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5화 (140/239)

145화. 31 – 3

이틀 뒤, 비스컨 저택에 여러 명의 손님이 방문했다. 예정되어 있는 티 파티 때문은 아니다. 그건 아직 일주일 남았으니까.

빅스는 유제니의 부탁대로 가장 큰 응접실의 모든 가구를 치웠다. 뿐만 아니라 망가질 수 있는 것도 모두 치웠다. 벽의 그림은 물론 태피스트리까지.

결국 비스컨 저택의 가장 큰 응접실에 남은 건 커튼뿐이었다. 유제니는 커튼도 치울까 했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남겨 두었다.

“뭘 하시려는 걸까?”

완전히 텅 비어 버린 응접실 문 앞에서 셜리가 제인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앉을 자리도 없는 응접실을 쳐다보며 유제니 아가씨가 뭘 하려는 건지 생각했다.

“춤 연습을 하시려나?”

“손님들이 전부 여자라던대.”

“번즈 백작님은?”

손님 중에 번즈 백작님도 온다고 들었다. 엄청나게 잘생겼지만 좀 무서운 사람.

셜리와 제인은 번즈 백작을 떠올리고 잠시 인상을 써야 할지 고민했다. 두 사람은 그를 보고 친절한 것과 예의 바른 게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 올 것 같은데.”

“그래? 난 올 것 같은데.”

서로 상반된 의견에 셜리와 제인의 시선이 부딪쳤다. 제인이 먼저 말했다.

“오겠지. 아가씨한테 하는 거 못 봤어?”

제인은 아직도 번즈 백작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이 생생하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유제니 아가씨에게 인사하던 때를.

처음 이 집에 들어오던 그 사람과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였다. 무표정한 얼굴에 싸늘하다 싶을 정도로 냉정한 태도가 유제니 아가씨를 보자마자 확 풀어졌다.

“다른 집 애한테 들었는데 일하는 사람들한테는 싸가지 없고 구혼자한테 살랑거리는 남자가 많다더라.”

셜리의 말에 제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리도 있었잖아. 기억 안 나? 그, 멜란진가 멜랑인가 하던 남자.”

“아아, 맞아. 그 사람 때문에 지미가 짜증 냈었지.”

오자마자 인사도 하지 않고 빅스에게 딱 한마디 했다. 차.

차 한 잔 달라거나 차 좀 마실 수 있냐는 말도 아니었다. 그냥 차라는 한 글자에 천하의 빅스마저 표정이 변했을 정도다. 차를 가져간 지미에게는 더했다고 한다. 자기 손수건을 집어 던지더니 딱 한마디 했다.

빨아 와.

“번즈 백작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

그는 정중하다. 자신을 맞이하러 나온 하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좋은 아침이네. 레이디 비스컨과 약속했는데.

“표정은 전혀 좋은 아침이 아니지만.”

셜리의 말에 제인은 킬킬대고 웃었다. 지금이야 웃지만, 막상 그 앞에서 그 말을 들으면 몸이 굳는다. 번즈 백작은 웃음기 하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기 때문이다.

지미도 같은 말을 했다. 차를 가져가면 잘 마시겠다고 인사한다고 한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없어서 하인들 사이에서 비꼬는 거다와 표정이 없는 게 아니냐는 의견으로 갈렸었다.

심지어 톰이 찻잔을 엎었을 때조차도 번즈 백작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는 그저 괜찮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래서 비스컨 가의 사용인들은 번즈 백작이 예의 바르지만 친절한 게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한테 친절할 필요는 없지. 예의 있는 것만으로 난 번즈 백작님 환영이야.”

셜리의 말에 제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안 올 것 같다며? 셜리는 그런 제인의 표정을 보고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소문 못 들었어? 번즈 백작님이 거마로트 공작의 아들을 살해했다는 소문 말이야.”

“어, 그거 헛소문 아냐?”

비스컨 가의 사람들은 다들 헛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제일 먼저 비스컨 백작 부인이 빅스에게 번즈 백작의 출입을 금하라고 지시했을 테니까.

하지만 셜리와 제인이 아는 한 백작 부인은 그런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빅스 역시 들은 바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입조심하라는 주의도 잊지 않았다.

“헛소문이지만 어쨌든 안 좋은 소문이잖아. 그렇게 예의 바른 사람이라면 안 올걸?”

“예의랑 안 오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유제니 아가씨한테 푹 빠져 있는데 올 수도 있지.”

“그렇게 예의 바르고 푹 빠져 있으니까 안 오지.”

셜리의 말에 제인은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셜리는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그런 헛소문이 퍼져 있는 동안 유제니 아가씨를 만나러 오면 우리 아가씨도 헛소문에 휘말릴 수 있잖아.”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빌어먹을 렌시드 경 때문에 유제니 아가씨는 한동안 헛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만약 셜리였다면 파혼하는 이유를 신문에 실었을 것이다.

“잠깐, 그럼 아가씨한테 구혼을 안 할 수도 있나?”

제인의 말에 셜리는 깜짝 놀라서 그녀를 쳐다봤다. 현재 유제니에게 구혼하는 남자는 둘뿐이다. 번즈 백작과 라이언 경. 하인즈 경은 어느 순간 슬그머니 발걸음을 끊었다.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자신이 가망성이 없다고 생각하면 타겟을 바꾸는 남자는 많다.

“그러면 안 되는데.”

물론 제인과 셜리는 하인즈 경과 라이언 경 중에서 더 나은 구혼자를 고르라면 라이언 경을 고를 것이다.

하지만 라이언 경과 번즈 백작 중에서 고르라면? 질문자를 비웃겠지.

“두 사람, 여기서 뭐 하나.”

