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31 – 4
“어떻게 오셨습니까?”
번즈 저택은 점심시간 전에 오는 손님이 없다. 예전에는 장미 저택이라 불렸지만, 주인이 바뀐 지금은 번즈 저택으로 불린다.
번즈 저택의 집사, 오스틴은 연락도 없이 찾아온 젊은 여자를 보고 무뚝뚝하게 물었다. 그의 주인님은 손님을 그리 반기지 않는다.
이 집에 손님을 들이지 않는 게 낫다는 것을 집사는 몇 번의 경험으로 깨달았다. 특히 중년의 여성을. 엘리엇의 허락 없이 손님을 안내했다가 혼이 났다는 말이다.
엘리엇 번즈라는 신흥 귀족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어마어마해서 몰락 귀족의 집사로 살던 때와는 전혀 달랐다. 처음 엘리엇이 이 저택을 인수했다는 소문이 돌자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번즈 저택을 방문했다.
덕분에 오스틴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가 모시던 가문이자 이 저택의 원주인은 몰락 귀족이었고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손님을 맞이한 것도 처음이고, 그 손님 대부분을 돌려보낸 것도 처음이다.
손님을 거절해 본 경험이 별로 없는 오스틴은 처음에는 꽤나 욕을 먹었다. 몇몇 손님은 네가 뭔데 손님을 박대하느냐고 손가락질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많은 경험과 욕으로 단련된 새로운 오스틴은 좀 다르다. 그는 허리를 세우고 가슴을 내밀었다. 눈앞의 여자가 무슨 말을 해도 이 집 안에 들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유제니 비스컨이에요. 번즈 백작님을 만나고 싶은데요.”
“선약은 하셨습니까?”
그렇게 물으며 오스틴은 어딘지 귀에 익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비스컨이면 백작가다. 그러니 눈앞의 여성은 레이디 비스컨이겠지.
레이디 비스컨은 정원을 둘러보고 있었다. 오스틴의 시선이 그녀가 들고 있는 화분으로 향했다. 설마 저걸 번즈 백작님께 주겠다는 건 아니겠지.
오스틴이 아는 한, 번즈 백작은 꽃에 관심이 없었다. 있던 장미도 전부 뽑아 버리라고 한 사람이다.
“아니요. 하지만 번즈 백작은 절 만날 거라고 생각해요.”
그녀의 말에 레이디 비스컨이라는 이름이 귀에 익다고 생각하던 오스틴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 집에 찾아온 여성들은 다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대부분 중매인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장미 나무를 아예 다 뽑은 거예요?”
오스틴이 번즈 백작님은 약속하지 않은 손님은 받지 않는다고 말하려 했을 때였다. 정원을 둘러보던 레이디 비스컨이 불쑥 물었다.
장미? 그는 얼떨결에 레이디 비스컨을 따라 정원을 돌아보았다. 원래 이 저택의 이름은 장미 저택이었다. 이 시기면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저택의 원주인인 가문이 몰락하기 전의 이야기다. 가세가 기울어지면서 장미를 관리하기 어려워졌고 나무 대부분이 죽었다.
오스틴은 그게 무척 안타까웠다. 저택을 인수한 번즈 백작은 정원에 관심이 없어 보여서 더더욱.
“아, 네. 많이 말라 죽어서요. 주인님께서 뽑아내라고 하셔서 뽑았습니다.”
“여기 장미가 정말 절경이었는데. 안타깝네요.”
레이디 비스컨의 말에 오스틴은 돌아가 달라고 말하려던 것을 잊어버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집 바깥쪽으로 몸을 내밀며 말했다.
“이 집에 오신 적 있으십니까?”
“아니요. 친분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지나다니면서 늘 감탄하곤 했어요. 저쪽에 노란 장미가 폈었죠?”
그랬다. 오스틴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신품종이었는데 관리하기가 까다로웠습니다.”
“장미에 물 주시는 거 봤어요. 꽃을 참 좋아하시나 보다 했어요.”
보통 정원 관리는 정원사가 한다. 부유한 집은 정원사가 상주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계약을 맺어 한 달이나 일주일에 한 번 방문한다.
하지만 오스틴이 일하던 가문은 아니었다. 정원사를 쓸 여유가 없었고 장미 정원은 오스틴의 몫이었다.
일이 많았지만, 장미꽃을 보는 건 즐거웠다. 오스틴은 씁쓸할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나무가 시들었을 때는 감정이 무디다고 생각한 오스틴조차도 크게 낙심했을 정도다.
그때, 그의 뒤에서 무시무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큰일 났다. 오스틴은 그렇게 생각했다. 번즈 백작에게 들키기 전에 이 여자를 돌려보냈어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돌아본 번즈 백작은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레이디 비스컨, 무슨 일입니까.”
역시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다. 오스틴은 번즈 백작이 레이디 비스컨에게 무례하게 굴지 않기를 바랐다. 그가 아는 한, 번즈 백작은 연락 없이 찾아온 모든 사람에게 무례했고 레이디 비스컨은 연락 없이 찾아왔으니까.
비록 연락 없이 찾아오긴 했지만, 그는 레이디 비스컨이 싫지 않았다. 특히나 방금 그와 함께 장미 정원 이야기를 나눈 사람이라 더더욱.
“도와줘요.”
“아, 저기….”
레이디 비스컨이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과 동시에 오스틴이 끼어들었다. 그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다고 말하려는데 번즈 백작이 말했다.
“들어오시죠.”
어?
