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32 – 5
“뭐?”
그게 무슨 소리냐는 신음이 메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왜 후작을 그냥 두냐고? 그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그녀의 표정에 엘리엇은 피식 웃었다.
“그만 없어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잖아.”
말도 안 된다. 그렇게 말하려고 입을 연 메리는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그랬다.
놀랍게도 번즈 백작의 말이 맞다. 핸더슨 후작만 사라지면 이 멍청한 문제는 해결된다.
그녀가 이해하는 듯하자 엘리엇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설령 내가 내 권리를 주장한다 해도.”
거기까지 말한 엘리엇은 주장할 생각이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정말로 핸더슨 후작가를 차지할 생각이 없었다.
번즈 백작보다 핸더슨 후작인 쪽이 유제니의 마음을 얻기 쉽다면 하겠지만 그녀가 말하지 않았나. 그가 엘리엇이라 좋은 거지 번즈 백작이냐 핸더슨 후작이냐는 상관없다고.
그 생각을 하자 다시 엘리엇의 입꼬리가 휘어졌다. 그는 재빨리 표정을 관리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아들이라는 걸 증언해 줄 사람이 없다면 소용이 없어.”
“그건….”
엄밀히 말하면 그렇지 않다. 아닌가?
번즈 백작이 핸더슨 후작의 사생아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핸더슨 후작과 후작 부인, 그리고 번즈 백작과 백작의 어머니뿐이다.
메리의 머리가 빠르게 돌았다. 그녀는 엘리엇을 임신한 그의 어머니를 이 저택에서 내보내던 때를 기억한다. 놀랍게도 그녀가 나가라고 한 게 아니었다.
“네 모친은….”
어떻게 됐냐는 질문에 엘리엇은 픽 웃었다. 죽었다. 아주 예전에. 그에게는 까마득하게 먼 옛날의 일이다.
“돌아가셨네.”
설령 엘리엇의 어머니가 죽지 않았다 해도 그녀 역시 후작가의 재산에는 관심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죽기 전까지 엘리엇의 아버지가 핸더슨 후작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으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엘리엇은 자신의 아버지가 붉은 산의 마물을 퇴치하기 위해 고용된 용병인 줄 알고 자랐다. 거기서 마물을 퇴치하다 사망했다고,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건 꽤 괜찮은 거짓말이었다. 어린 엘리엇에게 아버지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 줄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자네가 후작의 자식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자네뿐인 건가?”
핸더슨 후작 부인의 질문에 엘리엇의 입술이 비틀렸다. 그렇다. 그의 어머니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아마 상황만 괜찮았다면 엘리엇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허리에 손을 얹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아버지의 정체를 알려 준 이유는 간단했다.
“내 어머니가 사망하기 전까지, 이 집에는 후계자가 없었거든.”
그제야 메리는 도와달라던 엘리엇의 모친에게 돈을 건네주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때까지, 그리고 그 뒤로도 메리를 찾아온 여자들은 몇 명 더 있었다. 하지만 후작에게서 도망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한 여자는 엘리엇의 어머니뿐이었다.
“그래.”
메리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내가 그랬지. 내가 자식을 낳지 못하면 배 속의 아이가 후계자가 될 수도 있다고.”
솔직히 말하면 그녀도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말을 했을 때의 기분은 생생하게 떠올랐다. 메리의 눈앞에서 이 집을 떠날 수 있게, 핸더슨 후작에게서 도망칠 수 있게 도와달라던 여자의 모습과 자신이 겹쳐 보였다.
그녀도 도망치고 싶었다. 이 끔찍한 저택에서. 그리고 끔찍한 핸더슨 후작에게서.
하지만 메리는 핸더슨 후작 부인이고 핸더슨 후작가를 관리하고 후계자를 낳아 교육할 의무가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내 어머니도 관심이 없었어.”
