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7화 (142/239)

147화. 31 – 5

“제 집사에게 덩굴장미를 선물하려고 오신 겁니까?”

엘리엇의 투덜거림에 유제니가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아니다. 그녀는 별문제 없어 보이는 엘리엇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도움을 요청하러 왔죠.”

그러자 엘리엇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가 선물을 그가 아닌 집사에게 줬다는 이유로 못마땅해하던 그는 금세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하려던 거 말이에요.”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검술을 배우겠다던 계획이다. 정확히 말하면 위험한 순간에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거였다.

원래는 엘리엇의 집, 여기 번즈 저택에서 하려고 했다. 뒷마당도 있고 응접실도 있으니까. 하지만 엘리엇이 일방적으로 교제를 단절하는 바람에 비스컨 저택에서 하기로 했다.

“어머니가 아셨지 뭐예요.”

한숨을 내쉬는 유제니의 말에 엘리엇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건 처음부터 각오한 거 아니었나? 그래서 여기서 하려고 했다. 여의치 않은 사정으로 비스컨 저택에서 하게 되긴 했지만 비스컨 백작 부인이 유제니의 계획을 싫어할 거라는 건 둘 다 알았다.

“백작 부인께 말씀 안 드렸습니까?”

엘리엇의 질문에 유제니는 다시 한번 과도하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엇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채 물었다.

“혼날까 봐서요?”

“아니요. 모르고 계시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응접실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사이, 집사가 차와 복숭아 파이를 가지고 들어왔다. 유제니는 그녀의 앞에 차를 따른 집사가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했다.

“둘 다 올리진 않네요.”

엘리엇은 말없이 씩 웃었다. 그러자 유제니가 물었다.

“꿈에서 내가 같은 말을 한 적 있나 보죠?”

언제나 눈썹을 한쪽만 올린다고 말한 거였는데 엘리엇이 금세 알아들어서 하는 말이다.

“비슷한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죠.”

엘리엇은 그렇게 말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집사가 가장 좋은 찻잎을 내왔다. 좀 아쉬운 건 가장 좋은 찻잎을 내오느라 복숭아 파이와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유제니의 표정을 관찰했고 그녀가 복숭아 파이를 한 입 먹고 감탄하자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백작 부인께 가서 전부 제 잘못이라고 말씀드릴까요?”

유제니가 복숭아 파이를 몇 입 먹은 뒤에야 엘리엇이 물었다. 유제니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말했다.

“당신은 이미 날 도와주고 있어요.”

“제가요?”

이번에는 엘리엇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유제니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를 피해 여기 숨어 있는 거거든요.”

그제야 엘리엇은 무슨 일인지 깨달았다. 유제니는 그의 도움이 필요해서 온 게 아니다. 그냥 그를 만나러 온 거다. 도와달라고 한 건 그래야 그가 집 안으로 들일 거니까 한 핑계일 뿐이다.

젠장. 엘리엇이 한숨을 내쉬자 유제니가 말했다.

“엄밀히 말하면 어머니가 화가 난 데에는 당신 탓도 있으니까요. 날 도와줘야 해요.”

유제니의 억지에 엘리엇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녀의 거짓말에 맞춰 말했다.

“그럼요. 제가 장소를 바꾸지 않았다면 백작 부인이 화가 날 일이 없었을 테니까요.”

그러자 이번에는 유제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말없이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거짓말이에요.”

엘리엇은 유제니의 이런 점이 좋았다. 그가 아무 말 없이 웃자 유제니는 인상을 쓴 채 물었다.

“내가 억지를 부리는 걸 알았는데 왜 받아 줬어요?”

“그게 왜 억지입니까?”

엘리엇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되물었다. 그리고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당신이 하는 말과 행동 중에 억지라는 건 없습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원하는 게 있다면 가질 자격이 있습니다.”

생각하지 못한 말에 유제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반사적으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가리기 위해 찻잔을 입술에 대며 말했다.

“당신은 제 버릇을 망치고 있어요.”

“버릇이 나빠지는 게 뭐가 나쁩니까?”

엘리엇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나는 당신의 버릇이 얼마나 나쁘든지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걸 들어주기 위해 여기 있으니까요.”

그러기 위해 힘을 길렀다. 부를 축적했고 피곤할 걸 알면서 귀족이 됐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엘리엇은 유제니와 버릇이 나쁘다는 게 가장 맞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가 아는 한 가장 공정하고 옳은 일을 하려 하는 사람이다. 세상에 악당이 필요하다면 악당이 되는 것을 불사할 정도로.

“그리고.”

엘리엇은 유제니가 악당이 되어야 한다면 자신이 대신 악당이 될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가는 화살과 검을 모두 막을 것이다. 막을 수 없다면 대신 맞을 것이다.

“당신에게 버릇이 나쁘다는 말은 꽤 무례한 말이죠.”

엘리엇의 말에 유제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다가 곧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당신이 왜 나와 교제를 단절했는지 알아요.”

한동안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아서 당황했는데 지금은 안다. 유제니는 엘리엇의 끝내주게 잘생긴 얼굴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상한 소문 때문이라면….”

“사실입니다.”

뭐라고? 엘리엇의 말에 유제니의 말이 멈췄다. 그녀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일 대 일이네요.”

“뭐가 말입니까?”