멍해진 오스틴의 앞으로 레이디 비스컨이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지나갔다. 번즈 백작은 레이디 비스컨이 들어오기 쉽게 문을 활짝 연 뒤 옆으로 비켜서 있었다. 심지어 그가 레이디 비스컨이 문지방을 넘어올 수 있도록 손을 내미는 것을 보자 오스틴의 입이 딱 벌어졌다.
“아, 참.”
번즈 백작의 손을 잡던 레이디 비스컨이 생각났다는 듯 오스틴을 쳐다봤다. 그녀는 안고 있던 장미 화분을 오스틴에게 내밀며 말했다.
“여기 장미가 사라져서 안타까웠거든요.”
이걸 날 주는 건가? 오스틴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올랐다. 레이디 비스컨은 웃으며 말했다.
“장미를 안 좋아한다고 하면 엘리엇에게 주려고 했는데요.”
“제 거였습니까?”
그 순간, 번즈 백작이 끼어들었다. 레이디 비스컨은 그를 무시하고 오스틴에게 말했다.
“덩굴장미예요. 아직은 작아서 더 길러야 하지만요.”
오스틴은 저도 모르게 레이디 비스컨을 쳐다봤다가 번즈 백작을 쳐다봤다. 이거, 받아도 되는 건가. 그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번즈 백작이 말했다.
“레이디 비스컨의 팔이 아프겠군.”
받으라는 신호에 오스틴은 고개를 꾸벅하고 화분을 받았다. 작은 화분이었다.
“감사합니다.”
오스틴은 장미꽃을 바라보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뽑아낸 장미 중에도 같은 품종이 있었다. 담장을 휘감아서 레이디 비스컨의 말대로 절경이었다.
“오스틴.”
다음 순간, 번즈 백작이 그를 불렀다. 네. 반사적으로 바짝 긴장해서 자세를 바로 하고 대답하는 그에게 번즈 백작이 말했다.
“다과 내오게. 복숭아 파이 있는지 확인하고.”
복숭아 파이? 오스틴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저택 안에서 복숭아 파이는 수많은 미스터리 중 하나였다.
번즈 백작은 요리사를 고용하며 딱 하나만 봤다. 복숭아 파이를 잘 만드는가. 덕분에 지금 번즈 저택의 요리사는 다른 요리는 그저 그렇지만 복숭아 파이만큼은 끝내주게 잘 만든다.
이상한 건 번즈 백작이 복숭아 파이를 요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점이다. 요리사가 몇 번 만들어 내오긴 했지만 번즈 백작은 그걸로 가타부타 말한 적이 없었다.
“오스틴.”
번즈 백작이 레이디 비스컨을 가장 안쪽 응접실로 안내하며 다시 한번 집사를 불렀다. 그제야 그는 레이디 비스컨이 누군지 떠올렸다.
“아, 알겠습니다.”
그분이다. 번즈 백작이 구혼 중이라던 여자분. 좀 특이한 사람이라고 들었다. 오스틴은 주방으로 빠르게 걸어가며 잠깐 대화를 나눈 레이디 비스컨을 떠올렸다.
“복숭아 파이 있어?”
느닷없는 질문에 요리사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오스틴은 재빨리 덧붙였다.
“주인님이 찾으셔.”
“주인님? 번즈 백작님?”
그렇다. 오스틴이 고개를 끄덕이자 요리사는 해가 서쪽에서 떴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표정에 오스틴은 주전자를 꺼내 물을 끓이며 말했다.
“손님이 오셨거든. 레이디 비스컨.”
“손님? 레이디? 잠깐, 그분이네?”
“그분이지.”
번즈 백작이 구혼한다던 여자. 가난하지만 유서 깊은 비스컨 백작가의 아가씨다. 요리사는 재빨리 남은 복숭아 파이를 확인했다. 혹시 몰라서 매일 아침 만들어 둔다.
“어떤 분이야?”
“어, 음. 평범하던데.”
요리사의 질문에 오스틴은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특이한 사람이라고 들었지만 방금 만난 레이디 비스컨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요리사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미인은 아니라고 하더군.”
“음.”
단순히 미인이 아니라고 하기엔 레이디 비스컨에게 무례한 행동 같다. 오스틴은 물이 끓는 사이 찻잎을 꺼내며 말을 이었다.
“좋은 분 같아.”
“그래?”
요리사가 꺼낸 복숭아 파이의 가장 예쁜 부분을 큼지막하게 자르며 오스틴을 쳐다봤다. 좋은 분이라고? 그가 손님을 그렇게 말하는 건 처음 봤다.
오스틴은 주방에 들어오며 테이블에 내려놓은 화분으로 시선을 던졌다. 하인들이 쉬거나 간단한 다과를 먹을 때 사용하는 테이블이다.
그의 시선을 따라 요리사도 화분을 쳐다봤다. 저게 뭐냐는 그의 표정에 오스틴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내게 주신다고 가져오셨더군.”
“자네에게? 어, 레이디 비스컨이?”
“덩굴장미야.”
저게? 요리사는 꽃이 하나도 달리지 않은 가느다란 나무를 쳐다봤다. 덩굴장미라는 말을 듣고 보니 덩굴처럼 보이긴 한다.
“정원에 옮겨 심고 몇 년 기르면 장미가 피겠지.”
오스틴의 말에 요리사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는 복숭아 파이를 가장 좋은 접시에 옮겨 담으며 말했다.
“백작님이 허락할까? 있는 나무도 다 파 버리라고 한 분이잖아.”
그러게 말이다. 하지만 오스틴은 번즈 백작이 허락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그가 레이디 비스컨의 화분을 받을지 말지 고민했을 때 번즈 백작이 보여 준 표정 때문이었다.
오스틴이 레이디 비스컨의 선물을 거절하면 가만두지 않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