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32 – 1
사생아.
내가 그 단어를 제일 처음 본 건 어느 신문이었다. 아마 커런트의 속삭임이었겠지. 올리버는 어머니와 아버지께 그 단어의 뜻을 물었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의 서재 깊숙이 꽂혀 있는 사전을 이용했다.
내 판단이 옳았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올리버에게 그 단어를 어디서 봤는지 물었고 한동안 가십지를 읽지 못하게 하셨다. 덕분에 나도 한동안은 못 봤다.
그 뒤로도 사생아라는 단어를 실생활에서 보거나 들은 적은 없었다. 전부 신문이나 소설 같은 데였지.
“나 간다.”
멍하니 응접실에 앉아 있는데 올리버의 목소리가 들렸다. 노크도 안 하고 문을 연 모양이다. 내가 쳐다보지 않자 오라버니는 내게 다가와서 다시 말했다.
“유제니, 나 간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려.”
나는 멍한 채로 고개를 돌려 올리버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가 나를 향해 손을 들어 보이더니 손가락을 두 개 흔들며 말했다.
“내 손가락이 몇 개인지 보여?”
“올리버, 친구 중에 그, 누구더라? 던밀? 타밀?”
올리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는 내 맞은편 소파에 앉더니 말했다.
“아밀 랜더?”
“응. 그 사람 결혼했나?”
올리버는 이번에는 미간에 주름을 잡더니 내가 왜 그의 안부를 묻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 음. 약혼했지.”
“누구와?”
“어, 유제니. 네가 랜더 남작에게 마음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소개해 줄 걸 그랬다고 말할 기세라 나는 재빨리 말했다.
“아니, 랜더 남작한테 아무 관심 없어. 갑자기 궁금해졌을 뿐이야. 그 사람….”
그 사람? 올리버는 뭐가 궁금하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고 나는 어떻게 말해야 무례하지 않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랜더 가에서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궁금해서.”
내 말에 올리버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한 모양이다. 한숨을 내쉬더니 내게 물었다.
“랜더 남작 부부가 아밀을 어떻게 후계자로 삼았는지 궁금하다는 말이지?”
그렇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밀 랜더도 사생아라고 들었다. 아밀의 아버지인 랜더 남작은, 음. 별로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가 아니었다고 들었다.
그래. 랜더 남작 부부에게는 자식이 있었다. 아들이 둘이나.
아밀은 남작 부인의 자식 둘을 제치고 랜더 남작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 일로 사교계가 조금 소란스러웠었고.
“음, 너도 알지만 랜더 남작 부부의 자식들에게는 좀 문제가 있었잖아.”
문제라고? 나는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고 올리버는 손을 들어 보였다. 문제라니. 랜더 남작 부부의 첫째 아들은 좀 아픈 것뿐이다. 정신적으로.
그리고 둘째 아들은 수도원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래서 남작 부인이 아밀과 합의를 했다더라고.”
“합의?”
“자기 아들들을 죽을 때까지 보살펴 준다면 후계자로 삼는 데 동의하겠다고 했대.”
“랜더 남작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올리버가 어깨를 으쓱했다. 바보 같은 질문을 했네. 받아들였으니 아밀 랜더가 랜더 남작이 됐겠지. 나는 잠시 시선을 떨어트렸다가 말했다.
“두 사람 다 대단하네.”
“누구? 아밀이랑 랜더 남작 부인?”
“응. 둘 다 랜더 가문 따윈 망해 버리라고 생각할 법도 했잖아.”
나 같으면 그랬을 거다. 사망한 랜더 남작은 안팎으로 난폭했다고 들었다. 랜더 남작 부부의 첫째 아들이 아픈 게 랜더 남작 때문이 아니냐는 소문도 돌았을 정도로.
그런데 남작 부인은 그런 가문을 잇기 위해 남편이 만든 사생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뭐, 아밀한테도 나쁜 제안은 아니었으니까. 한순간에 남작 후계자가 된 거잖아.”
그건 그렇지. 나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엇에게도 그럴까? 번즈 백작이 아니라 핸더슨 후작이 되는 게?
“게다가 남작 부인이 아밀에게 꽤 잘해 줬대.”
“그래?”
“아밀이 아카데미에 갈 수 있게 소개장과 입학금을 내줬대.”
그래서 아밀도 남작 부인의 손을 잡았다는 말이다. 문득 랜더 남작이 생각났다. 몇 년 전에 사망한 그는 병으로 일 년 조금 넘게 병상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가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그를 돌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도.
착하게 살아야겠어. 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올리버에게 물었다.
“그럼 랜더 남작이 후계자가 될 수 있었던 건 남작 부인이 허락했기 때문인 거지?”
올리버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당연하지. 몰랐어?”
아니, 알았다. 후계자를 정하는 건 기본적으로 부부 모두의 허가가 필요하다. 올리버처럼 백작 부부의 자식이라면 어느 누구의 허가도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그가 다음 백작이 된다.
하지만 자식이 없다면? 두 사람의 합의하에 후계자를 결정하게 된다. 남편이 일방적으로 자기 사생아를 데려와서 후계자로 삼을 수 없다는 말이다.
