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28 – 2
올리버는 그날 저녁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클럽의 지배인에게 물어본 집사는 올리버가 클럽에 오지 않았다는 답을 가지고 돌아왔다.
“어떻게 할까요?”
빅스의 질문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삼일 전부터 못 봤다고 한다. 설마 어느 노름판에서 취해서 자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내 오라버니가 그렇게 멍청한 작자는 아니라고 믿는다. 열아홉 살 땐가, 올리버는 호기심에 노름판에 들어갔다가 호되게 혼나고 돌아왔다. 그때 그는 평생 모은 용돈을 전부 잃었고. 그 용돈은 마차를 사고 싶어서 모으던 거였다.
다행인 건 그걸로 올리버가 정신을 차렸다는 거다. 내가 아는 한, 올리버는 노름판에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두 번 친구들과 카드 게임을 하기는 하지만.
“어머니께는….”
“아직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 말은 빅스도 이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친구들 집은요? 라이언 경은….”
“오늘 만나셨잖습니까.”
그랬다. 오라버니의 친구 라이언 경은 몇 시간 전에 나를 만나러 왔다. 만약 올리버가 그의 집에 있었다면 이야기를 했겠지.
“다른 친구는요?”
“사람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포스터 경과 스미스 씨도 최근에 못 봤다고 하셨습니다.”
“조정은요?”
조정 클럽도 있다. 올리버가 클럽과 마찬가지로 거의 매일 방문하는 곳. 집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실, 거기서 먼저 연락이 왔습니다. 도련님께서 지난번 연습에 빠졌다고 하더군요.”
“말없이요?”
네. 집사의 대답에 나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렇게 되면 올리버가 갈 만한 곳은 다 확인해 본 거다. 대체 어디로 간 거지?
머릿속에 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 열린 문틈 사이로 어머니가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유제니, 준비하고 있니?”
“네?”
엄마야. 나는 깜짝 놀라서 거의 팔짝 뛰었다. 그러자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온 어머니가 빅스를 발견하고 물었다.
“빅스? 여기서 뭐 해?”
“아, 그게….”
“출출해서요.”
나는 재빨리 끼어들었다. 아직 올리버가 행방불명됐다는 걸 어머니께 말해도 될지 결정을 못 했다.
“출출해?”
어머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는 눈동자를 굴리다가 말했다.
“어, 네. 좀 있다가 춤출 거니까 뭘 좀 먹고 가야 할까 싶어서 빅스에게 간단하게 먹을 게 있는지 묻고 있었어요.”
“그러게, 저녁 더 먹으라니까.”
어머니의 얼굴이 엄해졌다. 아까 저녁 식사를 대충 먹었더니 그러시는 거다.
하지만 춤을 출 거라면 좀 가볍게 먹어야 한다. 사람이 많은 홀에서 춤을 추고 나면 꼭 속이 안 좋아진단 말이지.
“샌드위치 가져오라고 하마.”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방을 나갔다. 세상에. 나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빅스가 괜찮겠냐는 표정으로 물었다.
“입맛 없으시잖습니까.”
“괜찮아요. 한입 먹죠, 뭐.”
아니면 먹은 척하고 숨겨 뒀다가 올리버의 방에 두면 된다. 그러면 새벽에 들어온 올리버가….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어떻게 된 거지?
“유제니.”
엘리엇은 계단 아래에 서 있었다. 오늘 저녁 무도회의 파트너기 때문이다. 원래는 하인즈 경과 같이 가기로 했는데 그가 어제 넘어지면서 발목을 삐었다나 뭐라나.
고맙게도 무도회에 같이 가 줄 수 있는지 연락을 하자 엘리엇은 곧바로 와 주었다. 다른 초대라면 어머니나 줄리아와 가도 되지만 무도회는 남자와 가야 한다. 이미 주최자에게 파트너를 데리고 간다고 답장을 보내 놨거든.
당일에 혼자 가 버리면 주최자가 곤란해진다. 성비가 안 맞으니까.
하지만 이상한 일이지. 지난번에 나와 음악회를 가기로 했던 라이언 경도 발을 다쳐서 약속을 취소했다. 그때는 어머니와 함께 갔고.
혹시 나한테 저주 같은 게 걸려 있는 건 아닐까? 내게 구혼하는 남자들에게 불운이 닥치는 저주 같은 거.
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면서 엘리엇에게 물었다.
“오래 기다렸어요?”
“방금 왔습니다.”
엘리엇은 그렇게 말하며 팔을 내밀었다. 응? 내가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짓자 그가 말했다.
“위험하니까 천천히 내려오세요.”
이 남자는 나를 어린아이나 할머니로 보는 게 아닐까. 이래 봬도 어릴 때 올리버와 같이 계단 손잡이로 미끄러져 내려온 적도 있다.
아, 물론 그걸 본 어머니는 거의 기절 직전까지 갔지만.
“안 위험해요.”
내가 이 집에서 산 게 몇 년인데. 엘리엇은 괜찮다는 내 말에도 계단 위로 올라와 내 손을 잡았다. 진짜로 괜찮은데.
무엇보다 장갑을 아직 못 낀 게 신경 쓰인다. 번즈 백작이 이미 와서 기다린다는 말에 급하게 나오느라 내 장갑은 왼손에 고스란히 들려 있었다.
