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0화 (135/239)

140화. 30 – 2

처음 방문했을 때도 그는 비스컨 저택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을 뿐 아니라 유제니에 대해서도 아주 오래 알고 지낸 것처럼 행동했다.

앉아 있을 때 유제니가 드레스 밑으로 신발을 벗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빅스는 자연스럽게 유제니가 벗은 신발을 그녀에게 신겨 주던 번즈 백작을 떠올리며 인상을 썼다. 그리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그런 건 조사한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특히 유제니 아가씨가 신발을 벗는 버릇이 있다는 건 이 집에서도 몇몇 사람만 안다.

번즈 백작에게 이상한 능력 같은 게 있는 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괜히 백작 부인에게 번즈 백작이 수상하다는 말을 해서 그녀를 겁먹게 할 필요도 없다.

어쨌든 번즈 백작이 유제니 아가씨에게 지극정성인 건 사실이니까.

이 집에 번즈 백작이 드나든 뒤로 주방에 복숭아가 떨어진 날이 없다. 늘 최상급의 복숭아를 번즈 백작이 보내오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그걸 유제니 아가씨에게 알릴 필요 없다고 말했다. 물론 비스컨 백작 부인에게는 알렸지만.

“알았네.”

그만 가도 좋다는 백작 부인의 말에 빅스는 고개를 꾸벅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혹시 몰라서 하인들에게 유제니 아가씨의 구혼자들이 유제니 아가씨가 뭘 좋아하는지 물어본다면 알려 줘도 된다고 말해 뒀다. 그래야 구혼자들도 선물 공세를 할 테니까.

귀족 집안이라면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대신, 누가 물었고 뭐라고 대답했는지만 자신에게 알려 달라고 했다. 말없이 선물만 두고 갈 경우에 누가 두고 갔는지 체크해 둬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번즈 백작이 물어봤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의문이 생긴다.

번즈 백작은 유제니 아가씨가 복숭아 타르트를 좋아한다는 걸 대체 어떻게 안 걸까.

* * *

“괜찮네요.”

비스컨 저택에서 열린 음악회에 처음 방문한 베라 하몬 양은 로렌의 옆에서 비스컨 저택의 홀을 둘러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비스컨 백작 부인이 음악회를 어떻게 열지 궁금했다. 귀족들의 이런 사교 모임은 결국은 부의 자랑으로 흘러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비스컨 가는 유서 깊긴 하지만 가난한 편이고.

비스컨 저택은 셋이 살기엔 조금 컸고 약간 오래된 느낌이었지만 잘 관리돼 있었다. 홀도 깔끔했고 벽을 장식한 태피스트리나 그림도이 비싼 건 아니었지만 계절과 잘 맞았다.

베라는 홀의 정중앙을 장식한 과일을 보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재미있게도 꽃이 아니라 과일을 장식해 놨다. 신기하네.

보통은 비싼 꽃을 장식한다. 흔하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계절에 맞지 않는 아주 비싼 꽃을 장식하는 것이다. 그녀는 계절 과일을 그릇이 넘치도록 담아 놓은 것을 보고 센스가 좋다고 생각했다.

오길 잘했다. 어머니인 하몬 부인이 어디선가 비스컨 가에서 음악회가 열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에게 꼭 다녀오라고 했다. 하지만 이런 행사는 가까운 사람들만 초대하기 마련이다.

하몬 가는 비스컨 가와 딱히 친분이 없다. 지난번 무도회에 레이디 비스컨이 참석하기는 했지만 그건 하몬 부인이 길고 성의 있게 방문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하몬 부인과 하몬 양을 초대해 줄 리가 없다.

다행히 베라는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었고 아카데미 최고의 미녀인 로렌과도 친분이 있었다. 로렌의 친구인 아이다와도 친했고.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리즈 양.”

오고 싶다고 조르기에 레이디 비스컨에게 물어보고 초대한 것뿐이다. 베라의 인사에 로렌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초대한 건 제가 아니라 레이디 비스컨이에요.”

그때, 때마침 유제니가 나타났다. 막 이 층에서 내려온 그녀는 로렌을 발견하고 다가오더니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로렌, 어서 와.”

“유제니,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무슨 소리야. 친구인데 당연히 초대해야지.”

유제니의 말에 로렌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는 자신이 유제니의 친구라는 사실에 약간의 뿌듯함을 느꼈다.

그 옆에서 베라는 유제니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 사람이 유제니 비스컨이구나.

여기 오기 전에 유제니 비스컨에 대해서 약간 알아봤다. 아카데미에 다니지 않은 백작가의 아가씨. 요즘 대부분의 귀족은 다 아카데미에 다닌다. 그렇다면 굳이 아카데미에 다니지 않고 가정 교사에게 교육을 받은 레이디 비스컨은 좀 고지식한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얼마전에 그녀는 약혼자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파혼했다. 다들 쉬쉬하지만 원래 그런 자극적인 소문은 로렌과 베라 같은 십 대 소녀들 사이에 빠르게 퍼지는 법이다.

약혼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파혼을 하다니. 베라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정말로 약혼자가 남자를 좋아해서 파혼한 건가요?”