엘리엇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녀의 어머니도 핸더슨 후작가를 찾아가서 후계자가 되라고 알려 준 게 아니었다. 그녀는 핸더슨 후작이 얼마나 끔찍한 사람이었는지를 알려 줬을 뿐이다.
혹시라도 핸더슨 후작 부부가 찾아온다면 엘리엇이 도망칠 수 있도록.
솔직히 말하면 엘리엇은 좀 궁금하긴 했다. 핸더슨 후작 부인이 이 가문을 굳이 지키려고 애를 쓰는 게.
하지만 그건 그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면 모르는 감정일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떠올랐다. 그녀는 비스컨 백작가를 지키기 위해 말 그대로 안간힘을 썼다.
“나는 가문에 관심 없어. 당신이 애원한다 해도 이런 가문 따위 필요 없네. 하지만 당신은 날 믿지 않겠지.”
거기까지 말한 엘리엇의 시선이 다시 유제니를 향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했는지 유제니는 마차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있었다.
엘리엇은 인상을 쓰며 위험하다고 손짓했다. 그의 몸집으로는 빠져나오기 어렵지만, 그보다 훨씬 작은 유제니라면 저 창문으로 쉽게 굴러떨어질 수 있다.
“후작의 사라지는 건 가장 확실한 해결법이겠지.”
이어진 엘리엇의 말에 메리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관심 없다고?”
정말? 핸더슨 후작가는 그녀가 일생의 반을 바쳐 지키고 일궈 온 집안이다.
그녀는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후작보다 자신이 핸더슨 가에 더 일조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런 가문을 그녀가 낳은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다.
엘리엇은 처음으로 메리를 보고 웃었다. 반 정도는 비웃음이었지만 어쨌든 미소이긴 했다. 그는 유제니를 더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서 약간 빠르게 말했다.
“내게 이 집안은 그 정도의 가치가 없어.”
그가 핸더슨 후작의 인정을 받아 후계자가 된다면 후작 부인은 그를 증오할 것이다. 그리고 그 증오는 유제니를 향하겠지.
결국 일이 커진다. 유제니를 보호하기 위해서 엘리엇은 후작 부인과 그 아들까지 처리해야 한다. 후작은 뭐, 겸사겸사 처리할 수도 있고.
그가 후작가의 후계자가 된 뒤, 후작 부인과 그 아들이 사망하면 결국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될 것이다. 그건 또다시 유제니를 피곤하게 만들 테고.
“나한테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당연하게도 메리는 엘리엇의 의도를 의심했다. 그가 아무리 후작가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그녀의 질문에 엘리엇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럼 믿지 말던가. 그렇게 말하고 떠나 버리고 싶지만, 그는 유제니가 바라는 게 핸더슨 후작 부인과 그가 부딪치지 않는 것임을 안다. 그리고 엘리엇은 유제니가 바라는 거라면 그게 이 세상의 멸망이라고 해도 이뤄 줄 용의가 있다.
“믿고 싶지 않다면 믿을 필요 없어.”
엘리엇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핸더슨 후작 부인이 꼭 그에게 호의를 가질 필요는 없다. 세상은 서로 적의를 가지고 있더라도 이해관계만 맞으면 적당히 지낼 수 있으니까.
핸더슨 후작 부인과 번즈 백작은 그런 관계에 가깝다. 서로를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핸더슨 후작이 골칫거리라는 점에서는 이해관계가 맞는다.
“하지만 당신에게도 있잖아. 누군가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건들면 세상 끝까지 쫓아가서 후회하게 만들어 줄 존재가.”
번즈 백작의 말에 메리는 아들을 떠올렸다. 어렵게 얻은 귀한 아들이다. 심장에 문제가 있어서 성년까지 못 살 수도 있다고 한.
누군가가 그녀의 아들을 건든다면, 번즈 백작의 말대로 머리카락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그녀는 그 사람을 세상 끝까지 쫓아갈 것이다. 그리고 아들 앞에서 무릎 꿇고 애원하게 만들 것이다.
