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1화 (146/239)

151화. 32 – 4

유제니의 생각은 정확했다. 핸더슨 후작과 후작 부인의 생각은 달랐다. 둘 중 엘리엇을 먼저 알아본 건 후작 부인인 메리였다. 그녀는 모른 척했고 뒤늦게 엘리엇을 알아본 핸더슨 후작은 딴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마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어린 아들의 침실에서 아들에게 책을 읽어 주던 메리는 집사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집에 손님을 초대하기보다는 자신이 방문하는 편이다. 이 집이 소란스러우면 아들이 편히 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책을 아들의 침대에 놓아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들의 이마를 한 번 쓸어 준 뒤 방을 나섰다.

무슨 일일까. 레이디 비스컨으로부터 방문하고 싶다는 편지를 받았을 때부터 메리는 번즈 백작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그녀가 번즈 백작을 고발한다는 건 사교계에 소문이 퍼졌으니까.

하지만 번즈 백작이 아니라 레이디 비스컨이 편지를 보낼 줄은 몰랐다. 번즈 백작이라면 거절했을 테지만 레이디 비스컨의 방문을 이유 없이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그녀의 편지는 아무 정중했고 사려 깊기까지 했다. 묻고 싶은 것과 제안하고 싶은 게 있으니 만날 수 있겠냐는 편지에 그만 허락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레이디 비스컨.”

메리는 응접실로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보이는 남자를 무시하고 레이디 비스컨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편지에 적은 대로 레이디 비스컨은 번즈 백작과 함께 와 있었다.

레이디 비스컨과 번즈 백작이 약혼했던가? 제일 먼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메리는 두 사람이 약혼했다는 소식은 못 들었다.

아마 두 사람이 약혼한다면 그녀의 남편이 제일 먼저 신이 나서 떠벌렸을 거다. 그는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아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작위를 얻고 유서 깊은 백작가의 아가씨에게 구혼 중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워 어쩔 줄 몰랐으니까.

“후작 부인.”

유제니와 엘리엇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메리를 맞이했다. 그녀는 두 사람에게 앉으라고 손짓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약간 냉담하게 말했다.

“두 사람이 가깝다는 말은 들었어요.”

방문을 허락하긴 했지만 반기지는 않는다는 게 확실한 태도에 유제니와 엘리엇은 입을 다물었다. 곧이어 하인이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유제니는 하인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뒤 찻잔을 들었다.

보통이라면 안부를 묻고 이런저런 잡다한 이야기로 시작하기 마련이다. 그게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 주니까.

하지만 핸더슨 후작 부인은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유제니는 엘리엇을 한 번 쳐다보고 그가 말없이 차를 마시는 것을 확인했다.

“후작 부인께서 번즈 백작을 고발하려 한다고 들었어요.”

결국, 유제니는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후작 부인은 유제니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리고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래요. 그에게 귀족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말리려는 거라면 소용이 없다는 걸 먼저 알려 주죠.”

유제니는 후작 부인이 엘리엇을 완전히 적으로 판단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기야 아들을 밀어내고 후작가를 차지하려 할 수도 있는 자다. 메리에게는 엘리엇의 존재 자체가 적이다.

“저도 이 자리에 있습니다만.”

그때 엘리엇이 입을 열었다. 마치 다른 사람 일인 것처럼 차를 마시던 그의 발언에 유제니와 메리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요, 번즈 백작. 나는 당신에게 귀족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정확하게는 핸더슨 후작이 될 자격이겠죠.”

이번에는 유제니가 말했다. 메리는 깜짝 놀라서 유제니를 바라봤지만, 곧바로 엘리엇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비난조로 말했다.

“알고 있었군요?”

“비밀도 아니잖습니까.”

시큰둥한 엘리엇의 반응에 메리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녀는 못마땅하다는 듯 물었다.

“그래서 여기저기 말하고 다녀요? 뻔뻔하기도 하지.”

“레이디 비스컨이니까요.”

여전히 엘리엇은 메리의 감정과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유제니에게는 뭐든 말한다는 그의 태도가 메리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녀는 곧바로 공격의 화살을 유제니에게로 돌렸다.

“무례하군요, 레이디 비스컨. 이건 당신이 끼어들 문제가 아니에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놀랍게도 유제니는 메리의 비난에 순순히 수긍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끼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다른 경우라면 끼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끼어들었고요.”

메리의 말에 유제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끼어든 이유가 있다. 그녀는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엘리엇은 후작가에 아무 관심이 없어요.”

아주 잠깐, 응접실에 침묵이 흘렀다. 메리는 그게 진짜냐는 표정으로 엘리엇을 쳐다봤지만, 그의 표정에서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설령 그가 유제니의 말이 진짜라는 표정을 지었다 해도 달라진 것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그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해요?”

말도 안 된다는 메리의 말에 유제니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녀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다. 그녀가 몸이 약한 아들을 둔 후작 부인이라면 후작위에 관심 없다는 후작 사생아의 말을 믿을 리가 없다.

그래서 생각한 게 있다. 유제니는 엘리엇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신호를 받은 그가 입을 열었다.

“제 권리를 포기하죠.”

“권리?”