“거짓말이요. 내가 한 번 했고 당신이 한 번 했죠.”

방금 소문이 사실이라는 엘리엇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말이다. 엘리엇은 부인하지 않았다. 유제니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했다.

“당신이 거마로트 백작을 살해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은 영리한 사람이고 그를 살해해서 얻을 이득이 없거든요.”

“용과 계약할 수 있죠.”

“다아리브혼은 바보가 아니에요.”

유제니는 다아리브혼을 모르지만 그렇게 오래 산 종족이 인간보다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건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다시 엘리엇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힐데자르는 용은커녕 당신의 검조차 받아 내지 못할 거예요. 다아리브혼이 발톱 하나로 처리할 수 있는 인간을 당신의 도움을 받아 처리할 이유도 없고요.”

정답이다. 엘리엇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유제니는 그가 씩 웃는 것으로 자신이 정답을 맞혔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고 다시 말했다.

“무슨 일인지 말해 줘요. 당신을 도울 수 있게.”

“싫습니다.”

즉각 엘리엇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싫다고? 놀라는 유제니에게 엘리엇이 말을 이었다.

“다른 모든 사람의 도움보다 더 바라지 않는 게 당신의 도움입니다.”

이번에는 유제니의 얼굴이 상처로 일그러졌다. 방금 그 말은 좀 상처받았다. 그녀의 표정에 엘리엇은 곧바로 후회하며 덧붙였다.

“당신의 명예가 더럽혀지는 게 싫습니다.”

“내 명예요?”

“거마로트 백작을 살해했다는 소문이 도는 저와 가까이 지내면 당신 역시 안 좋은 소문에 휘말릴 겁니다. 그렇게 두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교제를 단절했다는 말이다. 유제니는 그게 싫다는 걸 넘어서서 그렇게 두지 않겠다는 엘리엇의 말에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말했다.

“사람들은 당신이 나와 멀어지건 말건 상관없이 나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만들어 낼 거예요.”

모든 사람이 그렇다. 완벽하게 사랑만 받는 존재는 있을 수 없다. 나라를 세운 요정 마고조차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유제니는 자신이 뭔데 완벽하게 사랑만 받겠냐고 생각했다. 그녀는 불완전한 인간이고 당연히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글쎄요.”

엘리엇은 그런 유제니에게 씩 웃어 보였다. 그런 자들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걸 굳이 그녀에게 말할 필요는 없다.

“적어도 이번 일에 당신을 끌어들일 멍청한 자들은 없을 겁니다.”

헛소문을 내뱉는 입보다 목숨이 가볍다면 그래도 된다.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엘리엇에게 유제니가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말했다.

“난 당신과 멀어질 생각이 없는데요.”

“저도 멀어질 생각 없습니다.”

엘리엇은 유제니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적당한 여자에게 구혼하는 것이라는 걸 안다. 사람들의 관심은 그가 새로 구혼한 여자에게 향할 테고 적어도 유제니를 향한 관심은 옅어질 테니까.

하지만 그러지 않는 건 그걸 유제니가 싫어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다른 여자에게 구혼하는 게 아니라 아무 죄 없는 여자를 이용하는 걸 싫어한다.

“다른 구혼자에게 기회를 줄 수는 없죠.”

엘리엇은 씩 웃으며 말했다. 물론 그는 이미 라이언 경에게 손을 써 뒀다.

엘리엇의 말에 농담이라고 생각한 유제니 역시 그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그를 향해 몸을 내밀며 말했다.

“그럼 이 일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의논 좀 해 볼까요?”

다시 엘리엇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당신의 도움을 가장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을 텐데요.”

“그럼 내일도 방문하죠, 뭐.”

당당한 유제니의 말에 엘리엇은 저도 모르게 못마땅한 신음을 내뱉었다. 그가 감히 그녀의 방문을 거절할 수 없다는 걸 아는 거다.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건요.”

유제니는 복숭아 파이를 포크로 가르며 입을 열었다. 부드럽고 달콤한 복숭아와 바삭한 파이지가 그녀의 입 안에서 완벽한 하모니를 만들어 냈다.

“이 일에 왜 핸더슨 후작 부인이 끼어들었느냐는 거예요.”

유제니는 알고 있냐는 표정으로 엘리엇을 쳐다봤고 그는 말없이 차를 홀짝였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핸더슨 후작 부인이 번즈 백작을 고발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번즈 백작이 귀족 작위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이유라고 한다.

“여기서 핸더슨 후작 부인이 얻을 게 없잖아요?”

귀족을 고발한다는 건, 그 귀족을 적으로 돌리겠다는 뜻이다. 거마로트 공작 부부라면 납득이 된다. 패터슨 자작 역시 이해가 된다. 그는 공작의 측근이니까.

하지만 핸더슨 후작 부인이라고? 그녀는 거마로트 공작 부인과 라이벌이면 라이벌이지 가깝지는 않았다. 어리둥절해하는 유제니에게 엘리엇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저를 경계하는 겁니다.”

“당신을요?”

유제니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물었다. 핸더슨 후작 부인이 엘리엇을 경계할 이유가 없다. 그녀는 유제니보다 유제니의 어머니와 나이가 비슷하다. 그리고 아직 어린 아들이 하나 있고.

엘리엇은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덤덤하게 말했다.

“그녀의 남편이 제가 태어나는 데 일조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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