즉, 핸더슨 후작이 엘리엇을 후계자로 삼고 싶어도 후작 부인이 거부한다면 소용없다. 그렇다면 대체 왜 핸더슨 후작 부인은 엘리엇을 그렇게까지 경계하는 걸까.
나는 앞에 올리버가 있다는 것도 잊고 생각에 잠겼다.
“무슨 일 있어?”
아차. 아직 올리버와 대화 중이었지. 나는 오라버니를 바라보고 다시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그리고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랜더 남작과 약혼한 분 말야. 잘 받아들였어?”
솔직히 말하면, 잘 못 받아들일 것도 없는 일이긴 하다. 어쨌든 랜더 남작은 남작이니까. 내가 궁금한 건 어머니의 반응이었다.
만약 내가 엘리엇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 그가 핸더슨 후작의 사생아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머니는 어떻게 반응하실까.
“음, 오히려 좋아했을걸?”
“좋아했다고?”
“원래 혼담이 오가고 있었거든. 그 동생 쪽하고.”
무슨 소린지 알겠다. 랜더 남작가는 처음엔 형을 뛰어넘어 동생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던 거다. 그래서 동생의 혼담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동생이 수도원으로 들어가 버린 거지.
“그래서 처음엔 형 쪽으로 다시 진행하려고 했는데, 그, 여자분이….”
“거부했다는 말이지?”
올리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된다. 나는 “흠”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사망한 랜더 남작의 큰아들은 나도 들어 본 적이 있다. 말을 타고 가다가 대로에서 갑자기 자기가 탄 말을 때려죽이려 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다행히 치안관이 개입했고 불쌍한 말은 살아서 도망쳤다.
“그러고 나서 남작 부인이 아밀을 찾았다는 거 같아.”
“대단한 분이네.”
남작 부인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이었을 것이다. 내가 한숨과 감탄을 이어서 내뱉자 올리버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남작 부인이잖아. 가문을 위해 최선을 다한 거지.”
그건 그렇다. 우리는, 그러니까 나는 그렇게 배우고 자랐다. 나는 백작가의 딸이고 언젠가 다른 집안의 안주인이 될 거라고.
어떤 집안의 안주인이 되든 그 집안을 위해 노력하고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
하지만.
“좀 불공평하네.”
나는 머리를 소파 등받이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뭐가?”
“남작 말야. 랜더 가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잖아.”
아밀 랜더 남작의 존재가 사망한 랜더 남작이 가문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하지만 남작 부인은 가문을 위해 아밀과 합의를 해야 했지.
좀 신경이 쓰였다. 남작 부인이 아니라 핸더슨 후작 부인이.
“핸더슨 남작이 아프다던데요.”
다음 날, 나는 그런트 저택의 다실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리사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핸더슨이라는 이름은 내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
“핸더슨 남작이 몇 살이죠? 원래 몸이 약하다고 들었는데.”
내 맞은편에서 리사의 티 파티에 초대된 에스마 양이 말했다. 원래 몸이 약했어? 나는 핸더슨 남작에 대해 떠올렸다. 잠깐, 핸더슨 남작이 몇 살이지?
최소한 나는 핸더슨 남작과 만난 적이 없다. 핸더슨 후작 부부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는 건 안다. 내가 만난 적이 없는 이유가 그가 사교계에 데뷔하지 않아서인지, 몸이 약해서 사교계에 얼굴을 비치지 않아서인지 모르겠네.
“심장에 문제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어머, 어쩌다가요?”
“원래 그렇다고 들었어요. 후작 부인이요. 그쪽 집에 심장 쪽 문제가 좀 있나 봐요.”
나는 사람들의 속삭임을 귀 기울여 들으며 가만히 있었다. 그렇다면 핸더슨 남작의 병은 유전인 모양이다. 후작 부인의 마음고생이 말이 아니었겠군.
“어머, 아들이 아프다는데 번즈 백작을 고발할 여유는 있나 보죠?”
그때, 바로 옆에서 날카로운 비난이 튀어나왔다. 나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가 그게 리사가 한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젠장.
곧바로 나는 리사가 날 위해 그렇게 말한 거라는 걸 깨달았다. 핸더슨 후작 부인의 이야기가 나온 이유가 그거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엘리엇의 소문.
사람들의 시선이 리사를 향했다가 옆자리에 앉아 있는 나를 향했다. 그러자 에스마 양이 용기 있게 물었다.
“소문이 사실인가요?”
무슨 소문이요? 나는 시치미를 떼려다가 말았다. 시치미 떼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지만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다.
“전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요?”
다시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나는 내 대답에 사람들의 반응이 갈리는 게 보면서 진짜는 어땠는지 엘리엇에게 묻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다.
진짜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제 엘리엇을 만났을 때는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못 했다. 중요한 건 진짜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가 아니라 엘리엇이 내게서 멀어지는 거였거든.
하지만 문득 궁금해졌다.
“사실일 수도 있잖아요?”
그때, 하몬 양이 저 끝에서 물었다. 저 사람, 요새 자주 보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 나라의 이름은 발시안이 아니라 다아리브혼이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