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6화 (151/239)

156화. 34 – 1

“전하! 적이 수도까지 몰려왔습니다.”

적막하던 알현실에 순식간에 급박한 분위기가 가득 찼다. 적이 여기까지? 클레어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서 피해야 한다고 말하기 위해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을 돌아보았다.

“핸더슨 후작은?”

유제니는 침착했다. 그녀의 질문에 달려온 전령이 급하게 소리쳤다.

“도망쳤잖습니까? 피하셔야 합니다!”

“아니, 핸더슨 후작 부인 말일세.”

핸더슨 후작은 아주 예전에 도망쳤다. 아들과 부인을 버리고. 후작 부인은 남편이 영지를 돌보기 위해 내려갔다고 둘러댔지만, 사람들은 다 알았다. 후작이 배를 타고 이 나라에서 떠났다는 것을.

핸더슨 후작가를 지키는 건 후작 부인과 아직 십 대인 그녀의 아들뿐이다.

“그녀가 약속한 병사는?”

핸더슨 후작의 영지 중 하나인 이즈는 거친 북부에 있어서 용병이 많다. 핸더슨 후작 부인은 그 용병들과 사병을 보내 주겠다 약속했었다.

유제니의 말에 클레어는 말을 잃었다. 핸더슨 후작 부인이 약속한 병사? 과연 오기나 할까?

“그, 그건 아직….”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하게. 번즈 백작은….”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커다란 문이 벌컥 열리더니 번즈 백작이 들어왔다.

이 남자 때문이다. 클레어는 번즈 백작을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가 재빨리 표정을 관리했다. 핸더슨 후작 부인이 병사를 보낸다고 했지만 지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 번즈 백작 때문에.

엘리엇 번즈. 마물을 물리치고 선전 포고 없이 쳐들어온 적군을 막아 영웅이 된 남자. 그를 둘러싼 소문은 많지만 밝혀진 것은 거의 없다. 클레어가 아는 한, 번즈 백작은 각종 지식뿐 아니라 음악과 미술 등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게다가 용병 출신이라고 하지만 귀족의 예의범절에도 익숙했다. 어찌나 완벽한 예의범절을 구사하던지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조차도 만족할 정도였다.

그런 그에게 갖가지 소문이 뒤따르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그럴듯한 소문은 그가 핸더슨 후작의 사생아라는 소문이었고.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

번즈 백작은 늘 그렇듯 안에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유제니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이 방 안에 오직 유제니와 자신만 존재한다는 듯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피하셔야 합니다.”

다행히 번즈 백작의 입에서도 클레어의 생각과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피해야 한다. 현재 이 상황에서 수도에 남아 있는 건 위험하다.

하지만 유제니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물었다.

“레가몬드는?”

레가몬드가 누구지? 익숙한 이름이다. 어리둥절한 클레어 앞에서 번즈 백작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하지만 그 역시 클레어와 마찬가지로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확보했습니다.”

레가몬드를 확보했다는 말에 유제니는 고개를 들어 전령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기사들에게 물었다.

“성문은?”

닫았다. 이미 성 밖에 살던 발시안의 백성들은 성 안으로 들어온 뒤였다. 유제니는 몸을 돌려 클레어에게 말했다.

“내 관을 가져오게.”

“관, 관이요?”

그걸 관이라고 부르는 데 많은 논쟁이 있겠지만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은 그걸 관이라고 부르고 있다. 검은 뿔이 두 개가 솟은, 보기에도 불길하고 끔찍해 보이는 모자.

투구는 아니다. 그건 유제니의 머리에 착 달라붙어 마치 그녀의 머리에 뿔이 솟은 것처럼 보이게 만드니까. 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투구였다. 보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느끼게 만드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과, 관은 눈에 너무 띌 텐데요.”

클레어의 말에 유제니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알현실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눈에 띄어야지.”

* * *

“번즈 백작.”

낯선 목소리에 엘리엇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가 들어온 문에서 난 소리니 왕비는 아닐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온 사람은 거마로트 공작 부인이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게 몇 달 전 연회였으니 꽤 오랜만에 보는 것이다.

“거마로트 공작 부인.”

엘리엇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전에 본 것보다 바싹 마른 데다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지 않아도 엘리엇은 그녀가 이곳에 왜 왔는지 알았다.

“놀라운 일이야.”

공작 부인은 경멸에 가까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엘리엇은 악수를 청하지 않았고 공작 부인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은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악수도 청할 줄 모르는 무지렁이 촌것이 귀족입네 하고 왕궁에 와 있다니.”

적나라한 비난에 엘리엇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현재 공작 부인의 상태가 어떤지 너무나 잘 알 수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귀족은 이렇게 대놓고 비난하지 않는다. 특히나 공작쯤 되는 상급 귀족이라면 사용하는 단어부터가 다르다.

유제니가 들었다면 정말 공작 부인이 한 말이라고 믿지 못했을 것이다.

유제니. 그녀를 생각하자 엘리엇의 차가운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피어올랐다. 지금쯤 티 파티 중일 것이다. 그는 유제니가 지금의 평화로운 생활을 즐겼으면 했다. 최대한 많은 평화를 즐기고 누리기를 바랐다.

그리고 맛있는 것도.

