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32 – 3
“허.”
힐데자르답군. 나는 반사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들고 뻔뻔하게 구는 게 어렸을 때와 똑같은 모양이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엘리엇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흠. 나는 그의 미간에 생긴 주름을 빤히 쳐다보다가 그의 눈과 눈이 마주치기 전에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알이 깨졌습니다.”
뭐라고? 나는 너무 놀라서 입을 딱 벌린 채 엘리엇을 쳐다봤다. 그는 들고 있던 찻잔을 기울여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괜, 괜찮아요?”
한참 뒤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엘리엇은 다시 나를 쳐다보고 물었다.
“누가요?”
그러게. 누구에게 물어본 걸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엇은 멀쩡하다. 그러니 그는 괜찮은 거겠지. 그렇다면 다아리브혼은? 눈앞에서 새끼를 잃은 그 용은 어떻게 됐을까.
“다아리브혼이요.”
내 질문에 엘리엇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약간 침울하게 말했다.
“두고 봐야죠.”
힐데자르의 안전은 그리 궁금하지 않다. 미안하지만 거마로트 공작 부부가 지금 엘리엇을 공격하는 건 자기 자식을 건드렸다는 이유잖아. 그렇다면 다아리브혼이 힐데자르의 목숨을 거뒀다 해도 그들은 할 말이 없어야 한다.
물론 그렇지 않을 테지만.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 나는 엘리엇에게 물었다. 나는 엘리엇에게 그래서 진짜로 어떻게 다아리브혼을 설득했는지 물어본 뒤였다.
그는 차와 함께 내온 복숭아 파이를 먹으며 가볍게 인상을 쓰더니 말했다.
“접견 신청을 해 놨습니다.”
“국왕 전하께요?”
엘리엇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생각대로 국왕 전하의 조율로 이 상황을 멈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마로트 공작은 국왕 전하의 삼촌이고 왕족으로 국왕 전하께 충성스럽다는 평이다.
하지만 공작 부인은 어떨까. 공작이 아버지 입장보다 국왕 전하의 신하 입장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해도 공작 부인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후작 부인은요?”
엘리엇이 잠시 멈칫했다. 그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그냥 둘 겁니다.”
“정말요?”
그러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엇을 쳐다봤다. 그리고 곧, 그가 왜 후작 부인을 그냥 두겠다고 하는지 깨달았다.
“꿈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군요?”
엘리엇이 고개를 번쩍 들고 나를 쳐다봤다. 퍽 놀란 모양이다.
클레어에게 들었다. 꿈에서도 그는 번즈 백작이었다고. 지금과 다른 이유였다. 사람들의 꿈에서 발시안은 분노한 용의 공격을 받고 왕족이 전부 사망하자 이웃 나라의 침략으로 서서히 몰락했다고 한다.
클레어가 말했다. 그 몰락을 늦춘 게 몇 명의 영웅이었다고. 그중 하나가 이웃 나라의 침략을 적은 수의 용병으로 막아 낸 엘리엇이었다고.
그는 그 공로로 백작이 되었다. 그리고 귀족들의 질투와 평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나는 잠시 엘리엇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핸더슨 후작과 닮았나? 잘 모르겠다. 큰 키나 검은 머리카락이 닮기는 했다. 하지만 핸더슨 후작보다 엘리엇이 훨씬 더 잘생겼다.
“핸더슨 후작이 아버지인 건 언제 알았어요?”
“제가 태어나는 데 일조한 사람이죠.”
내 질문에 엘리엇이 부드럽게 수정했다. 핸더슨 후작이 아버지라는 게 그리 좋지는 않은가 보다. 음, 나 같아도 그렇긴 하겠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말했다.
“핸더슨 후작이 당신이 태어나는 데 일조한 건 어떻게 알았어요?”
“어머니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만난 적은요?”
엘리엇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동시에 그의 눈이 날카롭게 가늘어졌다.
웃는 표정이지만 웃는 느낌이 아니었다. 그는 찻잔을 손안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지금은 만난 적 없습니다.”
꿈에서는 만난 적이 있다는 말인가 보다. 흐음.
좀 신기하네. 엘리엇은 핸더슨 후작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작 자신을 공격하는 핸더슨 후작 부인에게는 아무 감정이 없어 보였다.
“후작 부인이 싫거나 하진 않아요?”
“어째서 싫어해야 합니까?”
“지금 당신을 공격하는 건 그녀잖아요.”
정작 후작은 가만히 있다.
이 부분이 이상했다. 왜 후작 부인이 나서서 엘리엇을 공격하는 걸까. 후작 부인이 엘리엇이 후작의 사생아라는 걸 안다면 후작도 알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후작이 아니라 후작 부인이 나섰다. 그리고 후작은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다. 혹시 후작과 후작 부인의 의견이 갈린다는 뜻이 아닐까.
“저는 다아리브혼이 거마로트 백작에게 분노하는 걸 이해합니다. 동시에 거마로트 공작 부인이 제게 분노하는 것도 이해하죠.”
엘리엇이 천천히 말했다. 그는 장난감처럼 손안에 돌리던 찻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찻잔 안에는 차가 반쯤 차 있었는데 그가 손안에서 돌리는 동안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 올리버가 저런 짓을 한 적이 있는데 어머니께 그만두라는 꾸지람을 들은 뒤에도 몰래 하다가 엎은 적이 있다.
