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29 – 3
그녀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세상 사람들이 몰라도 상관없다. 어쩌면 엘리엇은 그편이 더 좋았다. 유제니가 대단한 일을 할수록 그녀에게 가해지는 고통과 압박도 커질 테니까.
어쩌면 그는 유제니가 지금처럼 그리 관심받지 않는 평범한 백작가의 아가씨인 쪽이 더 좋았다. 평화롭게 그녀를 독점할 수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클레어의 존재가 그는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의 말에 마음에 들지 않는지 클레어가 입을 열었다. 엘리엇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그녀의 말을 막았다.
“뭔가 오해를 하고 있군, 라넌 경.”
무슨 오해를 하고 있다는 거지? 멈칫한 클레어에게 엘리엇이 말을 이었다.
“레이디 비스컨은 다정한 사람이네. 자신이 조금 다치는 거로 일이 평화롭게 마무리된다면, 그쪽을 선택할 사람이지.”
그건 클레어도 알고 있다. 하지만 클레어는 말의 내용보다 뉘앙스가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도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을 오래 모셨다.
레이디 비스컨이 사망하기 전까지 곁에 있었으니까.
그런 그녀의 앞에서 엘리엇이 레이디 비스컨을 더 잘 아는 것처럼 구는 게 싫었다. 어쩌면 그가 더 잘 알 수도 있지만, 그래도 싫었다.
하지만 클레어가 지적하기 전에 엘리엇이 말을 이었다.
“상대가 기사 다섯 명 정도라면 괜찮아. 유제니는 자신이 최선을 다해야 살아남을 거라는 걸 알지. 하지만 이길 수 있는 한 명이라면 검날을 뽑지 않아.”
그게 에스컬레 경이 유제니에게 검을 쥐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한 이유다. 상대가 내 목숨을 노리고 있다면 절대로 자비를 보여 줘서는 안 된다.
유제니가 혼자서 사일록 경의 저택에 들어가 오라버니를 구해 냈다는 소문이 돌면, 그게 유제니의 검술 실력 덕분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유제니에게 도전하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그중에는 그녀를 이겨서 유명해져 보겠다는 멍청한 생각을 하는 놈도 있을 수 있다. 더 나쁘면 귀족 아가씨가 검을 다뤄 봤자 얼마나 다루겠냐며 혼내 주겠다는 더 멍청한 생각을 하는 놈도 있을 거다.
“어지간한 녀석들은 유제니가 이기겠지만 그런 일이 반복되다가 다치는 일도 있을 수 있겠지.”
아무리 실력 있는 검사라 해도 한 번쯤은 다친다. 엘리엇은 괜한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유제니가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게 더 낫다.
그래야 그녀가 위험에 처했을 때 상대에게 빈틈이 생길 테니까.
“클레어.”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의 설명을 듣기 위해 올리버의 침실로 올라갔던 유제니가 내려왔다. 그녀는 문을 열고 응접실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올리버가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싶다는데요.”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런 말을 들으면 클레어는 주저 없이 올라가서 괜찮다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 클레어는 자신이 왜 올리버를 싫어하는지, 아니, 싫어하다 못해 증오했는지 다시 한번 떠올리는 대화를 했다.
“괜찮습니다.”
클레어는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올리버 비스컨의 얼굴 따위는 보고 싶지도 않다. 그냥 거기서 죽어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올리버 비스컨이 사망한다면 유제니가 슬퍼할 것이다. 클레어는 잘생겼지만 좀 멍청한 올리버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녀는 정말로 그 남자가 싫었다.
* * *
“들었어요?”
더위가 한풀 꺾이자 사람들의 교제도 외부에서 이뤄졌다. 공원에서 산책하다 만난 두 부인은 서로 각자 알고 있는 소문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소문은 사일록 경이 흰 사자 기사단에서 퇴출됐다는 소문일 것이다. 게다가 기사단 자체적으로 기사들의 행실을 조사한다고 한다.
“대체 무슨 일이래요?”
“듣기로는 사일록 경이 비스컨 남작을 괴롭혔던 모양이에요.”
비스컨 남작? 듣고 있던 사람들의 머릿속에 잘생긴 올리버의 얼굴이 떠올랐다. 큰 키와 반짝이는 금발을 가진 그 청년은 비스컨 가가 그렇게 가난하지만 않았다면 지금쯤 결혼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물론 반짝이는 금발만큼이나 반짝이는 그 얼굴이라면 아무리 가난하다 해도 충분히 장가를 갔을 테니 비스컨 남작의 늦은 결혼은 그의 가난 때문은 아니라는 게 사람들의 의견이었다.
“어머나, 세상에.”
“어디 다친 건 아니겠죠?”
순식간에 사람들의 관심은 올리버의 얼굴로 향했다. 얼굴을 다친 건 아니겠지? 그 잘생긴 얼굴이 망가지는 건 발시안의 큰 불행이다.
“코가 부러졌다는 거 같죠?”
“아이고, 저런.”
“큰일이네요.”
멀쩡하게 붙어야 할 텐데. 올리버의 이름에 그 자리에 모여든 사람들이 안타까운 한숨을 내뱉었다. 물론, 올리버의 미모가 망가지길 바라는 사람도 있었다.
“레이디 비스컨이 구했다는 것 같던데요.”
“레이디 비스컨이요?”
다른 누군가의 말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사일록 경과 비스컨 남작의 싸움에서 레이디 비스컨이 자기 오라버니를 구했다고?
레이디 비스컨은 누구를 구하기보다는 누군가에게 구해지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이다. 창백한 안색이나 작은 체구가 그러했다.
