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9화 (124/239)

129화. 27 – 5

“클레어 라넌 경?”

기사단을 나서던 클레어는 건물 앞에 서 있는 중년의 남성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중년이라고는 하지만 젊어 보인다. 탄탄한 체격 때문이다.

“로인 에스컬레일세.”

당연히 클레어는 남자가 누군지 알았다. 그녀는 로인이 내미는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압니다. 줄리아 에스컬레 양의 아버지시죠?”

검은 늑대 기사단의 단장 로인 에스컬레 경이 아니라 줄리아 에스컬레 양의 아버지라는 말에 로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클레어가 줄리아를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는 잡은 클레어의 손을 가볍게 한 번 쥐었다가 놓으며 말했다.

“그래. 하지만 오늘은 검은 늑대 기사단장으로서 왔지.”

그래? 클레어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으로 비켜섰다. 여기는 흰 사자 기사단의 건물이고 검은 늑대 기사단의 건물에서 약간 떨어져 있다.

로인 에스컬레가 방문했다면 기사단장인 에스마 경을 만나러 온 걸 거다.

“단장님은 안에 계십니다.”

방금 전 면담을 끝내고 나오던 참이다. 에스마 경은 클레어의 팔이 괜찮은지, 계속 기사단에 남고 싶은지 확인했다.

그 대답은 전부 그렇다였다.

“아니, 오늘은 자네를 만나러 왔네.”

로인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리고 무슨 일인가 하고 멀리서 그와 클레어를 쳐다보는 기사들을 의식해서 몸을 돌렸다.

“집으로 가는 길인가?”

“아니요. 지금 잠시 비스컨 저택에 머물고 있습니다.”

클레어는 붕대를 감은 팔을 살짝 움직였다. 의사가 뼈가 붙을 때까지는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그녀가 왜 비스컨 가에 머무는지 설명해야 하는지 고민하는데 로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올리버를 구해 줬다지.”

알고 있군. 클레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에스컬레 경은 검은 늑대 기사단장일 뿐 아니라 비스컨 백작 부인의 친척으로 두 집안은 꽤 가깝다.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자네가 왜 입단 시험을 볼 수 있었는지 알고 있나?”

그때 로인이 느닷없는 질문을 던졌다. 입단 시험을 볼 수 있었던 이유? 자리가 났으니까다.

클레어는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말했다.

“기사들 몇 명이 빠졌다고 들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쫓겨났다. 규칙을 어겼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기사들은 허가 없이 수도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왕족을 위한 기사단이므로 허가 없이 다른 사람을 호위할 수 없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한 번에 어긴 녀석들이 있었다.

“몇 달 전에 거마로트 백작이 여행을 떠났지. 그때 기사들 몇 명을 꾀어서 호위로 데려갔더군.”

그랬어? 클레어의 눈이 동그래졌다. 다른 기사들이 거마로트 공작 어쩌고 하면서 수군거리는 걸 듣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녀를 끼워 주지 않았고 그녀도 딱히 그 무리에 들어갈 생각이 없어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아니, 꾀었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 꾀었다고 넘어가는 멍청이들이 문제니까.”

로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렇게 말했다. 한심한 놈들.

거마로트 백작이 상당한 금액을 지불했다고 한다. 게다가 만약 기사단에서 알게 돼 곤란해진다고 해도 아버지가 공작이니 잘 처리해 준다고 했겠지.

하지만 거마로트 백작은 물론 기사들도 돌아오지 않았다. 적어도 지난주까지만.

로인과 에스마 경은 거마로트 백작과 떠난 기사들이 있다는 것을 알자마자 그들을 전부 쫓아냈다. 단순히 며칠 휴가를 받은 녀석도 있었고 몸이 안 좋다며 몇 달 병가를 낸 녀석도 있었다.

전원 추방했다.

클레어가 입단 시험을 볼 수 있었던 건 그런 이유였다. 자리가 생겼고 기사단은 마이너 그룹에서 시험을 통해 메이저 그룹의 빈자리를 채우려 했다.

그 과정에서 기사단 외부의 사람들에게도 기회는 주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솔직히 말하면 외부에서 합격하는 사람이 나올 줄 몰랐거든.”

로인은 그렇게 말하며 턱을 쓰다듬었다. 클레어는 외부 입단 신청자 중에서 유일하게 합격한 사람이었다. 동시에, 그때 시험을 치른 사람 중에서 가장 실력이 기대되는 사람이었고.

“해명하러 왔네.”

“네?”

세 번째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클레어는 무례하다는 것도 잊고 기겁해서 물었다. 해명한다고? 에스컬레 경이 그녀를 찾아온 것도 이상하고 느닷없이 그녀가 어떻게 기사단에 들어갔는지 물어본 것도 이상했다.

하지만 해명하러 왔다는 말보다 더 이상하지는 않았다.

“자네를 떨어트린 것 말이야. 기사단에 내가 검은 늑대에 여자가 들어오는 게 싫어서 떨어트렸다고 소문이 돈다더군.”

아니었나? 클레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로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라 떨어트린 게 맞다. 이유가 좀 다르고 그 이유가 전부가 아니지만.

그는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그리고 시선을 밑으로 내린 채 말했다.

“난 여자들이 기사단에 들어오는 걸 원하지 않아. 줄리아가 나라를 지키겠다며 기사가 되는 걸 상상하면 억장이 무너져.”

로인의 상식으로, 여자가 나라를 지키겠다고 검을 든다는 건 남자가 다 죽었다는 뜻이다. 최소한, 그는 이미 죽었다는 뜻이다.

