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33 – 2
화장실에 다녀오느라 자리를 비웠던 클레어가 응접실로 돌아온 건 그쯤이었다. 그녀는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던 떠나기 전과 다르게 사람들의 관심이 한쪽에 집중된 것을 깨닫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가 사람들의 관심이 그녀의 자리로 향한 것을 알았다. 정확하게는 그녀의 자리에 앉아 있는 올리버 비스컨에게.
“크흠.”
이럴 때는 자리를 비키라고 하는 게 아니라 살짝 눈치만 주는 게 예의 바른 행동이다. 그리고 클레어는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올리버의 근처로 가서 가볍게 헛기침을 했으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웃으며 떠드는 올리버는 클레어의 기침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녀가 다시 헛기침을 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가장 안쪽에 앉아 있던 유제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자, 이제 그만 비스컨 남작을 놓아줄까요?”
사람들에게 올리버를 놔주라고 말했지만, 올리버에게 하는 말이다. 이제 그만 가 달라고.
하지만 응접실 안에서 안 된다는 한탄이 흘러나왔다. 대부분 초대해 달라고 부탁해서 참석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비스컨 남작이 인기가 많긴 하군. 클레어는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깨달았다. 올리버 비스컨은 사교계에서 상당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꿈에서도 그러긴 했다. 하지만 클레어가 체감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녀가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의 말동무였기 때문이겠지. 꿈에서 대외적으로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과 비스컨 백작은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까.
“더 있다가 가세요, 남작님.”
올리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손님들이 아쉽다는 듯 부탁해 왔다. 물론 올리버는 어서 꺼지라는 누이의 눈빛을 보고 난 뒤였다.
뭐든 적당히 해야 한다. 그는 여기까지가 유제니가 웃으면서 넘길 수 있는 수준이라는 걸 알았다. 그보다 나이도 어리고 훨씬 약하지만, 유제니는 오라버니의 피를 말리는 법을 아주 잘 알았다. 새벽에 술에 취해 몰래 들어왔는데 침대에 두꺼비나 커다란 벌레가 있는 건 사양이다.
“그만 가 봐야죠. 자리의 주인도 돌아오셨으니.”
그제야 사람들의 시선이 클레어에게 향했다. 그중에는 그 자리가 클레어의 자리라는 것을 몰랐던 사람도 있었다. 빈자리가 있었고 올리버를 붙잡고 싶으니 앉으라고 했던 거다.
“죄송합니다.”
올리버는 자리에서 일어나 클레어에게 앉으라고 손짓하며 정중하게 사과했다. 일은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했다. 사람들의 아쉬운 함성을 뒤로하고 올리버가 응접실에서 떠났으니까.
하지만 한 번 등장한 인기인의 영향력은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대화는 그대로 올리버가 왜 결혼은커녕 약혼하지 않는지로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비스컨 남작님은 약혼을 안 하셨죠?”
“인기가 많으실 것 같은데요.”
“말해 무엇해요? 저도 비스컨 남작님을 참 좋아했는데.”
“어머, 린더 양. 거스 경이 들으면 섭섭하겠어요.”
“미남을 좋아하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응접실 안에 다시 웃음이 터졌다. 말은 그렇게 해도 린더 양과 거스 경은 사이가 좋다. 유제니는 얼마 전에 린더 양과 거스 경이 다정하게 서로를 끌어안고 공원을 산책하던 것을 떠올리며 웃었다.
“진짜로 왜 약혼을 안 한 거예요?”
사람들의 질문이 유제니에게 향했다. 유제니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찻잔을 들어 올렸다. 올리버가 왜 약혼을 안 하냐고? 그녀도 모른다.
“뭔가 이유가 있겠죠.”
재빨리 리사가 나섰다. 그녀의 사촌 중에도 올리버 같은 남자가 있다. 나이가 차도 결혼 생각이 없어 보이더니 독신 선언을 했다. 물론, 리사의 사촌은 올리버처럼 잘생기지는 않았다.
“결혼에 뜻이 없는 건 아니겠죠?”
이어진 다른 손님의 질문에 유제니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건 아닐 거다. 그녀가 어닝과 약혼했을 때 올리버와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올리버는 확실하게 결혼 생각이 있었다. 비스컨 백작이 될 사람이니 결혼해서 후계자를 남겨야 한다고 했었지.
물론 유제니도 그러길 바란다. 비스컨 가는 유서 깊은 가문이고 이 가문에 시집온 여자가 비스컨 가문의 후계자를 낳아 주길 바란다.
하지만 동시에 동생으로서 그녀는 올리버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길 바라기도 했다. 그녀가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는 남자를 만나 똑같이 사랑받고 존중받길 바라는 것처럼 올리버도 그러길 바란다.
“그건 아니에요.”
그때, 대답이 유제니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니라고? 응접실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대답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차를 홀짝이던 유제니의 시선도.
“비스컨 남작님과 이야기를 해 봤나 보군요?”
“결혼 이야기까지 나눴어요?”
사람들의 질문에 클레어의 얼굴에 당황이 떠올랐다. 왜 그랬을까. 지금까지 비스컨 남작을 잘 멀리하고 있었는데.
클레어는 궁금하다는 사람들의 시선보다 유제니의 시선에 더 당황하며 말했다.
“아뇨, 그게 아니라….”
“그러고 보니 비스컨 남작이 납치를 당했을 때 라넌 경이 구해 줬다면서요?”
