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34 – 2
그래?
루퍼트의 시선이 엘리엇을 향했다. 뭔가 알고 있냐는 질문이 담긴 표정은 평온했다. 마치 공작 부인이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 태도에 공작 부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국왕을 향해 소리쳤다.
“알고 계셨습니까?”
“이자벨라.”
국왕이 손을 내밀어 공작 부인에게 손바닥을 보여 주었다. 진정하라는 태도에 이자벨라의 숨이 조금 느려졌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왕을 쳐다보고 있었다.
“몰랐네. 당연하잖나. 진심으로 내가 번즈 백작이 힐데자르를 해친 걸 알고도 그를 그냥 내버려 뒀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몰랐다는 확실한 발언에 공작 부인의 태도가 아까보다 훨씬 침착해졌다. 표정을 누그러트린 그녀는 번즈 백작을 한 번 쳐다보고 다시 국왕에게 말했다.
“저자가 거마로트 공작가의 후계자를 해쳤습니다. 당장 작위를 박탈하고 벌을 내려야 합니다.”
“그랬나?”
국왕이 엘리엇에게 물었다. 거마로트 공작가의 후계자를 해쳤냐는 질문에 엘리엇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거마로트 공작가의 후계자를 해친 적이 없다.
“아니요.”
“거짓말!”
“이자벨라.”
다시 흥분하는 공작 부인에게 국왕이 진정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양측의 이야기를 들어 봐야 한다. 설령 번즈 백작이 백작이 아니라 번즈라고 해도 그건 마찬가지다.
국왕의 제지에 이자벨라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어서 거짓말해 보라는 듯 엘리엇을 쳐다보았다.
“저는 거마로트 공작가의 후계자를 해치기는커녕 만난 적도 없습니다.”
“거짓말이야!”
다시 공작 부인이 소리쳤다. 그녀는 다시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번즈 백작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둥지에서 내 아들을 만났잖아! 네가 내 아들을 죽이고 드래곤에게 알랑거렸다며! 다 들었어!”
아하.
엘리엇은 그제야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국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공작 부인께서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오해? 오해라고? 감히! 감히!”
이자벨라의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하고 경비병들이 문을 열었지만, 국왕은 그들에게 손바닥을 내밀어 괜찮다고 신호했다.
아들을 잃은 엄마다. 흥분할 권리가 있다.
루퍼트에게는 그녀를 진정시킬 의무가 있었고.
그는 다시 이자벨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침착하게 말했다.
“무슨 상황인지 확실하게 듣고 처벌할 거네. 걱정하지 말고 앉게.”
국왕의 말에 이자벨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의 아들이 더러운 드래곤의 둥지에서 천박한 용병에게 살해당했다. 필부도 아니다. 유서 깊은 거마로트 공작가의 후계자인데.
“설명해 보게. 내게는 백작이라고 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백작이라고요?”
국왕의 말에 공작 부인이 무슨 소리냐는 듯 물었다. 루퍼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번즈 백작이 둥지를 습격한 사람이 무슨 백작이라고 들었다고 했거든. 그래서 백작가에서 찾고 있었지.”
찾고 있었다고? 공작 부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엘리엇은 국왕처럼 어깨를 으쓱하고 싶었지만 참고 입을 열었다.
“제가 드래곤의 둥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 청년이 드래곤의 알을 깨트리려 하고 있었습니다.”
딱히 드래곤의 둥지를 찾으려 한 건 아니다. 엘리엇은 그렇게 설명했다. 그는 용병이었고 한 차례 일이 끝난 뒤 부하들을 이끌고 쉬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부유한 멍청이가 드래곤의 둥지를 찾아 습격한다는 소문을 들었고 구경이나 하자고 따라나섰던 것이다.
“구경이나 하려 했다고?”
믿을 수 없다는 공작 부인의 말에 엘리엇은 어깨를 으쓱했다.
“드래곤의 둥지잖습니까. 진짜라면 일평생 한 번 겪을까 말까인 구경을 하는 거니까요.”
거짓말이다. 하지만 엘리엇은 능청스러웠고 국왕과 공작 부인 역시 그의 말을 믿었다. 안 믿을 이유가 없다. 어느 누가 그가 멍청한 힐데자르가 드래곤의 알을 깰 걸 미리 알고 막기 위해 따라갔다고 생각하겠는가.
“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알에 금이 갔더군요. 금을 낸 청년과 그 동료들은 드래곤에게 들킨 상태였습니다.”
다아리브혼은 그 순간, 하필이면 그 순간 알 곁에 없었다. 그리고 엘리엇은 그게 절대 변하지 않는 어떤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순간이 있다. 몇 번을 반복해도, 몇 번을 다시 봐도 절대 변하지 않는 어떤 순간.
그 순간, 다아리브혼은 자리를 비웠고 힐데자르가 부하들을 이끌고 둥지에 도착했다. 그는 기대하던 천장이 닿도록 쌓인 금은보화가 아니라 거대한 알을 발견했고 멍청하게도 그게 알이 아니라 금은보화를 숨긴 방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즉, 방의 문을 열려고 했던 것이다.
“자기 자식에게 손댄 존재를 어떻게 하고 싶은지는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엘리엇은 그렇게 말하며 하인이 가져온 찻잔을 집어 올렸다.
“감히.”
공작 부인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감히 네가 내가 그따위 말을 해?