네게 무슨 권리가 있냐고 물으려던 메리는 잠시 멈칫했다. 권리라고? 엘리엇은 유제니를 한 번 쳐다보고 말했다.

“후작가에 대한 제가 가졌을지 모르는 모든 권리를 포기하겠습니다.”

“그게 뭔지 알고 하는 말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어본 메리의 시선이 곧 유제니를 향했다. 이 용병 나부랭이가 그게 뭔지 알 리가 없다. 안다면 레이디 비스컨이 알려 준 것이리라.

가졌을지 모르는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 유명한 말이다. 발시안의 동생이 한 말이기 때문이다.

요정이자 영웅 마고가 나라를 세우고 발시안이라 이름을 짓자 숨어 있던 발시안의 동생이 나타났다. 그리고 자신의 형이 드래곤을 쫓아내는 데 일조했으니 자신에게도 이 나라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했다.

당연하게도 마고는 그 주장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아무 권리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했고 선택권을 주었다. 영원히 대륙을 떠돌며 방랑자로 살 것인지, 발시안의 평범한 국민으로 살 것인지.

몇 번의 도전 끝에 발시안의 동생은 방금 엘리엇이 한 말을 마고에게 전했다.

내가 가졌을지 모르는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

발시안의 국민으로 받아 달라는 요청이었다.

“번즈 백작은 국왕 전하께 알현을 요청했어요. 그때 전하 앞에서 후작가에 대한 권리를 포기할 거고요.”

거기까지 말한 유제니는 메리를 똑바로 쳐다봤다. 단, 조건이 있다.

“고발을 멈추라는 거군요.”

메리는 금세 알아듣고 말했다. 그리고 신기하다는 듯 유제니를 쳐다보며 물었다.

“내가 거마로트 공작의 요청으로 고발을 했을 수도 있지 않나요?”

그럴 리가 없다. 유제니는 고개를 저었다.

“제 어머니는 저와 오라버니를 낳고 선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셨대요.”

뜬금없는 비스컨 백작 부인의 이야기가 나왔지만 메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이마리아는 자식이 생기자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저지른 나쁜 행동의 결과가 자식들에게 돌아올까 봐.

메리는 어렵게 아들을 낳았다. 그녀의 또래는 다들 이미 자식이 결혼했다. 빠른 사람은 벌써 손주를 본 사람도 있다.

어쩌면 그녀는 손주를 볼 때까지 살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아들이 성년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적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후작 부인은 비스컨 백작 부인의 생각에 공감했다. 그녀의 적이 곧 아들의 적이 되니까.

“엘리엇은 좋은 사람이에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죠.”

유제니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엇을 쳐다봤다. 그러자 메리의 눈에 놀라운 장면이 보였다. 주변에 관심이 없다는 듯 심드렁한 태도였던 번즈 백작이 레이디 비스컨에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메리는 그녀의 남편도 그랬다고 말하고 싶은 것을 눌러 참았다. 구혼 기간 동안에는 그녀의 남편도 그랬다. 하늘의 별도 따다 줄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결국은 눈앞에 배신의 증거가 있다. 그것도 그녀의 아들보다 더 건강한 모습으로.

“생각해 보죠.”

메리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레이디 비스컨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괜한 적을 만들 필요는 없다. 하지만 번즈 백작이 아직 적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국왕 전하 앞에서는 모든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말해도 그가 그녀의 아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게다가 거마로트 공작 부인의 요청이 없다 해도 그녀는 엘리엇이 싫었다. 싫어해야 할 이유가 아주 많았다.

“알겠습니다.”

이쪽의 패는 다 보여 줬다. 유제니는 메리가 그만 떠나 달라고 말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건이 끝났다면 떠나는 게 예의다.

“잠시 마차에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핸더슨 후작 부인과 함께 저택의 입구에 도착한 엘리엇이 유제니에게 말했다. 유제니는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로 향했다.

“날 협박하려는 거라면….”

번즈 백작이 레이디 비스컨을 먼저 보내고 자신을 향해 돌아서자 메리가 말했다. 그를 고발한다고 하자 그녀의 친구들이 걱정한 건 그거였다.

번즈 백작은 용병 출신이다. 천한 출신의 그가 그녀에게 위해를 끼치면 어쩌냐고 했다. 물론 메리도 같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핸더슨 후작 부인이다. 만약 번즈 백작이 그녀와 그녀의 아들을 협박한다면 그것 역시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날 믿지 않아.”

엘리엇은 경고를 하려는 듯한 핸더슨 후작 부인을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와 다른 태도에 메리의 눈이 커졌다.

아까 전의 관심 없는 듯한 무심한 태도도, 레이디 비스컨을 향한 다정한 태도와도 달랐다. 메리가 뒤로 한 발짝 주춤 물러난 순간, 번즈 백작이 고개를 휙 돌리더니 어딘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아들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주고 싶어 하지.”

유제니에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든 엘리엇이 다시 메리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마땅히 주어야 할 것. 메리는 번즈 백작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내가 궁금한 건.”

엘리엇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유제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말대로 마차에 올라탄 그녀는 창문을 통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핸더슨 부인이 그에게 무례하게 굴까 봐 걱정되는 거겠지. 엘리엇은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고 핸더슨 후작 부인에게 말했다.

“왜 후작을 그냥 두냐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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