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28 – 1
“맙소사. 아직도 귀가 울리는 것 같구나.”
어머니의 말에 나는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어제 참석한 음악회는 정말 끔찍했다. 연주자들을 초대한 게 아니라 데번 경의 가족 음악회였기 때문이다.
여름의 무더위가 꺾이면서 음악회나 연극 같은 공연이 시작됐다. 악단이나 극단을 섭외해서 공연을 보여 주기도 하지만 가족들이 직접 공연을 하기도 한다.
어제저녁에 초대받은 건 데번 경이었다. 그는 음악에 아주 관심이 많았는데 자신도 그런 훌륭한 음악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자기 자식들도 음악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집에 귀가 있는 건 멜라니뿐일 거야.”
어머니의 투덜거림에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건 그렇다. 데번 경과 그의 부인, 그리고 그들의 두 아들은 자신의 공연을 아주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았거든.
딱 한 명. 막내인 멜라니만이 창피해서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 집 음악회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지도 몰라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 집도 며칠 뒤에 음악회를 연다. 가까운 사람들만 초대했다. 사교 시즌에 적어도 한두 번은 행사를 여는 게 예의기 때문이다.
“그럴 리 없다.”
어머니는 단호하게 말했다. 음, 그랬으면 좋겠는데.
“이상하네.”
그때,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이 파묻고 있던 어머니가 자세를 고치며 말했다. 응? 나는 소파에 발을 올리고 앉아서 신문을 보다가 어머니를 쳐다봤다.
곧 있을 비스컨 음악회가 이상하다는 뜻인가?
“빅스!”
다음 순간, 어머니가 집사를 소리쳐 불렀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내밀자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어제 올리버가 들어왔나?”
빅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어, 그러게. 올리버는 어제 안 들어왔다.
“아니요. 안 들어오신 것 같습니다.”
혹시 새벽에 들어왔다가 옷만 갈아입고 바로 나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올리버의 침실에 그가 들어왔던 흔적이 없다는 말에 어머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클럽에 연락을 해 볼까요?”
그게 좋겠다. 클럽의 지배인에게 물어보면 올리버가 거기서 잤는지 알 수 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해 주세요.”
“잠깐.”
그때 어머니가 나와 빅스를 말렸다. 우리가 쳐다보자 그녀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올리버 나이가 몇인데 고작 하루 안 들어왔다고 내가 찾는다고 하면 사람들이 좀 우습게 생각하지 않을까?”
음, 그런가? 나는 집사를 쳐다봤고 그는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역시 그렇다. 어머니가 전날 집에 안 들어온 아들을 찾는 걸 사람들이 비웃을까?
“내가 너무 과보호하는 것처럼 보이잖니. 걔가 약혼만 했어도 이런 걱정은 안 하는데 말야.”
아하.
누군가에게 올리버가 아직까지 약혼을 못 한 이유가 어머니가 과보호해서 그런 게 아니냐는 질문이라도 받은 모양이다.
이 멍청한 오라버니 같으니. 나는 그 나이까지 약혼도 하지 않은 올리버를 떠올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적어도 난 파혼하긴 했지만, 약혼을 했단 말이지.
뭐가 더 불효인지 모르겠다. 파혼을 한 것과 애초에 약혼도 하지 않은 것.
그래도 내가 더 낫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지만, 올리버는 반대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럼 제가 찾는 거로 해요.”
나는 빅스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여동생에게 사다 주기로 한 게 있는데 어제 집에 안 들어와서 여동생이 찾는다고 하면 된다.
빅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갔다. 속으로는 안도하고 있겠지. 어머니의 하소연이 시작되기 전에 벗어날 수 있어서.
“넌 들은 거 없니?”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의 하소연이 시작됐다. 나는 재빨리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입 안에 음식물이 있으면 대답을 안 해도 된다.
“걘 분명 지 아버지를 닮은 거야. 내가 그렇게 잘 낳아 놨는데 왜 아직도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다는 이야기도 안 하냐고.”
오, 오랜만이네.
최근 이런저런 사건이 일어나서 그렇지 그전까지만 해도 어머니는 내게 종종 이런 하소연을 하고는 하셨다. 날 약혼시켰으니 올리버도 빨리 괜찮은 여자를 만나 약혼했으면 좋겠다고.
“아니면 혹시 걔도….”
거기까지 말한 어머니의 말이 멈췄다. 걔도? 내가 쳐다보자 어머니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아니, 아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제를 바꿨다.
“그만 나가 봐야 하지 않니? 오늘 수영장을 닫는다며.”
그렇다.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영장은 오늘까지만 연다. 마지막 날이라고 많은 사람이 찾아오기로 되어 있다.
사람이 워낙 많아서 아마 수영은 못 할 거다. 미리 양해를 구했지만 그래도 마지막 날이니 오고 싶다는 사람이 많았다.
“유제니의 오라버니요?”
배에는 이미 줄리아와 로렌이 와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슬쩍 로렌만 불러서 혹시 올리버가 그녀의 꿈에서 결혼을 했는지 물었다.
“음….”
로렌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인상 쓰지 마. 나는 그렇게 말하려다 멈칫했다. 이런, 어머니와 똑같은 소리를 하려고 했네.