“하몬 양!”

그제야 유제니는 로렌의 곁에 서 있는 소녀가 하몬 경과 하몬 부인의 딸, 베라 하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로렌이 허락을 구하긴 했다. 아카데미의 친구가 꼭 오고 싶어 하는데 같이 가도 되는지 말이다.

상관없다고 말한 건 유제니였다. 그녀는 베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비스컨 가의 차녀, 유제니 비스컨이에요.”

‘당신은?’이라는 말투에 베라는 저도 모르게 당황해서 말했다.

“베, 베라 하몬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하몬 양.”

유제니는 그렇게 말하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조용하고 얌전해 보이는 첫인상과 다르다. 베라는 유제니의 오른손을 맞잡고 그녀를 멍하니 쳐다봤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궁금할 수 있죠.”

유제니는 베라의 손을 한 번 잡았다가 놓고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친절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모든 사람의 궁금증을 해결해 줘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것도 이해할 거라 믿어요.”

너무 친절한 말투라 그 내용은 아주 천천히 베라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그녀는 입을 딱 벌리고 다른 사람에게 인사하러 가는 유제니를 바라봤다.

“레이디 비스컨.”

테드 라이언은 미소를 지으며 유제니에게 인사를 건넸다. 비스컨 가의 음악회에 초대받은 건 처음이 아니다. 올리버의 친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초대는 좀 더 의미가 있었다. 유제니의 구혼자로서 초대받은 거니까.

“제임스는 바쁜 일이 있어서 불참한다고 하더군요. 사과를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군요.”

유제니는 웃으며 말했다. 하인즈 경은 음악회의 초대를 거절하기 전부터 그녀를 방문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다. 구혼자들은 자신이 가능성이 없다고 느끼거나 다른 마음에 드는 여성이 나타나면 슬그머니 발길을 끊는다.

어차피 하인즈 경뿐 아니라 라이언 경과 번즈 백작 모두 유제니에게 구혼한 건 아니니까.

다행히 유제니는 하인즈 경이 왜 마음이 식었는지 잘 알았다. 그녀가 사일록 경을 물리치고 올리버를 구했다는 소문을 들은 거겠지.

“레이디 비스컨.”

뒤이어 엘리엇이 다가와서 인사를 건넸다. 그는 자연스럽게 유제니의 왼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괜히 부끄러운 실력을 보여 창피를 당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유제니의 겸손한 말에 엘리엇은 빙그레 웃었다. 그는 유제니의 실력을 안다. 물론 그의 옆에 서 있는 테드도 알 것이다. 올리버의 친구니까.

“그럴 리가요.”

다정하게 말한 그는 여전히 유제니의 손을 잡은 채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나직하게 말했다.

“저는 당신의 어떤 모습이든 좋습니다.”

뭐든 좋다. 알고 있는 모습이라면 사랑스러울 테고 못 보던 모습이라면 새로울 것이다. 그건 그거대로 사랑스럽겠지.

엘리엇의 말에 유제니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꿈에서 그녀는 대체 어디까지 보여 준 걸까.

“알고 있군요?”

“뭐를 말입니까?”

엘리엇이 시치미를 떼자 유제니는 인상을 쓰며 그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그가 재빨리 항복하는 것처럼 손바닥을 들어 보이자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음악회는 보통 가까운 지인들만 초대한다. 자연스럽게 매년 초대받는 사람들은 비슷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올해는 올해 들어 친해진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작년보다 많은 사람을 초대했다. 그중에는 귀족의 음악회에 초대받은 것 자체가 처음인 사람도 있다.

유제니는 그게 부담스러웠다. 다들 나름대로 귀족의 음악회라는 것에 기대를 하고 있을 것 같다. 그녀가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새로 초대받은 사람들 대부분이 꿈을 꾼 사람들이다. 엘리엇이 그녀의 실력을 안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

유제니의 긴장이 잠깐이나마 풀어졌다.

“악기 연주할 줄 아는 게 있나요?”

유제니의 질문에 엘리엇은 미소를 지었다. 조금 안다.

“피아노를 약간.”

그의 대답에 유제니보다 테드가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악기를 연주할 줄 안다고? 보통 평민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엘리엇이 재빨리 덧붙였다.

“아카데미에서 배웠습니다.”

“아.”

무슨 말인지 알겠다.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수업 중 하나가 음악 수업이다. 그렇다면 약간이라는 엘리엇의 말은 정말로 건반을 칠 줄 안다는 말일 수도 있다.

“유제니.”

그때, 이 층 계단에서 준비를 마친 세이마리아가 유제니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참석해 준 테드와 엘리엇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한 뒤 유제니에게 말했다.

“슬슬 준비해야 하지 않겠니?”

가족 음악회라 비스컨 가의 사람들이 연주를 한다. 연주할 준비를 하라는 말에 유제니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한 뒤 음악실로 들어갔다.

“아, 올리버는 어떻습니까? 연주할 수 있나요?”

유제니의 뒤를 따르려는 비스컨 백작 부인에게 테드가 물었다. 그는 이틀 전에도 올리버의 병문안을 오긴 했다. 그때 본 올리버의 얼굴이 꽤 대단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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