“나는 자네가 좋은 곳으로 시집가서 힘들지 않게 살길 바랐네. 괜히 여자가 들어와서 다른 기사들이 싱숭생숭해지지 않았으면 하기도 했고.”

그건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로인은 아직도 클레어가 검은 늑대 기사단에 들어오면 다른 기사들이 그녀를 훔쳐보느라 사고가 날까 봐 걱정이 됐다.

“그건 그 사람들 문제지, 제 문제가 아닌데요.”

그때, 클레어가 조용하게 말했다. 신기한 사람이 들어왔다고 싱숭생숭해져서 자기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기사라 할 수 없다.

그녀의 말에 로인은 말문이 막혔다. 그건 그렇지. 꾀었다고 넘어가는 놈들도 문제라고, 방금 그가 말하지 않았던가.

“줄리아도 비슷한 소리를 했지.”

로인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카데미에서 남학생과 싸워서 그가 불려 간 적이 있다. 여자애가 그렇게 싸우면 남들이 어떻게 보겠냐고 꾸중하자 줄리아가 말했다.

그럼 남의 눈치를 보느라 남이 놀려도 가만히 있어야 했냐고. 자길 놀린 사람을 응징하는 걸 누군가가 뭐라고 한다면 그건 그 사람들이 이상한 거라고도 했다.

“자네는 왜 기사가 되고 싶었나.”

로인은 모르는 척 물었다. 신청자들은 신청서에 기사가 되고 싶은 이유를 쓰도록 한다.

클레어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신청서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다. 로인은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국왕 전하는 아니겠지?”

만약 그랬다면 국왕 전하를 지키는 영광을 누리고 싶다고 적었을 거다. 많은 신청자가 그렇게 적는다.

클레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로인이 다시 물었다.

“만에 하나, 국왕 전하와 자네가 지키고 싶은 사람이 동시에 위험에 처한다면 어떻게 할 텐가.”

누굴 먼저 구하러 갈 거냐는 질문에 이번에도 클레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할 것도 없다. 그녀는 왕과 유제니가 동시에 위험에 처한다면 지체 없이 유제니를 향해 달려갈 것이다.

“내가 자네를 탈락시킨 이유일세.”

복합적인 이유였다. 클레어가 기사단에 들어와서 험하게 살지 않길 바라서였고 기사들이 유일한 여자에게 시선을 빼앗겨 해이해지길 원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클레어가 지키고 싶은 사람이 국왕 가족이 아니어서이기도 하고.

기사단은 둘 다 국왕 가족을 위한 존재다. 가족과 국왕이 위험에 처한다면 가족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진짜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지만 로인은 적어도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자네가 지키고 싶은 사람이 반역을 꾀한다면, 자네는 절대로 기사단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지.”

로인의 말에 클레어는 그분은 그럴 분이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지금에 와서는 그럴 가능성도 사라진 일이다. 굳이 로인과 말다툼을 하다가 유제니의 이름을 발설할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네가 검을 들지 않길 바라서 탈락시킨 건 사과하네.”

로인은 그렇게 말하며 클레어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과한다고? 어리둥절한 그녀에게 로인이 말을 이었다.

“혼자서 동료들에게 대항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야. 그게 옳은 일이라 해도 말이지. 자네는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본 기사 중에 가장 기사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

멍하니 로인의 손을 맞잡던 클레어는 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장 기사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그녀가 다른 기사들에게 대항한 건 유제니를 위해서였다.

“저는….”

클레어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유제니의 이름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그녀는 이미 꿈에서 유제니가 어떤 중상모략에 시달리는지 봤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봤다.

그렇기 때문에 클레어는 유제니가 반역을 꾀할 리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른다. 소문이란 그런 법이다. 떠들어 대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각색된다.

그렇기 때문에 클레어와 엘리엇은 유제니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분께 배운 대로 행동한 것뿐입니다.”

로인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는 물끄러미 클레어를 쳐다봤다.

그녀는 올리버를 보호하면서 누구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팔을 내밀어서 사일록 경의 검을 받아 냈다고 들었다.

로인이 아는 클레어의 실력이었다면 그녀는 사일록 경을 제압할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둘 중 하나는 다쳤겠지. 사일록 경의 검은 조금 거칠고 잔인한 구석이 있었고 필연적으로 허점이 있었으니까.

다른 기사였다면 자신이 다치는 게 아니라 사일록 경이 다치는 것을 선택했을 거다. 로인은 자신의 팔을 내민 클레어를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팔도 그 사람에게 배운 건가?”

자기 팔을 내줌으로써 피해를 최소화한 방법을 말하는 거다. 일각에서는 아무리 그래도 자기가 다쳤으니 바보 같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네.”

클레어는 다친 팔을 살짝 흔들었다. 그리고 씩 웃으며 말했다.

“제가 피해자가 아니라 사일록 경이 피해자였다면 그가 과연 좌천을 받았을까요?”

사일록 경은 사일록 후작의 친척이다. 다친 게 클레어가 아니라 사일록 경이었다면 후작의 입김으로 좌천이 아니라 근신 정도로 끝났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사일록 경에게 내려진 좌천이라는 벌에는 동료이자 흰 사자 기사단의 기사를 다치게 한 죄도 포함돼 있었다.

허.

로인은 고개를 끄덕하고 자신의 말에 올라타 떠나는 클레어를 보고 턱을 쓰다듬었다. 올리버를 보호하느라 다치다니 멍청한 짓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까지 계산한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근무 직후 바로 쫓아간 거라 보호구를 착용하고 있었다고 했다.

“아깝군.”

로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면 줄리아에게 소개하고 싶었을 정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