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2화 (127/239)

132화. 28 – 3

약간의 시간 끝에 엘리엇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그는 꿈에 나온 나는 지금의 나와 상관없는 존재라고 말했지.

“그럼 나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것처럼 말해요?”

오.

나는 말을 잃은 엘리엇을 보고 내가 정곡을 찔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나서 처음으로 엘리엇은 할 말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지금의 그 행동 때문에 나는 엘리엇이 왜 그렇게 꿈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른 사람이라고 부정했는지 깨달았다.

그거 나였구나.

엘리엇이 보기에도 꿈속의 나는 진짜 나였던 거다. 그야 예지몽이니까 당연하겠지.

하지만 그는 내가 꿈속의 나처럼 되지 않았으면 하고 있는 거다. 왜냐하면.

“꿈속의 내가 불행하군요?”

두 번째로 엘리엇은 할 말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노려본다기보다는 겁을 집어먹은 것처럼 보였다.

“아니요.”

낮고 약간 쉰 것 같은 목소리가 엘리엇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신은 불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당신다웠죠.”

흠.

결국 엘리엇도 꿈의 내가 지금의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데 동의하는 거다. 나는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인상을 쓰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요.”

해가 지는지 마차 안은 어슴푸레했다. 창밖을 쳐다보자 밖은 주황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엘리엇의 파란 눈동자만 반짝인다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그게 정말 나일까요? 당신의 꿈이 예지몽이 아니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요. 가끔 당신이 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좀….”

과장돼 있다?

아니, 그보다는 좀 더 뭐라고 할까.

정확하게 무슨 단어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주 잠깐 숭배라는 단어가 떠올랐지만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어 그 단어를 털어 냈다.

꿈의 내가 나와 한 토막이라도 비슷하다면, 숭배라는 단어는 너무 부담스럽다.

“내가 아닌 것 같거든요. 아니면, 위기의 상황에서 내가 그렇게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이 된다는 말인데….”

그럴 수도 있나? 가족이 모두 죽고 나라가 멸망하기 직전에 왕이 돼서 마녀라고 불리면서 엘리엇의 숭, 아니, 신뢰를 받는다고?

난 겁도 많고 약간은 이기적인 평범한 사람이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질문 하나만 해도 됩니까?”

뜬금없이 엘리엇이 말했다. 질문? 지금?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엘리엇이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지금 당장 전쟁이 나서 당신의 부모님은 사망했고 비스컨 남작이 전쟁터로 나간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별로 좋은 가정은 아니네. 나는 엘리엇의 질문에 인상을 썼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다. 어쩐지 그게 예지몽과 이어져 있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보자. 전쟁이 나서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그다음에 올리버가 전쟁터로 나갔다는 말이지? 그럼 올리버는 이미 부모님이 돌아가신 걸 알고 있다는 말이다.

나는 “끙”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내가 할 일은 단 하나뿐이다.

“델베키쉬와 컨서런트로 가야죠.”

아버지의 영지다. 정확히 말하면 비스컨 백작의 영지다. 대대로 비스컨 백작과 백작 부인이 다스렸고 백작 부부의 부재중에는 그 아들이 다스려야 한다.

그리고 아들도 전쟁에 나갔다면 그다음은 나다. 나는 레이디 비스컨이니까.

“전쟁의 영향이 거기까지 미칠지는 모르지만 나는 비스컨 가의 사람이니까요. 올리버가 돌아올 때까지 영지와 사람들을 책임져야죠.”

영지를 돌봐야 한다. 사람들이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살피고 세금을 걷어 가뭄과 장마를 대비해야 한다. 관개수로나 도로를 정비하고 전쟁의 추이를 살펴야 한다.

만약 전쟁의 여파가 영지까지 온다면 영지민들과 싸울지, 그들을 피난시킬지 선택할 사람은 나뿐이니까.

고개를 든 엘리엇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약간은 벅찬 표정 같기도 했다. 동시에 슬픈 것 같기도 했고 기쁜 것 같기도 했다.

엘리엇은 한참을 나를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렇군.

그의 태도로 나는 꿈의 나도 같은 행동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도 정확하게 내가 할 일을 했다.

“레이디 비스컨.”

무도회를 개최한 하몬 부인은 내가 엘리엇과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활짝 웃으며 내게 다가오다가 엘리엇을 보고 멈칫했다.

그리고 엘리엇에게 말했다.

“레이디 비스컨과 함께 왔군요? 초대를 거절하기에 안 오는 줄 알았는데.”

그랬어? 나는 엘리엇을 쳐다봤고 그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안 오려고 했습니다. 춤추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춤추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줄은 몰랐다. 나와 무도회에서 만났을 때는 항상 춤을 췄던 것 같은데. 나는 재빨리 그를 위해 하몬 부인에게 변명했다.