하지만 말을 꺼낸 사람은 멈추지 않았다.
“소문으로는 레이디 비스컨이 검으로 사일록 경을 물리치고 자기 오라버니를 구해 냈대요.”
뭐라고? 잠시 사람들의 머리 위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리 오래되지 않아 폭소와 함께 그 정적이 깨졌다.
“레이디 비스컨이 사일록 경을?”
“검으로요?”
말도 안 된다. 사람들의 폭소에 말을 꺼낸 사람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도 그에게 그 소식을 알려 준 친구에게 꿈을 꾸려면 자야 하지 않겠냐고 타박을 했다.
그래도 이야기한 건 그냥 재미있는 헛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레이디 비스컨이 검으로 기사를 이기다니.
흰 사자 기사단이 들으면 기분 상해할 소문이기도 했다.
“말도 안 돼.”
사람들은 배를 잡으며 남자의 말을 부인했다. 곧바로 가십의 주제는 유제니에게로 넘어갔다.
“최근에 파혼했죠?”
“렌시드 경과 약혼했다가요.”
“그거, 대체 누가 문제였던 거예요?”
“딱 보면 몰라요?”
제일 처음 입을 연 부인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렌시드 경은 어머니와 함께 사교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영지로 돌아갔잖아요. 그런데 레이디 비스컨은 수도에 남아 있죠.”
“새 구혼자도 나타났고요.”
누구 문제였는지 그것만으로 충분히 드러난다. 부인의 말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마다 들은 이야기가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게 사실인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말을 조심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구혼자가 셋이죠?”
“넷 아니었어요?”
“셋이에요.”
번즈 백작, 라이언 경, 하인즈 경.
뒤의 두 사람은 오라버니인 비스컨 남작의 친구들이다. 번즈 백작은 설명할 필요 없는 사교계 최고의 인기남이고.
번즈 백작만 보면 레이디 비스컨은 처음 사교계에 나왔을 때보다 더 나은 구혼자를 맞이한 게 된다.
“난 좀 이기적인 거 같아.”
그때, 가장자리에 서 있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이기적이라고? 누가?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하몬 부인.”
캐시 하몬 부인. 남편인 하몬 경이 상당한 자산가로 사업 수완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하몬 경이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건 전부 하몬 부인이 결혼할 때 가져온 지참금 덕분이다. 초기 사업은 그녀의 조언이 없었다면 하몬 경은 몇 번이나 파산했을지도 모른다.
“누가 이기적인가요?”
때문에 사람들은 하몬 부인에게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남자의 질문에 캐시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레이디 비스컨 말이에요. 그녀가 아무리 백작가라고 해도 한 번 파혼한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세 남자를 쥐고 흔드는 건 너무하지 않나요?”
그런가? 사람들의 시선이 부딪쳤다. 구혼자를 쥐고 흔든다고 하는 건 어폐가 있다. 물론 때때로 여러 구혼자에게 비싼 선물을 받아 내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결국 선물은 주는 사람의 선택이다. 비싼 선물을 줄 능력이 없거나 그러고 싶지 않다면 다른 사람에게 구혼하면 된다.
“그렇지 않아요? 사교계에 미혼인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가장 인기 있는 남자 둘을 양손에 쥐고 있잖아요.”
가장 인기 있는 남자를 둘이나 쥐고 있다고? 다시 사람들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한 명이 번즈 백작인 건 알겠다. 하지만 라이언 경과 하인즈 경 중 가장 인기 있는 남자가 누구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자 하몬 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그녀는 조급한 마음에 약간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번즈 백작과 비스컨 남작 말이에요.”
“하지만 하몬 부인, 비스컨 남작은 레이디 비스컨의 오라버니인데요?”
당연히 레이디 비스컨에게 구혼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하몬 부인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이상하잖아요? 왜 비스컨 남작은 약혼조차 안 하고 있는 거죠? 그 동생은 파혼까지 했는데 말이에요.”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제니가 검으로 사일록 경을 물리쳤다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레이디 비스컨이 자기 오라버니의 결혼을 막고 있다고요?”
그의 말에 하몬 부인은 잠시 멈칫했다. 그녀가 원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하몬 부인은 잠시 이번 사교 시즌에 데뷔한 딸을 떠올렸다. 당연히 상당한 지참금을 마련해 놓았다. 그녀의 욕심대로라면 딸은 상급 귀족과 약혼해야 한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번 사교 시즌에서 하몬 부인의 딸에게 구혼한 남자는 하나같이 별 볼 일 없는 놈들뿐이었다.
좀 가난해도 괜찮다. 집안이 괜찮다면 말이지.
그런 하몬 부인의 눈에 들어온 게 바로 비스컨 남작과 번즈 백작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 둘 곁에 있는 레이디 비스컨도.
“그, 그렇죠.”
쟨 뭔데 잘난 남자를 둘이나 끼고 있어? 하몬 부인의 불만이 튀어나왔다. 심지어 파혼까지 해서 흠이 난 여자 아닌가.
올해 사교계에 데뷔한 데다 두둑한 지참금까지 가진 그녀의 딸보다 한참 떨어지는 여자다. 게다가 결혼도 안 한 여자가 사업을 하겠다며 나대기까지 했다.
어느 모로 봐도 훨씬 나은 자신의 딸보다 저런 예쁘지도 않은 계집애가 레이디라는 칭호만으로 번즈 백작의 구혼을 받다니.
레이디 비스컨을 향한 불만이 다시 새록새록 솟아났다. 하몬 부인은 당당하게 말했다.
“자기보다 오라버니가 먼저 결혼하는 게 싫은 거죠. 그러니까 저렇게 심술을 부리고 있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