“그게 레이디 비스컨이라고?”
메리는 그렇게 물으며 유제니를 돌아보았다. 유제니 비스컨. 그리 잘 아는 아가씨는 아니지만, 예의 바르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들었다.
그렇게 알고 있으니 오늘의 방문도 허락한 거다.
그녀가 다시 엘리엇을 돌아보자 그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에게 백작 부인보다는 후작 부인 자리를 주고 싶지 않나?”
그러자 엘리엇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그건 핸더슨 후작 부인 같은 사람들이나 할 생각이다. 유제니는 그런 걸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더 나은 지위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기도 한다. 엘리엇은 친절하게 말했다.
“나는 그녀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어떤 시기나 고난 없이 행복하길 바라.”
믿을 수 없는 대답에 메리의 눈이 엘리엇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 대답은 엘리엇이 핸더슨 후작가에 관심이 없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어 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의미를 내포하기도 했다.
“네가 더 이상 레이디 비스컨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 아들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거군?”
꽤 날카로운 지적에 엘리엇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말도 안 되는 지적이지만 동시에 말이 된다. 그가 핸더슨 후작가에 관심 없는 이유가 오로지 유제니의 평안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말이다.
하지만 엘리엇은 유제니가 없었다면 핸더슨 후작은커녕 귀족 작위에 관심이 없었을 거다. 아니, 발시안에 관심이 없었겠지.
어차피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핸더슨 후작 부인은 엘리엇을 절대 믿지 않을 것이다. 아들의 안전이 걸려 있으니까.
엘리엇은 한숨을 내쉬고 자세를 고쳤다. 그리고 마차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렇다면 절대로 레이디 비스컨을 건들면 안 된다는 걸 알겠군.”
만약 레이디 비스컨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엘리엇이 이 가문을 집어삼키겠다는 일종의 협박이었다. 그 말을 듣자 메리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목을 감쌌다.
오싹한 말 때문에 소름이 돋아 있었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그 말은 메리의 입에서 끝까지 흘러나오지 않았다. 엘리엇의 말대로 이 모든 일은 후작이 사라지면 해결된다. 후작만 없다면 메리의 아들이 죽어도 엘리엇은 핸더슨 후작이 될 수 없으니까.
동시에 그녀는 절대로 레이디 비스컨을 건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즈 백작은 그녀의 아들과 레이디 비스컨이 같다고 말했지만, 전혀 같지 않았다.
메리는 아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아들이 건강해지기를, 훌륭한 성인이 되어 핸더슨 후작이 되기를 바란다. 누구보다 멋진 사내가 되어 훌륭하게 이 가문을 이끌고 괜찮은 귀족 아가씨를 만나 자식까지 낳기를 바랐다.
그녀가 낳은 아들이 누구보다 훌륭한 후작이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엘리엇이 유제니에게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그는 그저 그녀가 아무 고난 없이 그녀 자신으로서 행복하길 바랄 뿐이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이 누군가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사랑할 수도 있나?
“무슨 이야기를 했어요?”
엘리엇이 마차에 올라타자 유제니가 물었다. 그의 무게 때문에 마차가 약간 흔들려서 그녀는 창틀을 붙잡아야 했다.
“별말 안 했습니다. 저는 작위에 관심이 없고 후작 부인의 아들이 후작이 되길 바란다고 했죠.”
넓게 보면 그런 비슷한 말을 하긴 했다. 그러니 거짓말은 아니다. 엘리엇은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곧이어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도 서 있네. 유제니는 저택 앞에 서서 떠나는 마차를 지켜보는 핸더슨 후작 부인을 바라보다가 엘리엇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질리지 않는다는 듯이.
“후작 부인의 아들이요.”
“네.”
“당신 꿈에서 후작이 됐나요?”
핸더슨 후작 부인의 아들이 살아남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엘리엇은 후작이 됐으면 좋겠다는 표정의 유제니를 보고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