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6화 (131/239)

136화. 29 – 1

올리버 비스컨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 사흘간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조금 쇠약해져 있었을 뿐이다. 물론 얼굴에 멍이 들고 코가 부러지긴 했다.

하지만 그건 올리버가 겪었던 일에 비하면 아주 작은 피해일 뿐이었다.

사과를 하러 온 사일록 경과 말다툼을 벌이다가 화가 난 사일록 경이 그를 때렸다. 그대로 뒤로 넘어진 올리버는 기절했고.

욱해서 때리긴 했지만 그를 죽일 생각은 없었던 사일록 경은 크게 당황해서 올리버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그 역시 어떤 계획 같은 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시체를 숨긴다거나 할 의도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클레어는 담담하게 유제니 앞에서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듣던 비스컨 백작 부인은 도저히 못 듣겠다며 이 층으로 올라간 뒤였다.

유제니는 올리버가 죽었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면 왜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냐고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실제로 사일록 경은 올리버를 살리려 했다. 의사를 찾았으니까.

물론 사흘이나 지난 뒤였고 입이 무거운 의사를 아주 조용히 찾았다는 게 문제지만.

“그래서 저쪽이 뭘 원하는 거예요?”

대신 유제니는 다른 것을 물었다. 클레어는 지금 흰 사자 기사단과 사일록 가문의 입장을 비스컨 가에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도 원한 건 아니었다. 사일록 가문의 부탁은 바로 잘라 냈다. 가해자의 입장 따위는 전달할 생각이 없다고 말이다.

문제는 흰 사자 기사단의 단장인 에스마 경의 요청이었다. 그는 클레어가 레이디 비스컨과 가깝다는 것을 알아내서 클레어에게 간곡하게 요청했다.

흰 사자 기사단과 비스컨 가의 중재를 해 달라고.

물론 클레어는 그것도 거절했다. 만약 계속 중재를 요청한다면 기사단을 그만두겠다고도 말했다.

“그건 저도 모릅니다.”

클레어의 말에 유제니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저쪽의 입장을 전달하러 왔으니 저쪽의 요구도 전달할 줄 알았는데?

클레어는 유제니의 표정을 보고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녀도 하고 싶어서 전달한 게 아니다.

하지만 에스마 경이 간곡하게 부탁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를 기사단에 받아 줬으니 이 정도 보답은 해야 하지 않냐고 했다.

“입장만 전달하겠다고 했습니다. 이게….”

뭐라고 해야 할까. 기분이 더럽다고? 하지만 클레어는 레이디 비스컨 앞이라는 것을 상기하고 단어를 골라 말했다.

“저도 내키지 않아서요.”

저들의 요청을 듣는 건 클레어가 전달한 입장을 들은 비스컨 가에서 결정할 일이다. 클레어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가해자의 입장을 들어 준다니. 얼마나 관대한가.

머리 아프다는 클레어의 얼굴을 본 유제니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도 머리가 아프지만, 클레어만큼 곤란하지는 않다.

어쨌건 비스컨 가는 피해자니까. 사일록 가와 흰 사자 기사단이 어떻게든 일을 수습하려 할 테지만 유제니와 그녀의 어머니는 그냥 넘어가 줄 생각이 없다.

최소한 사일록 경의 기사단 퇴출과 공식적인 사과를 원한다. 물론 이 두 개 모두 무조건 이뤄질 것이라고 에스컬레 경이 약속했다.

에스마 경은 사일록 후작의 부탁을 받았겠지.

“고마워요.”

유제니는 클레어에게 그만 앉으라고 손짓하며 말했다. 아까부터 앉으라고 했는데 별로 좋은 이야기가 아니니 서서 하겠다고 했다.

클레어가 그녀의 맞은편에 앉자 유제니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에스컬레 경의 권유를 거절했다면서요.”

에스마 경의 부탁을 받은 클레어처럼 유제니도 에스컬레 경의 부탁을 받았다. 클레어는 유제니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금세 알아차렸다.

“네.”

“왜 거절했는지 물어도 돼요?”

거기까지 물어본 유제니는 자신의 옆에 엘리엇이 앉아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재빨리 그에게 설명했다.

“에스컬레 경이 클레어에게 검은 늑대 기사단으로의 이적을 권했대요.”

“아하.”

이미 눈치채고 있었지만 엘리엇은 그제야 알았다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물론 그는 라넌 경이 검은 늑대 기사단에 들어가건, 흰 사자 기사단에 들어가건 관심 없다. 아니, 아예 그녀가 기사가 아니라 해도 관심 없다.

하지만 유제니는 아니다. 유제니가 관심 있는 거라면 엘리엇도 관심이 있었다. 관심 있는 척이라도 할 수 있다.

“제가 검은 늑대로 가기를 원하십니까?”

유제니의 시선이 자신에게 돌아오자 클레어가 물었다.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건 반칙이다. 유제니는 상대가 올리버였다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클레어는 올리버가 아니다. 유제니는 클레어가 왜 그렇게 묻는지 몰라서 말했다.

“에스컬레 경이 한 번 더 설득해 달라는 부탁을 했거든요.”

“설득하실 겁니까?”

클레어의 질문에 유제니는 고개를 저었다. 클레어의 인생이고 그녀의 선택이다. 물론 흰 사자보다는 검은 늑대 쪽이 좀 더 영예로운 자리긴 하다. 그리고 봉급도 좀 더 높고.

“더 좋은 자리라고 생각했는데 거절한 이유가 궁금해서요. 에스컬레 경도 궁금해했고요.”