그때, 집사가 셜리와 제인의 뒤로 나타나서 물었다. 깜짝 놀란 두 사람은 펄쩍 뛰어올랐다가 집사를 돌아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깜짝 놀랐잖아요.”

“무슨 이야기를 하길래 누가 오는 것도 몰라?”

무슨 이야기긴. 번즈 백작이 구혼을 안 할 수도 있냐는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빅스에게 그런 말을 하면 쓸데없는 이야기 하지 말라며 그가 그들을 혼낼 거라는 걸 알았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제인이 고민하는 사이 셜리가 말했다.

“아가씨는 여기서 뭘 하실 거래요?”

이 집 안의 아무도 모른다. 에스컬레 양에게 물어본 사람이 있는데 에스컬레 양도 웃으면서 비밀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건 리즈 양도 마찬가지고.

라넌 경에게 물어볼 생각은 아무도 못 했다.

“글쎄.”

빅스는 텅 빈 응접실을 살펴보며 말했다. 그도 못 들었다.

“집사님도 모르세요?”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라? 제인의 질문에 빅스는 두 사람을 돌아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뭘 하려고 이러는 건지 대충 예상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일부러 유제니에게 무엇을 하려고 하냐고 묻지 않았다.

“아가씨께서 알려 주지 않는 건 우리가 모르는 게 낫기 때문이겠지.”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적어도 집사님은 아셔야죠.”

셜리의 말에 빅스는 씩 웃었다. 그녀의 말이 맞다. 적어도 그는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유제니에게 커튼은 남겨 두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물론 유제니가 알려 준 건 아니다. 그는 오랜 시간 비스컨 저택에서 일했고 비스컨 가의 사람들과 매우 가깝다. 유제니가 태어났을 때부터 그녀를 봐 온 만큼, 지금 유제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알았다.

“잘 생각해 보렴. 아가씨는 우리는 물론 백작 부인께도 비밀로 하고 있지. 이게 무슨 의미겠니?”

빅스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슬슬 아가씨의 손님들이 도착할 때가 됐다. 다 도착하기 전까지는 작은 응접실에서 차를 대접해야 한다.

“백작 부인뿐 아니라 도련님도 모르시던데.”

제인은 떠나는 빅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유제니 아가씨의 계획을 아는 건 이 집 안에서는 유제니 아가씨뿐이다. 그때, 셜리가 말했다.

“번즈 백작님은 아시겠지?”

“아시겠지. 원래 그분 집에서 하려고 했다며.”

“이 집으로 바꿔서 다행이네.”

셜리의 말에 제인이 놀라서 물었다.

“번즈 백작님의 소문 때문에 바꾼 게 아니었어?”

“아니야. 마님께서 여기서 하라고 하셨대.”

“어머. 소문이 그럼 잘못됐네.”

그런 소문도 돌고 있다. 번즈 백작이 거마로트 공작의 아들을 살해한 것을 알게 된 레이디 비스컨이 원래 번즈 백작의 집에서 하려던 일을 자신의 집으로 바꿨다고.

제인의 말에 셜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거봐.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니까.”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 몇십 분 뒤, 유제니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누가 귀족 아가씨들은 검보다 바늘을 드는 걸 좋아한다고 했는가.

한두 명 정도는 안 온다고 할 줄 알았는데 오겠다고 한 사람들은 모두 작은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심지어 천에 감싸인 길쭉한 것을 들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로고소 양, 그건 뭐예요?”

유제니의 질문에 에리카는 활짝 웃었다. 집에 있는 걸 가져왔다. 그녀는 천의 끝부분을 살짝 풀어 보이며 말했다.

“혹시 부족할까 싶어서 가져왔어요. 창고에 있더라고요.”

화려한 장식이 들어간 검 손잡이가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클레어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러자 리사가 가져온 바구니의 천을 걷어 내더니 팔뚝만 한 검을 꺼내며 말했다.

“어머, 저도요.”

맙소사. 유제니는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다들 이렇게까지 열정적일 줄은 몰랐는데.

안타깝게도 그런트 양과 로고소 양이 가져온 검을 쓸 일은 없다. 적어도 한동안은 말이다.

“한동안 진검은 안 쓸 거예요.”

클레어의 말에 에리카와 리사의 얼굴에 아쉽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둘 다 창고에서 가장 좋아 보이는 검을 집어 온 거다. 리사는 보석으로 장식된 검집을 보여 주며 말했다.

“아쉬워라. 이거 써 보고 싶었는데.”

“언젠가는요.”

유제니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언젠가는 진검을 사용할 날도 있을 수 있겠지.

하지만 클레어는 아니었다. 그녀는 고개를 젓고 말했다.

“여러분께서 진검을 쓸 일이 없게 하는 게 제 일이라서요. 전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덕분에 응접실 안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말이 맞다. 검을 사용할 줄 아는 것과 실제로 사용하는 건 다른 문제다. 클레어는 일반인들이 검을 들지 않을 정도로 발시안이 평온한 나라이길 바랐다.

동시에,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면 자기 몸을 지킬 수 있길 바랐고.

“그럼 이동할까요?”

유제니의 제안에 모인 여자들이 우르르 큰 응접실로 향했다. 텅 빈 응접실에는 방금 전에 유제니가 줄리아와 로렌의 도움을 받아서 연습용 목검을 가져다 놓았다.

“빅스. 어때?”

유제니가 손님들과 함께 응접실에 들어가고 나서 얼마 뒤, 외출을 했던 비스컨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 예정보다 더 이른 귀가긴 했지만, 빅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건 유제니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두 사람 다, 비스컨 백작 부인이 딸의 두 번째 여흥을 궁금해한다는 걸 알았다. 귀가를 당겨서 보려고 할 거라는 것도 예상했고.

때문에 빅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아무 말 없이 큰 응접실로 안내하자 세이마리아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응접실 문을 살짝 열었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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