“하인즈 경과 오려고 했는데 어제 발목을 다쳤다고 하더라고요. 급하게 부탁했어요.”

“어머, 다정하기도 하지.”

엘리엇의 냉정한 말에 그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하몬 부인의 표정이 순식간에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녀는 엘리엇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와 함께 걸으며 말했다.

“번즈 백작에게 고마워해야겠군요.”

누가? 나는 하몬 부인을 쳐다봤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춤추는 걸 싫어하는데도 당신이 부탁하니까 와 줬다면서요. 고맙지 않아요?”

그렇긴 하다. 하지만 그걸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하몬 부인과 똑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 저도 춤추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아요.”

내가 여기 온 건 하몬 부인이 부디 참석해 달라고 초대장을 길고 정성스럽게 써서 보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인즈 경이 다쳤다고 했을 때 참석을 취소하지 않고 엘리엇에게 부탁한 거다.

그러니 하몬 부인은 내게 엘리엇에게 감사하라고 할 게 아니라 엘리엇을 데리고 와 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그 부분은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나를 돌아본 하몬 부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하몬 부인이 다른 사람과 인사를 나눠야겠다며 떠나자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지 엘리엇이 다가왔다. 하몬 부인과 있었던 일을 그가 알 필요는 없다. 나는 별일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고 그는 눈을 가늘게 떴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하몬 경이나 하몬 부인을 알아요?”

나는 엘리엇과 함께 무도회장으로 꾸며진 홀의 가장자리를 걸으며 물었다. 나는 잘 모른다. 하몬 부인에게 초대장이 온 건 그녀와 어머니가 같은 모임 소속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머니도 하몬 부인과 친분이 있는 건 아니고. 봉사 모임이라 하몬 부인은 활동 대신 많은 기부금을 내고 있어서 어머니와 만난 적은 별로 없다고 했다.

“하몬 경은 압니다.”

엘리엇은 그렇게 말하며 왼쪽 팔을 들어 내 앞을 막았다. 덕분에 맞은편에서 오던 사람들과 내가 부딪치는 일을 막을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던 모양이다. 나와 부딪칠 뻔한 남녀가 사과를 했고 나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엘리엇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제게 사업 권유를 하더군요.”

“같이 하자고요?”

“정확하게는 자신이 하는 사업에 얼굴을 내밀어 주길 바라는 것 같았습니다.”

흠. 괜찮은 생각이다. 하몬 경은 굉장히 부유하니까. 그의 돈과 엘리엇의 이미지를 합치자는 거겠지.

나와 비슷한 상황 같은데. 나는 그의 배를 사용해서 여자들만 들어올 수 있는 수영장을 열었다. 그리고 배 값을 지불했지.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무슨 사업이었을지 궁금하다. 엘리엇의 이미지를 이용한 사업이라. 흠. 클럽? 무기?

“거절했습니다.”

“어째서요?”

“얼굴마담은 저와 안 어울려서요.”

뭐라고? 뜬금없는 단어에 나는 얼떨떨해서 걸음을 멈췄다. 얼굴마담?

내가 걸음을 멈춘 것을 깨달은 엘리엇 역시 걸음을 멈췄다. 그는 나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아, 얼굴마담이 뭐냐면….”

“알아요.”

그게 뭔지는 안다. 내가 멈춘 건 그 단어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엘리엇의 잘생긴 얼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안 어울린다고요?”

엘리엇은 내가 왜 묻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다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 얼굴로 할 수 있는 수많은 일 중의 하나 아닌가요?”

아주 잠깐, 엘리엇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금세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만에 나를 따라잡았다.

그리고 내가 손을 얹을 수 있도록 팔을 내밀며 물었다.

“그 얼굴이요?”

모르는 척한다. 나는 엘리엇을 흘겨보며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그는 소년처럼 웃더니 홀 안쪽으로 몸을 돌리며 다시 물었다.

“파트너로 불러 주셨으니 첫 춤은 제게 기회를 주시겠죠?”

당연하다. 첫 춤은 파트너와 추는 게 예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와 함께 사람들 사이를 헤쳐 원 가운데로 다가갔다.

“아, 혹시 최근에 올리버를 본 적이 있나요?”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다. 나는 엘리엇과 마주 보고 서서 인사를 한 뒤 재빨리 물었다. 그는 내 허리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비스컨 남작이요? 아니요. 무슨 일 있습니까?”

어디까지 말해도 될지 모르겠네. 내가 인상을 쓰자 엘리엇이 재빨리 말했다.

“말하기 곤란하시다면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에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그래요.”

딱히 비밀도 없다. 올리버가 범죄자도 아니고. 나는 엘리엇에게 간단하게 설명했다. 올리버가 며칠째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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