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4화 (129/239)

134화. 28 – 5

잠깐. 그러고 보니 전에 에스컬레 경이 그랬다. 사일록 경이 올리버에게 사과하러 올 거라고. 왔던가?

안 왔다. 그가 오지 않은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사과하러 오기엔 자존심이 상했나 보다 하고 비웃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올리버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맙소사.”

나는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신음을 내뱉었다. 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사일록 경과 비스컨 남작 사이에 또 무슨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엘리엇이 물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를 바라보았다.

잘 모르겠다. 내가 억측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도망친 남자와 기절한 남자는 의사를 찾았다. 그것도 입이 무거운 의사를.

혹시 사일록 경과 올리버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올리버에게 의사가 필요한 거라면.

“유제니?”

나는 그대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울타리를 뛰어넘었는지 엘리엇은 금세 나를 따라잡아서 물었다.

“치안관에게 가시는 거라면….”

“아니요. 집으로 갈 거예요.”

엘리엇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왜 집으로 가냐는 표정이었지만 그는 말없이 마차를 불러와 주었다.

“유제니? 빨리 돌아오셨네요?”

아직 근신 중인 클레어는 우리 집 손님 방에 머물고 있다. 적어도 팔이 나을 때까지는 있어야 한다고 어머니께서 주장하셨기 때문이다.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그녀는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친 상태였다. 그녀는 내 귀가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엘리엇을 발견하고 인상을 쓰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무도회에 가자마자 돌아왔는데 엘리엇까지 같이 왔으니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다.

“사일록 경이요. 어디 사는지 알아요?”

느닷없는 질문에 클레어의 얼굴이 멍해졌다가 일그러졌다. 그녀는 내게 대답하려다 말고 엘리엇을 쳐다보더니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대충은요. 위험한 일인가요?”

그건 아니다. 아닌가? 나는 잘 모르겠어서 입을 다물었다. 의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위험한 일일지도 모른다.

“저도 같이….”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클레어가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렸다. 나는 재빨리 그녀의 다치지 않은 팔을 잡으며 말했다.

“주소만 알려 줘요.”

“팔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그녀의 팔이 다쳐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것도 이유긴 하다. 하지만 클레어에게 부탁할 일은 따로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클레어는 다른 일을 해 줘야 해요.”

더 중요한 일이다. 나는 그녀에게 무도회에서 엿들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리고 사일록 경의 집으로 에스컬레 경과 의사를 불러와 달라고 부탁했다.

“제 억측일 수도 있지만요.”

그렇다 해도 정말 거기에 올리버가 감금돼 있다면, 그리고 다쳐 있다면 의사가 필요하다. 클레어는 금세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엘리엇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레이디 비스컨 곁을 떠나지 마요.”

엘리엇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두 사람은 사이가 나쁜 건지 좋은 건지 모르겠다니까.

나는 클레어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키고 다시 엘리엇과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애매한 시각이다. 저녁 무도회가 시작되고 한 시간쯤 지났으니까 아직 사람들은 춤을 추고 있을 거다. 그리고 엘링서처럼 무도회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슬쩍 빠져나올 시각이기도 했고.

우리는 아무도 없는 도로를 빠르게 달려 클레어가 이야기해 준 주소로 향했다. 엘리엇은 마차 한쪽 구석에 놓아 두었던 지팡이를 집어 들더니 그걸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계획? 그런 건 없다. 나는 그의 질문을 받고서야 내가 아무 계획 없이 뛰어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올리버의 이름을 듣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음, 문을 두드리고 예의 바르게 물어볼까요?”

올리버가 여기 있는지 물어보는 거지. 말도 안 되는 생각에 나는 피식 웃었다. 올리버가 여기 있는지 물어보면 퍽이나 알려 주겠다.

하지만 엘리엇은 웃지 않았다. 내가 그를 쳐다보자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괜찮은 생각입니다.”

이 남자, 날 너무 믿는 거 아냐? 나는 그의 긍정적인 반응에 놀라 입을 딱 벌렸다. 그리고 재빨리 말했다.

“아니, 아무 생각 못 했어요. 그냥 한 말이에요.”

날 그렇게 신뢰하면 곤란하다. 나도 날 못 믿는단 말이다. 하지만 엘리엇은 꿋꿋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좋은 생각 같습니다.”

“뭐라고요?”

“당신이 나타나면 저들이 방심할 테니까요. 그걸 노리는 거죠.”