엘리엇 역시 그걸 발견했다.
“천천히 나오셨어도 괜찮습니다만.”
“기다리게 하면 미안하잖아요.”
갑자기 하인즈 경에게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급하게 부탁한 건데 엘리엇은 흔쾌히 나와 주었다. 그러니 기다리게 하는 건 미안하다.
그는 내 손에서 장갑을 가져가더니 내가 끼기 쉽도록 장갑을 벌려 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전 당신을 기다리는 게 좋거든요.”
“기다리는 게 좋아요?”
지루하지 않나? 처음 가는 곳이라면 괜찮을 수도 있다. 주변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내면 되니까.
하지만 엘리엇은 이 집을 몇 번이나 왔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가 눈을 감고도 일 층의 응접실을 찾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오기만 한다면 얼마든지요.”
엘리엇은 그렇게 말하고 나를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동시에 내 손에 그의 손가락이 닿았다.
저런 미소는 반칙이다.
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남자는 원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여자를 유혹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남자가 내 마음에 들길 바란다는 게 좀 얼떨떨하게 느껴졌다.
“왜 그러십니까?”
엘리엇이 물었다. 그는 이제 내게 반대편 장갑을 끼워 주고 있었다. 나는 솔직하게 말하려다 조금 심술궂게 물었다.
“내가 안 오면요?”
그의 얼굴에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 떠올랐다.
“내가 오기만 하면 얼마든지 날 기다릴 수 있다면서요. 내가 안 오면요?”
내가 죽을 때까지 엘리엇과 결혼할 생각이 없다면? 솔직히 말하면 나도 나를 모르겠다. 엘리엇은 좋은 사람이고 나를 많이 도와준다. 아마 나를 좋아하는 것 같고.
하지만 나는 누군가와 결혼하는 것보다 우선 스스로의 능력으로 살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다. 나 스스로에게.
만약 내가 평생 증명해야 한다면? 그래서 결혼을 영영 뒤로 미루게 된다면?
내가 원해서 엘리엇을 기다리게 하는 게 아니라 상황이 계속 그렇게 된다면? 내가 말해 줘야 하는 거 아닐까. 나도 날 모르겠으니까 기다리지 말라고.
마음 한켠에서는 그러지 말라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이기적이고 못된 생각이지만 나는 엘리엇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귀족에게는 많은 의무가 있고 그중 하나는 후계자를 만들어 가문을 존속시키고 영지와 영지민을 보호하는 것이다.
“상관없습니다.”
엘리엇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어? 정말?
나는 여전히 손을 그에게 맡긴 채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자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당신을 기다리는 건 익숙하거든요.”
“내가 안 간다고 해도요?”
“일부러 안 올 리가 없으니까 괜찮습니다.”
“내가 일부러 안 갈 리 없다고 어떻게 확신해요?”
엘리엇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우리는 만난 지 몇 달도 채 되지 않았다. 나는 엘리엇이 좋은 사람이고 날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날 언제까지 좋아할지 믿을 수 없다.
그리고 그건 엘리엇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는 말없이 집을 나가 마차에 올라탔다. 또 처음 보는 마차네.
나는 엘리엇의 마차에 올라타며 생각했다. 이 남자는 대체 마차를 몇 대나 가지고 있는 거지? 겉으로 보기엔 4인용 같았는데 나와 엘리엇이 들어가자 꽉 차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신 시트가 아주 푹신했다. 내가 그와 다리가 닿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애쓰다 포기했을 때쯤, 엘리엇이 입을 열었다.
“그럴 리 없으니까요.”
뭐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본 나는 엘리엇이 방금 전 우리가 한 대화의 연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뭐라고 했지? 내가 일부러 안 갈 리 없다고 어떻게 확신하고 나를 기다린다고 말하냐고 물었다. 엘리엇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제가 아는 당신은, 오지 않을 거라면 그렇다고 말할 사람입니다. 당신이 말없이 오지 않는다면 오고 있다는 뜻이죠.”
그럴까.
나는 그가 나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보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지점을 의문스럽게 생각했다. 그의 말대로, 나는 가지 않을 거라면 가지 않는다고 말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엘리엇이 내가 그런다는 걸 어떻게 확신하는 걸까.
“꿈에 나온 내가 그렇게 똑같나요?”
불쑥 튀어나온 질문에 엘리엇의 표정이 굳었다. 엇.
나는 그의 표정이 굳는 것을 보고 멈췄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엘리엇과 로렌, 클레어의 꿈이 예지몽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들이 말한 대로 흘러간 게 많으니까. 그리고 꽤 그럴 법하기도 했고.
하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꿈속의 나는 나 같지가 않았다.
아무리 왕족이 모두 죽었다 해도 내가 왕이라고? 좋아, 거기까진 그럴 수 있어. 아무도 할 사람이 없다면 내가 해야지, 별수 있나.
그게 귀족의 의무인걸.
하지만 내 별명이 마녀였다는 건 좀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좀 이기적일 순 있어도 마녀는 너무 심하잖아.
그래서 나는 그들의 꿈이 예지몽이라고 어느 정도는 믿어도 어느 정도는 믿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 방금 전에 꿈에 나온 나와 지금의 내가 그렇게 똑같냐고 물어본 거고.
“그건 당신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