누군가의 질문으로 순식간에 사람들의 관심은 클레어의 검술 실력으로 넘어갔다. 구해 준 건 아니다. 그녀는 놀라서 정정했다.
“오, 아니에요. 저는 도왔을 뿐이에요.”
“하지만 소문에는 비스컨 남작을 납치한 기사가 어떤 여자에게 쓰러졌다는데요?”
기사를 쓰러트린 여자. 그 사실은 올리버를 구한 건 클레어라는 소문이 나기에 충분했다. 물론 그게 사실인지 비스컨 가에 확인하려는 사람도 없었다.
어느 누가 유제니 비스컨이 기사를 이길 정도의 실력자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그건….”
내가 아니다. 클레어는 그렇게 말하려다가 멈췄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번즈 백작이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올리버를 구한 여자가 클레어인 걸로 치자고.
그때는, 유제니의 공을 가로채는 느낌이라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알겠다. 그렇게 해야 사람들의 이런 관심에서 유제니를 보호할 수 있는 거다.
“검술 실력이 대단하다면서요?”
다행히 그녀가 거짓말을 하기 전에 다른 사람이 물었다. 클레어가 바뀐 주제에 대답하려는데 또 다른 사람이 물었다.
“검은 늑대 기사단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면서요?”
그건 또 어떻게 아는 걸까. 놀란 클레어가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에 또 다른 사람이 질문을 던졌다.
“검은 늑대로 갈 거예요? 거기가 흰 사자보다 더 낫다던데요?”
“그런 건 아니에요.”
클레어를 대신해서 대답한 건 유제니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더 낫고 말고 할 게 없죠. 검은 늑대는 국왕 전하를 지키는 곳이고 흰 사자는 왕족을 지키는 곳이니까요.”
“하지만 검은 늑대 쪽의 실력이 더 좋다던데요?”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하지만 유제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검은 늑대를 선호하는 기사가 더 많은 것뿐이다.
“국왕 전하의 호위 기사단이니까 다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흰 사자는 다음 국왕 폐하가 되실 왕자 전하도 지키는걸요.”
게다가 왕 한 명을 지켜야 하는 검은 늑대와 왕족 모두를 지켜야 하는 흰 사자의 실력이 그렇게 눈에 띄게 차이가 날 리가 없다. 그게 유제니의 생각이었다.
“맞아요. 더 낫고 말고는 없어요. 그래서 그 제의를 거절했고요.”
이어서 정신을 차린 클레어가 입을 열었다. 더 낫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그녀에게는 검은 늑대보다 흰 사자가 더 나았다.
“거절했어요?”
“어머, 세상에.”
검은 늑대의 스카우트를 거절했다는 말에 응접실에 놀랍다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당연히 클레어가 스카우트를 받아들일 줄 알았던 거다.
클레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전 흰 사자가, 음, 좋아요. 단장님도 아주 훌륭하신 분이고요.”
여기서 진심인 단어는 흰 사자밖에 없지만, 클레어는 개의치 않았다. 그러자 다시 한 번 사람들의 감탄이 흘러나왔다.
“세상에, 대단하네요.”
“멋져요, 라넌 경.”
“의리 있네요.”
순식간에 사람들의 분위기가 클레어에게 굉장히 우호적으로 변했다. 그녀에게 존경스럽다는 표정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고 순수하게 감탄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 저쪽 끝에서 누군가가 날카롭게 물었다.
“설마 계속 기사단에 있을 건 아니죠?”
하몬 양이었다. 클레어는 그녀가 왜 자신에게 적대적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계속 있고 싶은데요.”
“결혼은요?”
마치 따지는 듯한 베라의 말투에 사람들의 시선이 부딪쳤다. 평민도 아니고 귀족 출신인 라넌 양이 기사가 됐다는 건 놀라운 일이긴 한다.
그녀처럼 귀족 출신이라면 대부분 결혼을 선택하니까.
물론 기사가 됐다고 해서 결혼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기사인 여자를 부인으로 받아들일 남자가 있을까.
사람들의 머릿속에 그런 의문이 떠올라 있었다. 클레어 역시 그걸 잘 알았다. 나이 든 부인들은 그녀를 볼 때면 어서 빨리 기사단에서 나와 괜찮은 혼처를 찾으라고 조언 아닌 조언을 하곤 했으니까.
“생각 없어요.”
“뭐라고요?”
놀란 목소리는 하몬 양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왔다. 결혼 생각이 없다고? 놀란 사람들에게 쐐기를 박듯, 클레어가 다시 말했다.
“네, 생각 없어요. 기사로 사는 거로 충분해요.”
그녀는 이미 한 번 결혼을 해 봤다. 꿈이었지만.
끔찍했다. 어쩌면 유제니 말대로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남자와 결혼한다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클레어는 꿈에서 경험한 것만으로 이미 충분하다고 느꼈다.
“못하는 게 아니고요?”
그때, 다시 하몬 양이 날카롭게 물었다. 그 덕에 클레어의 말을 듣고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대화가 딱 끊겼다.
응접실 안에 있는 사람 중에도 클레어가 핑계를 대는 거로 생각하는 사람은 있었다. 기사인 여자를 누가 데려가려 한단 말인가.
그러니 클레어는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생각을 하는 것과 그 생각을 입 밖에 내뱉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건….”
생각도 안 해 봤다. 할 생각이 없으니까. 클레어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못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