“후작 부인도 이해하는군요.”
“제가 아는 한 대부분의 어미는 자식을 보호하려 합니다.”
그는 대부분의 어미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부모가 아니라.
“후작이 될 생각은 없었어요?”
그러자 엘리엇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렇잖아. 번즈 백작가라는 신흥 백작 가문을 세우는 것보다 이미 존재하는 유서 깊은 후작가를 차지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신흥 가문은 처음부터 닦아 나가야 한다. 아무 틀도 규칙도 없는 집안을 하나부터 내 손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건 보람 있는 일이겠지만 그만큼 힘든 일이기도 하다.
“후작의 후계자를 처리하고요?”
엘리엇의 질문은 조금 섬뜩하게 들렸다. 물론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 나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듣기로 후작의 아들이….”
“몸이 약하죠. 오래 못 살 거라는 말이 있고요.”
그렇다. 리사에게 들었다. 후작의 후계자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침대에 누워 있었던 시간이 누워 있지 않은 시간보다 많다고 했다. 오죽하면 후작 부인보다 후작가의 주치의가 그 소년을 더 많이 봤다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그럴 생각 없습니다. 제게 별로 의미 있는 가문도 아니고요.”
진짜인 모양이다. 하긴. 이미 엘리엇은 백작이다. 후작 가문이 탐날 리가 없다.
아니, 보통 사람이라면 탐낼 가문이다. 후작가는 부유하고 유서 깊은 가문이니까. 엘리엇 핸더슨 후작과 엘리엇 번즈 백작은 후작과 백작이라는 차이가 아니라 가문의 영향력 때문에라도 차이가 있다.
한 가문이 여러 개의 작위를 가지고 있는 건 드물지도 않다. 우리 집만 해도 델베키쉬의 백작이자 컨서런트의 남작이니까.
“진짜요?”
나는 확인을 위해 물었다. 그러자 엘리엇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제가 핸더슨 후작이면 저와 결혼하실 겁니까?”
으음. 그런 공격은 반칙이다. 나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난 엘리엇이라는 사람이 좋은 거지 번즈 백작이 좋은 게 아니에요. 당신과 결혼하는 데 핸더슨 후작인지 번즈 백작인지는 상관없어요.”
귀족이긴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귀족이 아니라면 우리 집안에서 허락할 리가 없으니까. 나는 사랑의 도피 같은 책임감 없는 짓을 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엘리엇이 번즈 백작이 아니라 번즈 경이라고 해서 결혼하지 않을 생각도 없다. 나한테 중요한 건 상대방의 작위가 아니니까.
내가 배우자에게 원하는 게 뭘까. 그런 생각을 하며 엘리엇을 쳐다본 나는 놀라서 그대로 멈췄다.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좀 이상하네. 나는 엘리엇의 미소를 보며 생각했다. 방 안이 환해진 것 같은 건 내 착각인가?
“그렇군요.”
곧이어 엘리엇이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리고 다시 자세를 고치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저 역시 후작가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효과도 없었고요.”
“그렇다면….”
이렇게 하면 어떨까. 나는 생각하던 계획을 엘리엇에게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효과가 없었다고? 꼭 가져 본 것처럼 말한다.
나는 아주 잠깐 인상을 쓰고 엘리엇을 쳐다봤다. 하지만 무엇을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다. 클레어가 그랬다. 그는 꿈에서도 번즈 백작이었다고.
핸더슨 후작이나 번즈 후작이 아니었다. 지금과 똑같이 번즈 백작이었다. 꿈에서도 그는 핸더슨 후작가를 차지하려 한 적이 없다는 말이다.
“유제니?”
엘리엇이 왜 그러냐고 물었고 나는 정신을 차렸다. 아차, 후작 부인을 어떻게 할지 이야기하려던 참이었지.
“핸더슨 후작 부인을 만나요.”
“만나라고요?”
엘리엇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나는 만나서 어쩌자는 거냐고 묻는 듯한 그의 표정에 씩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후작가에 아무 관심이 없다는 걸 알리는 거죠.”
“그런 거로 후작 부인이 안심할까요?”
안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녀에게는 아들의 안전이 걸려 있는 일이니까.
“내 생각에는요.”
핸더슨 후작 부인이 엘리엇을 공격하는 건 그가 핸더슨 후작의 사생아이기 때문이다. 후작 부부의 후계자는 몸이 약하고.
어쩌면, 어쩌면 후작은 몸이 약한 아들보다 자기 힘으로 작위를 차지한 엘리엇이 더 마음에 든 건지도 모른다. 성인이 되기 어려울 거라는 아들을 버리고 엘리엇을 자기 후계자로 삼고 싶은 건지도 모르지.
“그럴 것 같습니까?”
엘리엇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무심하게 물었다. 놀라지도 않네. 나는 그를 따라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그를 따라 무심하게 말했다.
“한 번 자기 아들을 버린 아버지잖아요. 또 버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죠.”
차를 마시는 엘리엇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는 나를 힐끔 보더니, 찻잔에서 입술을 떼며 중얼거렸다.
“태어나는 데 일조한 작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