꺾이는 게 엘리엇의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