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31 – 2
엘리엇이 내게 이상한 요구를 한 이유는 그리 멀지 않아 알게 되었다. 로렌과 줄리아를 초대해 우리의 계획이 바뀌었다는 것을 설명하자 로렌이 줄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왜 그래?”
줄리아 역시 로렌을 쳐다보며 말을 잇지 못하자 내가 물었다. 얘네 뭐 하는 거지? 두 사람은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서로를 쳐다봤다.
그리고 줄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장소가 바뀐 건, 유제니의 생각이에요? 아니면….”
“내 생각이야. 어머니께서 우리 집에서 하길 원하셔서.”
“백작 부인은 우리가 뭘 하는지 아직 모르시는 거죠?”
줄리아의 질문에 나는 씩 웃었다. 당연하지.
“알게 되시면 기절하실지도 몰라.”
나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진짜로. 어머니는 기절하실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진행하는 건 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이다.
줄리아와 로렌은 물론이고 리사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로고소 양도. 일단 몇 명 모였으니 시작해야지.
그때, 로렌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번즈 백작님은 뭐라고 하세요?”
“장소 바뀐 거? 그렇게 하라고 하던데. 아니, 그보다는….”
다행이라고 했지. 내가 말을 멈추자 로렌과 줄리아의 시선이 다시 부딪쳤다. 아, 대체 뭔데?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두 사람이 아직 차와 케이크에 손을 대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물었다.
“무슨 일인데?”
로렌은 다시 줄리아를 쳐다봤다. 서로 말하라는 표정에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줄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 최근에 번즈 백작님에 대한 소문이 있거든요. 소문, 소문은 아니고….”
소문이면 소문이지 소문은 아니라는 건 무슨 소리지?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로렌이 말했다.
“그, 저희도 헛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요.”
“무슨 소문인데?”
내 질문에 로렌이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는 줄리아가 나서서 말했다.
“번즈 백작님이요. 드래곤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 거라고 했잖아요?”
“물리친 건 아니라고 하던데.”
설득했다고 했다고 했나?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줄리아는 내 말에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먼저 온 용사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하던가요?”
“용사?”
그것도 먼저 온?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부분을 먼저 물어봐야 하는지 모르겠다.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는 부분과 용사라는 부분 중에서 말이다.
“그, 먼저 드래곤을 물리치러 온 용사가 있었대요. 그런데 그게….”
거기까지 말한 줄리아가 망설이기 시작했다. 나는 대체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고 줄리아는 다시 로렌과 서로 눈치를 살피다가 말했다.
“번즈 백작이 그, 용사를 그, 그러니까….”
“그러니까?”
“주, 죽였대요.”
순간 응접실 안에 썰렁한 정적이 찾아왔다. 나는 줄리아와 로렌이 질 나쁜 농담을 한다고 생각하고 두 사람을 빤히 쳐다봤다.
하지만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람들 말로는 번즈 백작이 그 용사를 죽이고 용과 거래를 했대요.”
허어. 다시 의문이 두 가지 정도 떠올랐다. 나는 제일 먼저 궁금한 걸 물었다.
“무슨 거래?”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그 사람들을 용에게 바치는 거였대요.”
그래, 두 번째 질문은 그거였다. 그 사람들이란 게 대체 누구야? 내가 인상을 쓰자 줄리아는 내가 인상 쓰는 이유를 알고 말했다.
“그 사람들이요. 그, 거마로트 공작의 집에 왔다는 손님들이었다나 봐요.”
“공작의 손님? 잠깐.”
최근에 공작의 집에 방문한 손님이라면 공작의 아들과 함께 여행을 떠난 친구들밖에 없다. 그제야 배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힐데자르가 용을 잡겠다며 많은 돈을 주고 용병을 구하더라는 이야기.
당시에는 다들 웃으면서 넘겼다. 용을 잡는다고? 이 나라를 세운 영웅, 발시안조차 용을 잡지 못했다. 그는 그저 사악한 크리사가 대륙 반대편으로 떠나게 만들었을 뿐이다.
심지어 전투 중에 입은 상처가 회복되지 않아 사망했고.
발시안의 곁에 있던 게 이 나라를 세운 건국 왕, 요정 마고다. 요정이 곁에 있었는데도 가장 강한 용사가 죽음을 불사하고서야 용을 쫓아 보내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힐데자르가 용을 잡는다고?
“흠. 거마로트 백작의 실력이 그 정도는 안 됐던 것 같은데.”
어릴 때, 나와 대련을 하다가 지자 뒤에서 검을 휘두른 적이 있다. 그때 나한테 맞고 나가떨어졌다. 덕분에 힐데자르의 뒤통수가 깨졌고.
“잠깐, 그때 생긴 상처가 아직 있을 텐데?”
그 뒤로 힐데자르의 뒤통수 일부분에 머리카락이 안 난다고 들었다. 올리버는 고소하다고 배를 잡고 웃다가 어머니께 혼이 났고.
줄리아와 로렌은 어이가 없었던지 피식피식 웃다가 사안의 심각성을 다시 떠올렸는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거마로트 백작이 데려간 용병들이 실력이 꽤 좋았나 봐요. 용과 호각으로 싸웠다고 하더라고요.”
“흐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줄리아와 로렌이 계속 말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용사 발시안, 위니프리아, 세이마리아, 마고는 불세출의 천재들이었다. 대륙 전체를 통틀어서 용을 쫓아낸 거의 유일한 영웅이기도 했고.