“모르겠어요. 전 누가 결혼했다는 소문은 의식적으로 피했거든요.”
했을지도 모르지만, 일부러 관심을 두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는 말이다. 진짜 올리버가 결혼을 안 했나? 내 안색이 어두워지자 로렌이 다시 말했다.
“라넌 경도 꿈을 꿨다면서요. 라넌 경에게 물어보지 그러세요? 그분이 유제니 곁에 더 가깝고 오래 있었잖아요.”
아, 그러네. 나보다 라넌 경이 내 주변 일을 더 잘 알 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마지막 운영이 잘 진행이 될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유제니.”
기다리던 클레어가 온 건 많은 사람이 왔다가 떠난 뒤였다. 클레어는 운영을 종료하기 직전에 찾아왔고 나는 수영장 문을 닫는 걸 아쉬워하는 사람들과 대화 중이었다.
“다음에 뭘 할지 몰라도 꼭 초대해 줘야 해요.”
“저도요.”
적극적인 사람들의 요청에 나는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대는 하겠지만 이 사람들이 참가하겠다고 할지는 모르겠다.
“오늘이 마지막이군요. 아쉽네요.”
“물은 며칠 더 채워 둘 거예요. 고생한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요. 클레어도 와요.”
줄리아와 로렌뿐 아니라 여기서 일한 직원들과 우리 집 하녀들을 위해서 며칠 더 물을 채워 둘 거다. 어머니도 흥미를 보이셨기 때문에 한 번쯤은 오실 것 같고.
클레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아까 전부터 묻고 싶은 것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꿈에 대한 거 물어봐도 될까요?”
잠시 클레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뭐든 물어보셔도 좋지만 대답할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대답할 수 없는 건 어떤 거예요?”
알고 있지만 말할 수 없는 게 뭐가 있을까. 클레어는 내 질문에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말해 드릴 수 없어요.”
허어. 대답할 수 없는 게 있지만 그게 뭔지 알려 줄 수 없다니.
나는 잠시 클레어를 쳐다보다가 물었다.
“꿈에서 올리버가 결혼을 했나요?”
클레어의 행동이 멈췄다. 그녀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다물더니 고개를 숙였다.
“어, 이것도 말할 수 없는 거예요?”
올리버가 사고를 쳤다거나 죽었다거나 하는 거라면 말할 수 없는 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결혼 여부도 말할 수 없는 건가?
혹시.
머릿속에 그럴듯한 가설이 떠올랐다. 꿈에서 드래곤이 발시안을 공격했고 왕족이 모두 사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왕이 됐다는 건 나보다 왕위 계승권이 높은 사람은 다 죽었다는 말이지.
올리버 역시 마찬가지고.
그렇다면 꿈에서도 올리버는 결혼하기 전에 사망했다는 말이 된다.
오, 젠장.
저도 모르게 욕이 목구멍까지 기어 올라왔다. 비스컨 가는 사라졌네.
아니, 아니다. 어쩌면 방계로 흘러갔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누가 비스컨 백작이 되지? 거기까지 생각하는데 클레어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했습니다.”
“네?”
“비스컨 백작이요. 결혼했습니다.”
“어, 그럼….”
자식도 있었는지 물어보려 했을 때였다. 클레어는 마치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후계자는 없었습니다. 그 부부는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거든요.”
허.
생각보다 충격적인 사실에 나는 말을 잃었다. 올리버와 올리버의 부인이 사이가 좋지 않았다니.
나는 멍하니 클레어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어, 그건 좀 놀랍네요.”
“그런가요?”
“전 올리버가 로맨티시스트인 줄 알았거든요.”
“로맨티시스트요?”
좀 웃긴가?
올리버는 꽤 로맨티시스트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올리버는 무도회에서 춤을 추긴 하지만 대화를 길게 하지는 않는다.
어머니의 권유를 빙자한 협박으로 몇몇 여자에게 춤을 청하긴 한다. 때때로 춤을 권유받지 못하는 여자들에게 청하기도 하고.
하지만 단둘이 대화를 하는 건 못 봤다. 왜 대화하지 않냐고 물었을 때 그가 그랬다.
- 한눈에 느낌이 안 와.
그러니까 올리버는 적어도 춤을 췄을 때 ‘이 사람이다!’라는 느낌이 팍 와야 한다고 했다. 그런 사람이 오면 대화를 하겠다나 뭐라나.
“안 어울리죠?”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올리버도 그걸 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을 안 하는 것 같다.
클레어는 멍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약간 충격받은 표정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뒤섞인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니요. 네. 아니, 그게….”
응?
나는 갑자기 허둥지둥하는 클레어가 왜 그러는지 몰라 쳐다봤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입을 뻐끔거리더니 내 등 뒤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기 패터슨 자작 부인 아닌가요?”
패터슨 자작 부인? 몸을 돌리자 진짜로 그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과가 부족하진 않나요?”
거침없이 내게 다가온 패터슨 자작 부인이 물었다. 다과?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려 했을 때 그녀가 말을 이었다.
“왕비 전하께서 전에 초대해 준 것에 대한 감사로 다과를 보내셨거든요.”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나는 씩 웃고 자작 부인에게 자리를 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