괜찮은 생각 같다. 올리버를 찾기 위해 여동생이 나타나면 저들이 당황하겠지. 그걸 노리면….

“아니면.”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의사가 되는 거죠.”

엘리엇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 그 남자들이 말하지 않았던가. 입이 무거운 의사를 찾는다고.

곧이어 엘리엇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은 것처럼 씩 웃었다. 그는 자신의 지팡이를 내게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유제니 의사 선생님.”

어, 내가 의사가 되는 거야?

“당신이 아니고요?”

“제 얼굴은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 둘 다 귀족이니 저들이 우리의 얼굴을 알고 있을 수 있다. 어디선가 만났을 수 있으니까.

“기사들과 몇 번 부딪친 적이 있거든요.”

그러고 보니 엘리엇이 처음 수도에 나타났을 때 기사들과 싸우는 바람에 신문에 조금 안 좋게 실린 적이 있다. 올리버는 용과 싸워 이긴 남자니 실력이 어떤지 궁금한 모양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차가 멈췄다. 엘리엇은 내 손에 자신의 지팡이를 쥐여 주며 덧붙였다.

“저 집 안에서 당신보다 의학 지식이 많은 사람은 없을 테고요.”

그러길 빈다. 나는 먼저 내린 엘리엇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마차를 보낸 뒤 클레어가 알려 준 집 문을 두드렸다.

“누구십니까?”

다행히 문을 연 사람은 처음 본 남자였다. 집사인가 보다. 나는 허리를 세우고 말했다.

“사일록 경을 만나러 왔네.”

“누구십니까?”

이 늦은 시간에 방문하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 빅스였다면 다음에 오라고 단칼에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일록 경의 집사는 누구냐고 물었다.

“사일록 경이 의사를 구한다고 하던데. 비, 아니.”

하마터면 비스컨이라고 말할 뻔했다. 내가 입을 다물자 집사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비아니?”

“그래. 비아니 의사일세.”

먹힐까? 나는 의심스럽다는 집사의 표정에 뭐가 문제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의사라고?”

여자 의사는 처음 보는 모양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딱 한 번 봤다. 새벽에 몰래 들어오던 올리버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의사를 불러야 했거든.

나는 그가 내 말을 의심하는 것 같자 먼저 입을 열었다.

“입이 무거운 의사를 구한다고 하던데. 아니었다면 그냥 돌아가지.”

이건 도박이다. 사일록 경의 집사는 나를 믿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는 집사일 뿐이다. 사일록 경이 어떤 지시를 내려 놨느냐에 따라 다르다.

이 늦은 시간에 제 발로 찾아온 입이 무거운 의사를 집사가 주인 허락도 없이 되돌려 보낼 수 있을까?

“아니, 잠시, 잠시만요.”

내 생각대로 집사의 태도가 누그러졌다. 그는 아까보다 훨씬 조심스러운 태도로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아닌가 보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엘리엇이 숨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집사의 눈에 띄지 않도록 벽에 바짝 붙어 있었다.

“기다려 보죠.”

엘리엇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을 때였다. 곧바로 다시 안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문을 연 집사가 말했다.

“들어오십시오.”

내가 집 안으로 들어오자 집사는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엇. 엘리엇이 들키는 줄 알고 긴장했는데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돌아오더니 오른쪽 복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사일록 경을 만나러 가는 걸까. 문득 사일록 경이 내 얼굴을 알던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사일록 후작의 저택에서 열린 무도회였다. 거기서 내게 춤을 청했지만 내가 거절했다.

그때는 어닝과 약혼 중이었거든. 어닝과 첫 춤을 춰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 번째 춤이라면 가능하다고 말했는데 사일록 경의 얼굴이 벌게지더니 그냥 가 버렸었지.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이유와 상관없이 거절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

나와의 일을 사일록 경이 기억하고 있을까? 잘 모르겠다. 일단 난 오늘까지 잊고 있었거든.

“사일록 경을 만나러 가는 게 아닌가?”

이 층으로 올라온 집사는 나를 복도 끝에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척 봐도 문이 주인 가족이 쓰는 침실 문이 아니다.

내 질문에 집사는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주인님의 손님이 상태가 좋지 않아서 부른 겁니다. 의사 선생님은 환자만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허. 이 안에 있는 게 사일록 경이 아닌 건 확실하게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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