세 가지 크림을 채운 복숭아는 엘리엇이 유제니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디저트였다. 비슷한 게 십 년쯤 지나면 나오긴 한다. 정확히 말하면 세 가지 크림을 채운 복숭아가 아니라 캐러멜을 바른 사과였지만.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은 단걸 좋아한다. 특히 복숭아를. 하지만 자신이 단걸 좋아한다는 걸 절대 티 내지 않았다. 복숭아에 아예 알레르기가 있다는 소문을 냈다. 약점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엘리엇은 그게 안타까웠다. 살아남기 위해 가장 좋아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것으로 속이고 살아야 했던 유제니가.

“웃어? 감히 날 비웃어?”

엘리엇의 미소에 공작 부인이 벌컥 화를 냈다. 다행히 곧바로 국왕이 등장했기에 그녀의 분노 표출은 오래가지 않았다.

물론 엘리엇은 그녀의 오해를 바로잡을 생각이 없었지만.

“벌써 만났나 보군.”

국왕 루퍼트 사운더키즈는 풍채가 좋은 남자였다. 엘리엇은 그의 갈색 머리카락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본 국왕은 드래곤의 위협 앞에 고뇌와 공포로 머리가 하얗게 변했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공작 부인이 고함치는 것을 문밖에서 들었다는 말이다. 국왕의 말에 이자벨라 거마로트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는 엘리엇이 헛소리를 할까 봐 재빨리 둘러댔다.

“제가 가르쳐 주고 있었답니다.”

“오, 그래? 어떤 가르침을 받았지?”

국왕의 시선이 엘리엇을 향했다. 그러자 이자벨라는 엘리엇이 대답하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알고 보니 번즈 백작이 아직 한 번도 집에 손님을 초대하지 않았다더군요. 사교 시즌이면 한 번쯤은 손님을 초대해야지요.”

꽤나 당황한 모양이다. 엘리엇은 거마로트 공작 부인의 둘러대는 말에 피식 웃었다.

그가 손님을 초대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귀족들과 친분을 쌓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귀족들의 친분이라는 게 얼마나 얄팍한지 알았다. 몇몇 사람을 제외하면 귀족들은 거마로트 공작 부인이 말한 무지렁이 촌것보다 더 신의라는 걸 몰랐다.

그리고 신의를 아는 몇몇 사람은 드래곤의 분노와 전쟁의 불길 앞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고.

신의를 아는 자들이라면 굳이 연회를 열어 대접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친분을 쌓게 될 것이다. 신의를 모르는 자라면 굳이 친분을 쌓을 필요가 없다. 그는 부유하니, 하몬 경처럼 알아서 그에게 접근할 것이다.

그렇다면 엘리엇이 때에 따라 그들을 이용하거나 적당히 상대하면 된다.

“그렇군. 번즈 백작. 사교 시즌이 끝나가는데 왜 아직 손님을 초대하지 않나? 집은 구했다고 들었는데.”

다들 그렇게 묻는다. 엘리엇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 것과 똑같이 대답했다.

“귀족 예법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어떻게 손님을 초대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게다가.”

몰라서 그런다고만 하면 다들 도와줄 테니 손님을 초대하라고 한다. 그래서 엘리엇은 한 가지 이유를 더 붙였다.

“아는 사람이 없으니 초대할 사람도 없고요.”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둘 중 하나다. 자신이 친구들을 데리고 방문하겠다는 사람 반, 그러냐며 물러나는 사람 반.

공작 부인과 왕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나이가 지긋한 귀족이나 상급 귀족들은 다 이렇게 반응한다.

“그렇군.”

물러나는 거다.

엘리엇 같은 신흥 귀족이 여는 행사에 참석하기엔 급이 맞지 않는다는 거겠지.

“레이디 비스컨에게 구혼 중이라 들었는데. 그녀도 참석하지 않을 것 같나 보지?”

이어진 공작 부인의 공격에 엘리엇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제게 관심이 아주 많으시군요. 공작 부인께서 참석하신다면 레이디 비스컨께서 제 행사에 참석하시는 것보다 더 의미가 있을텐데요.”

공작 부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미쳤나? 네 집에 가게?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말하기 전에 국왕 루퍼트가 말했다.

“그렇군. 그리 걱정된다면 거마로트 공작 부인, 자네가 참석하면 백작에게 많은 도움이 되겠군.”

“전하!”

말도 안 된다는 반발이 튀어나왔다. 루퍼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손을 들고 공작 부인의 반발을 멈췄다. 그리고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번즈 백작을 걱정했지 않나.”

“제가 무슨!”

공작 부인의 반발에 루퍼트는 다시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피곤하다는 듯 물었다.

“그래, 자네가 꼭 번즈 백작과 동시에 날 봐야겠다고 말했다던데. 그 이유를 듣지.”

그래? 엘리엇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엘리엇이 국왕을 알현하고 싶다고 말하긴 했다. 하지만 공작 부인이 따라 들어오길래 시간이 겹쳤나 했던 거다.

하지만 공작 부인은 일부러 번즈 백작과 같이 알현하기를 원했고 바로 지금 이 고발을 하기 위해서였다.

“저 천박한 용병이 제 아들을 살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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