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29 – 2
그 순간, 클레어의 머릿속에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 자네는 기사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뒤통수를 맞은 듯한 클레어의 표정을 본 엘리엇이 피식 웃었다. 그건 암살자가 알현실까지 침입했을 때의 일이다. 금방 엘리엇이 달려왔지만 아주 짧은 순간, 클레어가 암살자의 검으로부터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을 지켜 냈다.
고작 그 한 수만으로 그녀는 클레어가 검술을 배웠다는 것을, 그리고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분은, 그럼….”
“어지간한 기사쯤은 혼자서 상대할 수 있지.”
어지간한 사람도 아니고 어지간한 기사다. 상상도 못 한 말에 클레어의 입이 딱 벌어졌다.
겉으로 보기로 유제니는 검은커녕 피를 보는 것조차 무서워할 것처럼 생겼다. 좀 창백한 피부에 얌전하고 조용한 아가씨니까.
하지만 유제니는 혼자서 기사 한둘 정도는 상대할 수 있다. 손에 검만 있다면 말이다.
놀란 클레어의 표정에 엘리엇은 킬킬대고 웃었다. 그도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그리고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어째서….”
클레어가 말을 잇지 못하는 이유를 깨달은 엘리엇의 웃음이 멈췄다. 어째서냐고? 그의 표정이 사라졌다.
“알잖나.”
감정 없는 목소리로 엘리엇이 말했다. 하지만 마치 땅 아래서 올라오는 듯한 목소리였다.
안다.
클레어는 입술을 깨물었다. 안다.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왜 그랬는지 안다. 비스컨 백작 때문이다. 그녀의 유일한 혈육. 그녀가 가장 사랑한 그녀의 마지막 가족.
“클레어, 엘리엇. 케이크 먹을래요? 요리사가 케이크를 구웠다는데….”
어두운 분위기를 깬 건 편지지와 펜을 들고 응접실에 고개를 들이민 유제니의 목소리였다. 클레어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눈물을 닦아 냈다.
그리고 엘리엇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물었다.
“무슨 케이크입니까?”
뭐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유제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클레어를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 그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당황하는 클레어를 대신해서 엘리엇이 말했다.
“라넌 경이 당신이 검술을 어디서 배웠는지 궁금해하더군요.”
“아, 에스컬레 경이요.”
유제니는 다시 응접실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케이크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뒤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찻잔을 들어 올리려다 멈췄다.
어느새 엘리엇이 그녀의 잔에 차를 따르고 있었다.
“올리버가 배울 때 같이 배웠어요.”
정작 올리버는 실력이 영 별로였다. 에스컬레 경이 혀를 차며 올리버는 검술보다는 달리기 연습을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으니까.
“그럼 당신이 검을 잘 다룬다는 걸 에스컬레 경과 비스컨 남작은 아는 건가요?”
클레어의 질문에 유제니는 잠시 생각하느라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의 부모님은 당연히 안다. 어쩌면 줄리아도 알 수도 있고.
“아마 그 당시부터 일했던 사람들도 알 거예요.”
집사인 빅스는 알 테지만 기억하고 있을지는 모른다. 그리고 그때 유제니와 대련 해 본 두어 명의 남자아이들도 있지만 잊어버렸을 수 있다.
“왜 저는 몰랐을까요?”
이어진 클레어의 질문에 유제니는 당황해서 엘리엇을 쳐다봤다. 왜 유제니가 검을 잘 다루는 걸 클레어는 몰랐냐고? 그야 두 사람은 모르는 사이였으니까다.
하지만 클레어가 묻는 건 다른 이유였다.
“상당한 실력이시잖습니까. 그 정도 실력이면 수도에 소문이 나고도 남았을 텐데요.”
비스컨 가의 아가씨가 기사 정도는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이라면 당연히 소문이 났을 것이다. 귀족들은 관심이 없다 해도 기사들 사이에서는 유명했어야 한다.
하지만 유제니의 검술 실력은 아는 사람이 없었다. 흰 사자 기사단에서도 사일록 경이 유제니에게 맞아 팔이 부러졌다는 소문이 돌자 다들 믿지 않았다. 사일록 경의 팔이 부러진 건 어디에 부딪혔기 때문이고 우연히 레이디 비스컨이 그 근처에 있었던 거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음.”
유제니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반쯤은 일부러 숨기기도 했다. 비스컨 백작 부인은 올리버를 붙잡고 동생의 검술 실력에 대해 떠들고 다니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올리버는 자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귀찮은 일들이 생길 것 같았거든요.”
유제니는 때마침 케이크를 가지고 들어온 하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포크를 집어 들었다. 손님이 오자 요리사가 재빨리 구워 낸 모양이다.
“귀찮은 일이요?”
클레어의 질문에 유제니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녀와 대련을 한 어느 가문의 후계자는 자기보다 한 살 어린 여자아이에게 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길 때까지 그녀와 싸우려 들었다.