유제니의 말에 클레어는 인상을 썼다. 왜 거절했냐고? 배신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흰 사자 기사단은 말대로 난리가 났다. 사일록 경은 흰 사자 기사단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사 중 하나였다. 사일록 후작의 조카에 부유하고 실력도 나쁘지 않은 기사기 때문이다. 그를 따르는 기사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 사일록 경이 비스컨 남작을 살해하려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거기에 사일록 경을 따르는 기사들도 엮여 있고.

에스마 경이 괜히 클레어에게 중재를 요청한 게 아니다. 잘 하면 흰 사자 기사단은 기사의 태도를 검증받아야 할 수도 있다. 즉, 흰 사자 기사단의 모든 기사는 행적을 조사받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덕분에 흰 사자 기사단의 기사들은 난리가 났고 자신들의 행적 중 문제가 있는 행적이 있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자신만 검은 늑대로 이적한다는 건 배신처럼 느껴졌다.

“그건 배신이라고 하면 안 되죠.”

유제니의 말에 클레어는 고개를 저었다. 배신이다. 적어도 그녀가 보기엔.

“그리고 에스컬레 경이 제게 이적을 권한 건 제가 비스컨 남작을 구하는 걸 도왔기 때문이잖습니까.”

그런가? 유제니는 인상을 썼다. 그녀는 에스컬레 경이 왜 클레어에게 검은 늑대로 오라고 했는지 정확하게는 모른다.

“그렇다면 저는 특혜를 받아 기사단을 배신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이어진 클레어의 말에 유제니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 했다. 그게 왜 특혜라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클레어에게는 모든 것이 명확했다. 에스컬레 경은 이미 한 번 실력이 검증된 그녀를 탈락시켰다. 이번에 불러오려고 하는 건 그녀가 에스컬레 경과 친한 비스컨 가의 사람을 구하는 걸 도왔기 때문이다.

이건 특혜다. 그리고 그 특혜를 이용해서 흰 사자 기사단에서 빠져나가 검은 늑대 기사단으로 가는 건 배신이다.

“흰 사자 기사단에 소속감을 가지고 있는 건 이해해요.”

그때, 유제니가 말했다. 소속감이라고? 클레어는 그녀의 말에 깜짝 놀라서 그녀를 쳐다봤다. 소속감? 내가 기사단에 소속감을 가지고 있어?

유제니 역시 클레어의 놀란 표정을 발견했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그렇게 놀라요?”

“그게, 제가 소속감을 가지고 있는 줄을 몰랐습니다.”

“당연히 가지고 있겠죠.”

몰랐다는 클레어의 말에 오히려 유제니가 어리둥절해서 말했다. 클레어는 몇 달간 흰 사자 기사단의 기사로 지냈다. 기사들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는 거기서 지낸 시간이 있는데 소속감이 생기지 않을 리가 없다.

그렇구나.

클레어는 유제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없애겠습니다.”

“아니….”

소속감을 없애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유제니는 도와달라는 신호로 엘리엇을 돌아봤지만, 그는 모르는 척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럴 때 도움이 안 되네. 한숨을 내쉰 유제니는 다시 클레어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소속감을 갖는 건 좋은 거잖아요.”

“전 그런 거 필요 없습니다.”

기사단은 레이디 비스컨을 좀 더 가까운 곳에서 효과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니 그녀가 소속감을 가진다면 그건 오직 레이디 비스컨뿐이어야 한다.

클레어는 자신을 탈락시킨 에스컬레 경을 이해했다. 왕을 지켜야 할 검은 늑대 기사단이 레이디 비스컨에게만 충성을 한다는 건 안 좋은 걸 넘어서서 위험한 행동이다.

“괜찮습니다. 전 흰 사자 기사단으로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그냥 흰 사자 기사단에 있는 게 낫다. 클레어는 그렇게 판단했다.

어쩐지 되레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된 것 같아서 유제니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게 클레어의 결정이라면.

“잠깐 편지지 좀 가져올게요.”

에스컬레 경에게 잘 안 됐다고 편지를 보내야 할 것 같다. 그는 아마 유제니가 클레어를 설득해 주길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유제니가 편지지를 가져오기 위해 자리를 비우자 응접실 안에는 침묵이 이어졌다. 서로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두 사람은 말없이 차를 홀짝이며 유제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때, 클레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뭐를? 엘리엇은 말없이 표정만으로 물었다. 클레어는 며칠 전, 사일록 경의 저택에서 본 충격적인 장면을 떠올렸다.

레이디 비스컨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사일록 경에게 아마 팔이 부러졌을 거라고 했지.

실제로 사일록 경은 팔이 부러졌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전신에 상당한 타박상을 입었다. 그게 전부 레이디 비스컨의 소행이란다.

사일록 경이 흰 사자 기사단의 최고 실력자는 아니라고 해도 그는 누군가를 지킬 수 있는 실력을 가졌다. 고작 지팡이를 든 일반인에게 두들겨 맞을 정도의 실력은 아니라는 말이다.

클레어의 질문에 엘리엇은 잠시 “흠” 하고 그녀를 쳐다봤다. 아마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유제니의 검술 실력이 대단하다는 건.

“자네가 기사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가 뭐지?”

뜬금없는 질문에 클레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똑같은 질문을 에스컬레 경도 했다. 레이디 비스컨을 지키기 위해서다.

하지만 클레어가 대답하기 전에 엘리엇이 다시 물었다.

“자네에게 기사가 되면 좋겠다고 권한 사람이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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