하지만 엘리엇은 힐데자르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는 힐데자르를 구했다. 그는 알에 금이 간 것을 발견한 드래곤을 설득했다.
“다아리브혼은 당장 알에 손댄 자들을 죽이고 이 나라에 벌을 주려 했습니다. 발시안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으니까요.”
국왕은 다 들은 이야기였지만 흥미롭다는 듯 엘리엇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화가 난 드래곤을 진정시킨 이야기다.
어떤 이야기가 이것보다 더 흥미로울까.
“저는 알에 금이 갔을 뿐, 깨지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엘리엇은 드래곤에게 금이 갔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안에 있는 새끼가 무사히 나올 때까지 알의 금이 벌어지지 않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다아리브혼을 설득했다.
“벌어지지 않게?”
금이 간 알이 깨지지 않게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어리둥절해하는 공작 부인에게 엘리엇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누군가가 알을 잡고 있으면 됩니다.”
금이 더 벌어지지 않게 금 양쪽을 잡고 붙이고 있으면 된다. 간단한 방법이지만 그걸로 알이 깨지지 않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다아리브혼은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알을 깨트리려 한 자에게 금이 벌어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벌을 내렸다.
“벌을 내렸다고? 내, 내 아들에게?”
그제야 이자벨라는 힐데자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깨달았다. 놀라서 벌떡 일어나는 그녀에게 엘리엇이 얄미울 정도로 침착하게 말했다.
“다아리브혼은 그 청년을 당장 죽여 버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새끼가 알에서 깨어날 때까지 알이 깨지지 않게 지켜 준다면 살려 주겠다고 했죠.”
이 정도면 훌륭한 조건이다. 심지어 관대하기까지 했다. 엘리엇이 다아리브혼이라면 힐데자르를 죽여 버리고 그 시체를 씹으며 힐데자르가 데려온 부하들에게 알을 붙잡고 있게 했을 테니까.
“그럼, 그럼 내 아들이, 힐데자르가….”
알을 붙잡고 있다. 엘리엇은 그 사실을 국왕에게 알리고 경고하기 위해 왕궁에 왔다. 만약 힐데자르가 붙잡고 있다고 해도 알이 깨지면 다아리브혼은 발시안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아드님의 친구들이 제가 아드님을 죽였다고 했다고요?”
침착하게 차를 홀짝인 엘리엇은 이자벨라에게 그렇게 묻고 루퍼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제가 본 게 공작 부인의 아들이라면, 아주 멀쩡하게 살아 있는 걸 보고 나왔습니다만.”
힐데자르의 친구들이 거짓말을 했다는 말이다. 그것도 멀쩡하게 살아서 벌을 받는 힐데자르를 버리고 와서.
공작 부인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입을 딱 벌렸다. 그리고 루퍼트와 엘리엇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루퍼트에게 애원하듯 물었다.
“전하! 이 천한 놈의 말을 믿으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이자벨라.”
루퍼트의 얼굴에 안타깝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이자벨라와 잘 알았다. 그의 누님인 제네비브의 친구였으니까.
어린 루퍼트를 데리고 제니비브 누님과 함께 피크닉을 가 주던 사람이다. 그녀가 숙부인 거마로트 공작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 진심으로 축하했고.
그러니 가능하면 이자벨라의 편을 들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번즈 백작의 이야기는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번즈 백작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은밀하게 조사해 봤는데도 사실일 거라는 결과가 나왔다. 루퍼트는 거마로트 공작 부인을 바라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번즈 백작이 처음 이 이야기를 내게 했을 때, 내게 알을 깬 자가 이즈의 백작이라고 했네.”
“이즈의 백작이라니 이즈는….”
거기까지 말한 이자벨라의 말이 멈췄다. 생각났다. 힐데자르가 밖에서 사고를 치면 자신을 이즈의 백작이라고 소개하는 것을.
이즈의 영주는 핸더슨 후작이다. 즉, 백작이 없다. 힐데자르가 이러는 이유는 간단하다. 거마로트 공작의 아들이라고 했다가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면 혼나니까.
많은 평민이 어느 영지의 영주가 누구인지, 어떤 작위인지 잘 모른다. 특히나 북부인 이즈라면 다들 이름은 알지만 잘 모르는 영주 중 하나였다. 그러니 적당히 유명한 영지의 이름과 백작 위를 붙여 신분을 속이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비밀리에 이즈의 백작이라는 자를 찾았다네. 하지만….”
못 찾았다. 당연하다. 이즈에는 백작이 없으니까. 그리고 힐데자르가 사고 칠 때마다 자신을 이즈의 백작이라고 하는 건 비밀이니까.
“그럼, 그럼….”
이 모든 게 결국 아들이 자기 무덤을 팠다는 거다. 말을 잇지 못하는 이자벨라를 보고 루퍼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긍정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그때, 엘리엇이 입을 열었다. 긍정? 지금? 여기서?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의 루퍼트와 지금 불난 집에 기름 끼얹냐는 표정의 이자벨라가 엘리엇을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얄미울 정도로 침착하게 말했다.
“아드님의 친구들이 도망쳐 나왔다면 둥지로 돌아가는 방법도 알 겁니다.”
엘리엇과 힐데지르가 들어간 길은 다아리브혼이 없애 버렸다. 그러니 이즈의 백작이 힐데자르라는 것을 알아도 그를 찾으러 갈 길이 요원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힐데자르의 친구들이 그를 버리고 도망쳐 왔으니 도망친 길이 있을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