종래에는 지나가는 유제니를 밀어 넘어트리려고까지 했다.
“실력을 보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았대요.”
유제니가 기억하는 건 아버지의 친구였다. 어느 날 갑자기 저택을 찾은 아버지의 친구는 인사를 하러 내려온 유제니에게 네 실력을 한 번 보고 싶다고 했다.
그걸 본 백작 부인은 불같이 화를 냈고.
“호기심이거나 의심이죠.”
엘리엇의 말에 유제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여자애가 검을 휘두르면 얼마나 휘두르겠냐는 호기심.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자기보다 나이 많은 남자아이들을 이겼냐는 의심.
“어머니는 그게 제 인생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하셨어요.”
그건 유제니도 동감이다. 그녀가 검으로 먹고살 게 아니라면 검을 잘 다룬다는 소문이 나는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다.
“당신도 알지 않아요?”
유제니의 질문에 멍하니 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클레어는 멈칫했다. 그렇다. 그녀는 유제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
“기사가 된 뒤, 갑자기 도전하는 사람이 생겼죠.”
기사단 내·외부적으로 그랬다. 같은 기사뿐 아니라 기사가 아닌, 무기 좀 쓴다 하는 사람들도 덤볐다.
“엘리엇도 알고요.”
유제니는 엘리엇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그 미소를 따라 웃었다. 그리고 곧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전 괜찮았습니다. 좀 귀찮긴 하지만 기사가 아니라서요.”
실제로 엘리엇에게 덤빈 자들은 최소한 어디 한 군데는 부러졌다. 그게 엘리엇의 악명을 높였다.
게다가 엘리엇의 손속에 자비가 없다는 소문이 퍼지자 덤비는 놈들이 사라졌다. 클레어와 유제니는 성격과 위치상 그렇게 잔인하게 손봐 줄 수 없으니 소문이 나는 한 덤비는 사람들이 계속 나올 것이다.
“어쨌든 그래서 드러내지 않고 있어요. 게다가 에스컬레 경도 검을 들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했고요.”
에스컬레 경이 검을 들지 말라고 했다는 말에 클레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사람이라면 그럴 만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녀에게 유제니가 재빨리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 클레어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는 아니에요.”
“아닙니까?”
“네. 내가 좀, 검을 쥐는 게 맞지 않아서 그래요.”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어리둥절해하는 클레어에게 엘리엇이 말했다.
“다정해서 그렇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놀란 클레어와 더 놀란 유제니가 엘리엇을 쳐다봤다. 엘리엇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상대방이 다칠 걸 걱정하거든.”
“그냥 피가 싫은 거예요.”
유제니의 말에 클레어의 눈이 가늘어졌다. 유제니는 피를 싫어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다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다치는 게 싫으신 거군요.”
왜 몰랐을까. 전쟁 중에 부대의 반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밤새도록 침실에 틀어박혀 울던 그녀를 기억한다. 그전에는 뭔가가 요란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고.
처음에는 클레어도 다른 사람들처럼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진 것 때문에 화가 나서 그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누군가가 다친다는 걸 용서할 수가 없었던 거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다치는 게 싫은 거예요.”
유제니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에스컬레 경은 상대가 다칠까 봐 머뭇거리는 유제니를 보고 무르다고 말했다. 그녀와 대련한 남자아이는 위선자라고 비난했고.
그녀는 그냥, 누군가가 다치는 게 싫었다. 그것도 자신의 손에 다치는 게 너무 끔찍했다.
그게 검을 들지 않는 이유 중 하나였다.
“아가씨.”
그때 집사가 응접실 문을 두드린 뒤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의사 선생님이 오셔서요.”
올리버의 치료를 위해 의사가 방문했다. 유제니는 엘리엇과 클레어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남이 다치는 게 싫다면 소문이 나는 게 그리 나쁜 일은 아닐 것 같은데요.”
다시 둘만 남자 클레어가 말했다. 나한테 하는 말인가? 엘리엇은 그녀가 자신에게 말을 건 횟수가 잦다는 사실에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렇다고 굳이 소문을 낼 필요도 없지.”
유제니가 불필요한 관심의 중심에 서는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다. 그녀의 말대로 호기심과 의심으로 그녀를 괴롭히려는 사람들이 늘어날 테니까.
“하지만 레이디 비스컨의 검술 실력이 대단하다는 걸 사람들이 알면 그녀를 좀 더 존중할 거 아닙니까.”
클레어의 지적에 엘리엇의 입술이 비틀렸다.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 어떤 한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면 확실히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기는 한다.
하지만 과연 그게 좋은 일일까.
“레이디 비스컨은 검술 능력 없이도 존중받을 사람이네. 그녀를 존중하지 않는 머저리들에게 자신을 증명할 필요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