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5화 (150/239)

155화. 33 – 3

그때, 유제니가 입을 열었다.

“사실, 라넌 경이 저와 친한 몇몇 분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고 있어요.”

뭐라고? 모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유제니에게 향했다. 그녀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마치 오늘 날씨가 참 좋다는 듯 말을 이었다.

“최근에 위험한 습격 사건이 몇 번 있었잖아요. 자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을 알면 좋지 않을까 해서요.”

사람들의 머릿속에 얼마 전에 신문을 도배한 기사가 떠올랐다. 늦은 시각, 파티에 참석하고 돌아오던 부인이 강도를 당했다는 사건이었다.

다들 큰일이라고 말했다. 몇몇 피해자는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느라 늦은 밤에 다니다 강도를 당하긴 했다. 하지만 아닌 피해자도 있었다.

더운 여름에는 상대적으로 시원한 밤에 무도회를 시작해서 새벽쯤에 집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자기 몸을 보호한다고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에스마 양이 물었다. 그제야 유제니는 이 자리에 에스마 양이 참석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강도를 만나면 보통 몸이 얼어붙는다고 하더라고요. 우리끼리 연습을 해요.”

유제니의 설명에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위험한 순간에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시뮬레이션을 한다는 말에 에스마 양이 말했다.

“전 라넌 경에게 검술을 배우는 줄 알았지 뭐예요. 그런 연습이라면 정말 좋을 것 같은데요.”

“오, 검술도 배워요.”

유제니가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검술도 배운다. 물론 제대로 훈련을 받는다기보다는 검을 다루는 방법에 가깝지만.

그녀는 어디까지나 자기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사람들과 배우고 싶은 것뿐이다. 하지만 클레어는 아니었다.

그녀는 이 일로 더 많은 사람이 검술에 관심을 가졌으면 했다. 그리고 그걸로 기사단에 여자가 더 늘어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해요?”

에스마 양의 질문에 리사가 씩 웃었다. 그녀도 유제니와 함께 클레어에게 검을 배우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유제니의 도움을 받아 검을 배우고 있다.

“지금은 여기서요.”

“에스마 양도 올래요? 재미있어요.”

“그런트 양도 배워요?”

리사뿐만이 아니다. 줄리아와 로렌도 배우고 있다. 리사가 재미있다고 말하자 테이블 반대편에 앉아 있던 손님이 말했다.

“저도 해 볼 수 있어요?”

그 질문을 시작으로 참여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덕분에 하몬 양이 클레어에게 이상하게 굴던 일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클레어가 그 사실을 깨달은 건 티 파티가 끝난 다음이었다. 다들 재미있었다며 유제니에게 인사를 하고 떠났고 마지막으로 남은 클레어만 유제니를 따라 그녀의 개인 응접실로 들어섰다.

“감사합니다.”

유제니의 침실에 딸려 있는 개인 응접실은 그녀와 아주 가까운 사람만 들어올 수 있다. 보통은 가족. 그리고 줄리아 정도일 것이다.

클레어는 자신이 유제니의 개인 응접실에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에 아주 만족해하고 있었다. 아마 번즈 백작도 여기는 못 들어오지 않았을까.

“뭐가요?”

사람들을 상대하고 나면 늘 그렇듯, 유제니는 지쳐서 긴 의자에 쓰러지듯 앉으며 물었다.

“아까 절 도와주신 거요.”

도와준 거? 유제니가 못 알아듣는 듯하자 클레어가 다시 말했다.

“하몬 양이요. 결혼을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거냐고 물어본 거요.”

아, 그거. 피곤해 죽겠다. 유제니는 축 늘어진 몸을 억지로 바로 세웠다. 그사이에, 앤이 그녀를 위해 진하게 내린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고마워. 유제니는 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클레어에게 말했다.

“아니에요. 내가 미안하죠.”

클레어는 그녀의 손님이다. 그런 일을 당하게 해서는 안 됐다. 유제니는 차로 입 안을 헹군 뒤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하몬 가에는 내가 말해 둘게요.”

“괜찮습니다.”

유제니가 사과할 줄은 몰랐다. 클레어는 약간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하몬 양의 질문이 조금 아프기는 했다. 기사단의 기사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들었을 때는 괜찮았는데.

그녀는 유제니를 따라 찻잔을 들어 올렸다. 티 파티에서 달콤한 음식을 많이 먹어서 진하게 내린 차가 그녀의 입 안을 헹궈 주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 데 익숙해요.”

클레어는 그렇게 말하고 괜찮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진짜로 괜찮다. 그녀가 기사가 되겠다고 말한 순간부터 그녀의 뒤에 꼬리표처럼 달라붙어 온 질문이다. 여기사를 누가 데려가겠냐는.