나는 줄리아와 로렌에게 계속 이야기하라고 눈짓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다시 서로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그 사람들 말로는 볼티고르 백작 쪽이 용과 싸워 거의 이기기 직전이었는데 번즈 백작이 용에게 거래를 제안했대요.”
“허어.”
엘리엇이? 나는 말도 안 된다는 신음을 내뱉었지만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로렌이 말했다.
“자기가 용과 함께 싸워 줄 테니 자기를 영웅으로 만들어 달라고요.”
그럴 리가 없다. 내 얼굴이 일그러졌는지 다시 아이들의 말이 멈췄다. 젠장. 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 퍼진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화난 표정을 가리기 위해 찻잔을 들어 입술에 대며 말했다.
“그래서 용이 번즈 백작을 영웅으로 만들어 줬다? 용은 뭘 얻는데?”
“그….”
로렌이 망설였다. 다아리브혼이 뭘 얻는데? 나는 차를 마시려다 말고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자 줄리아가 대신 말했다.
“그, 가장 고귀한 사람을 먹어 보고 싶다고 했대요.”
“다아리브혼이?”
크리사라면 몰라도 다아리브혼이? 아니, 잠깐. 기록에 의하면 크리사도 인간을 그리 먹지 않았다. 아마도 맛이 없는 모양이라고 기록돼 있거든.
그런데 다아리브혼이 인간을 먹는다고? 갑자기 다아리브혼이 미치기라도 했나? 잠깐, 용도 미칠 수 있나?
나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멍하니 로렌과 줄리아를 쳐다봤다. 엘리엇이 두 번째로 도착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영웅이 되기 위해 먼저 온 사람을 배신한다고? 용의 편에 서서?
그리고 자기가 영웅인 척 왕궁으로 돌아온다?
그건 내가 아는 엘리엇이 아니다. 적어도 엘리엇은 영웅이라는 자리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 그, 거마로트 백작은 잡아먹힌 거야?”
나는 다아리흐본이 힐데자르를 잡아먹는 것을 상상하려다가 멈췄다. 나의 힐데자르에 대한 감정과 상관없이 그리 유쾌한 상상이 아니다.
“어, 네. 그, 그 사람들 말로는 다아리브혼이 거마로트 백작을 잡아먹으려고 새장에서 꺼낼 때 거마로트 백작이 자기들을 도망치게 해 줬대요.”
“하하하하.”
아, 이건 진짜 재미있는 소설이다. 나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좋다. 좋아.
백 보쯤 양보해서, 아니, 만 보쯤 양보해서 엘리엇이 영웅 자리가 탐나서 먼저 온 사람들을 해치고 용과 거래를 했을 수는 있다. 그가 영웅이 돼서 귀족 작위를 얻은 다음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기사들과 싸우는 걸 원했을 수도 있지.
하지만 힐데자르가 자기가 죽는 순간에 다른 사람들을 도망치게 했다고? 그건 정말, 정말 말도 안 된다.
“저도 그래서 이게 헛소문이라고 생각하긴 하는데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웃는 내게 줄리아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녀 역시 거마로트 백작이 어떤 작자인지 좀 안다. 힐데자르는 에스컬레 경의 골칫거리 중 하나였거든.
“거마로트 공작 부부는 아닐 거예요.”
이어진 줄리아의 말에 나는 웃음을 멈췄다. 그러게.
적어도 내게 힐데자르는 비열하고 무능력한 멍청이지만 그의 부모님에게는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잠깐. 자랑스러운은 빼자.
사랑스러운 아들이겠지.
아들이 모험을 떠났다가 용에게 잡아먹혔다는 이야기만으로도 끔찍한데 아들을 그렇게 만든 자가 영웅이 되어 있다니.
이 소문이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라는 것을 차치하고 거마로트 공작 부부의 심정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공작 부인이.
나는 “음”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줄리아와 로렌에게 물었다.
“이걸 어디서 들었어?”
로렌과 줄리아는 둘 다 아카데미 친구에게 들었다고 말했다. 아카데미 아이들에게 퍼졌다면 사교계에도 거의 다 퍼졌다는 말이다.
젠장.
다시 한번 내가 사교계의 소문에 늦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다들 내게만 말을 조심하는 걸 수도 있다. 그때, 줄리아가 말했다.
“저, 그리고요.”
잠시 내 눈치를 살피던 줄리아가 말했다.
“핸더슨 후작 부인이 번즈 백작을 고발할 거라는 소문도 있어요.”
느닷없는 이름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구? 핸더슨 후작 부인? 그 사람이 여기에 왜 나와?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줄리아가 계속해서 말했다.
“부정한 행위로 나라를 어지럽히고 농락했다고요.”
허어. 다시 한번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곧바로 의문이 떠올랐다.
“왜 핸더슨 후작 부인이지?”
줄리아와 로렌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찻잔을 손에 쥔 채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부정한 행위로 나라를 어지럽히고 농락했다는 죄로 고발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
특히 귀족이라면 누구나 번즈 백작을 고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아들이 용에게 잡아먹혔으니, 아니, 정정하자.
그 때문에 아들이 용에게 잡아먹혔다고 믿으니 거마로트 공작 부부가 고발하는 게 오히려 말이 된다.
하지만 핸더슨 후작 부인이라고? 나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했다.
“왜 핸더슨 후작 부인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