대부분이 빈정거림이었고 때로는 도움이 안 되는 걱정이기도 했다. 가끔은 진지하게 제안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변경의 늙은 귀족이라면 그녀와 결혼하지 않겠냐는.

“전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유제니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뭘 안 그랬으면 좋겠냐는 표정을 짓는 클레어에게 말을 이었다.

“익숙해지는 거요. 그런 무례에 익숙해지지 마세요.”

그런 생각은 안 해 봤다. 클레어의 표정이 멍해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람들은 안 바뀌잖아요, 그냥 제가 익숙해지면.”

“클레어.”

유제니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이런 일은 흔하지 않다. 남의 말을 자르는 건 무례한 행동이니까.

클레어는 유제니가 화가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가 왜 화난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당신은 바뀌었잖아요. 그런 말을 들을 걸 알면서 기사가 되기로 했고, 기사가 됐죠.”

그랬다.

하지만 사람들이 바뀔까. 클레어는 회의적이었다. 그녀는 잠시 유제니를 바라봤다. 그리고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사람이 바뀐다는 걸 믿으세요?”

안 믿는다. 유제니는 그렇게 말하려다 멈췄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눈앞에 인생을 바꾼 클레어가 있다.

유제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클레어는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꿈에서 당신은 안 믿었거든요.”

꿈의 내가 그런 것도 이야기했어? 유제니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클레어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안 믿어요.”

안 믿는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사실, 그게 당연한 거다.

평생을 이렇게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라니. 어려운 일이다. 유제니는 클레어에게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죠. 당신과 로렌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유제니도. 클레어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그렇다면 제가 무례를 참지 않으면 사람들이 바뀔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오, 아니에요.”

고작 그 정도로 사람들이 바뀔 리 없다. 유제니는 클레어의 질문이 재미있어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할까 봐 재빨리 설명했다.

“하지만 적어도 눈치는 보겠죠. 당신을 그렇게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당신에게 조심하려는 사람이 생길 거잖아요?”

클레어가 무례를 당연하게 여긴다면, 그녀에게 무례한 사람들이 늘어날 거다. 하지만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녀에게 예의를 지키는 사람이 늘어나겠지.

“꿈에서 내가 당신을 많이 좋아했나 봐요.”

유제니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사람이 변하는 걸 믿지 않는다는 말을 남에게 쉽게 하지 않는다. 너무 비관적으로 보이니까.

그리고 비관적인 사람은 사람들이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긍정적인 사람이 좋은 건 어디나 마찬가지니까.

다음 순간, 유제니는 클레어의 표정을 보고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클레어는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왜 충격을 받은 거지?

“왜 그래요?”

유제니의 질문에 클레어는 눈을 깜빡였다. 조금 눈물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잘, 잘 모르겠어요. 그분이, 당신이 절 좋아했을까요?”

이상한 질문이었지만 유제니는 클레어가 진심으로 묻는 거라는 걸 알았다. 꿈의 내가 클레어를 좋아했겠냐고? 그건 그녀도 모르겠다. 지금의 유제니는 꿈의 유제니가 아니니까.

하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알 수 있다. 유제니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의 저는 당신이 좋아요. 그러니 꿈속의 제가 지금의 저와 같은 사람이라면 당신을 좋아할 거예요.”

“하지만, 꿈에서 저는 지금과 다른 사람이었는걸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클레어는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을 증오했다. 그녀를 암살하려 한 적도 있다.

그런 자신을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그냥 살려 둔 게 신기할 정도로.

“전 사람이 그렇게 쉽게 바뀐다고 생각 안 해요.”

유제니는 다시 한 번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클레어를 똑바로 바라봤다. 꿈속의 그녀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달라졌다는 건 달라지고 싶어 했다는 뜻이다. 꿈에서의 클레어가 어떤 사람이고 무슨 짓을 했든지 간에 후회했다는 뜻이다.

“지금의 당신과 꿈의 당신이 다르다고 해도 같은 부분이 있을 거예요. 아주 좋은 부분이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아주 좋은 부분. 그것만은 사람이 어떻게 변해도 바뀌지 않는다. 성실함, 긍정적인 마음, 희망 같은 것들.

“내가 본 걸 꿈의 나도 봤다면 당신을 좋아했을 거예요.”

유제니는 차를 홀짝이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클레어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내가 봤을까요?”

봤을 거다. 클레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콧날을 따라 눈물이 굴러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은 봤을 거다. 그런 사람이니까. 최악을 상정하고 계획을 세우지만,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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