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화 (123/239)

128화. 27 – 4

“전 어머니가 행복하셨다고, 아니,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계시다고 생각해요. 두 분은 정말 사이가 좋으시거든요.”

나는 괴로운 듯한 에스컬레 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매일 편지를 주고받는다. 정확하게는 매일 편지를 써서 며칠에 한 번씩 우편으로 주고받는다.

비스컨 가는 가난하지만, 어머니는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도 어머니를 사랑하니까. 물론 아버지는 가진 게 작위와 얼굴밖에 없지만, 어머니는 부족한 걸 그녀가 채움으로 비스컨 가를 완성시켰다.

“줄리아도 그렇지 않을까요? 쉽지 않으면 어때요. 자기가 행복한 게 중요하지.”

나도 그렇다. 어닝과의 파혼을 고민할 때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게 뭔지 고민했다. 어닝이 나와 우리 가족을 조롱하는 걸 모른 척 넘어간다면, 풍족하게 살 수는 있었겠지.

하지만 나는 풍족한 것보다 믿을 수 있는 배우자가 부부생활에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가 보고 자란 게 그거라서인지도 모른다.

만약 줄리아가 나 같은 사람이라면 에스컬레 경이 생각하는 남편감은 줄리아에게 맞지 않을 거다.

“하긴.”

에스컬레 경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나도 가끔은 내가 유니콘을 찾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가 있지.”

음.

나는 차라리 유니콘을 찾는 게 더 빠르지 않겠냐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희망은 가지고 있는 게 좋지.

“줄리아는 괜찮을 거예요. 걘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찾아낼 거라고 생각해요.”

아직은 로렌과 함께 헤매고 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우리는 언젠가 찾아낼 거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경험이다. 더 많은 경험은 더 많은 기회로 얻을 수 있고.

“라넌 경도 그렇다고 생각하니?”

이야기가 다시 클레어로 돌아왔다. 나는 에스컬레 경의 질문에 콧잔등을 찡그렸다.

잘 모르겠다. 클레어가 좋은 집안에 시집간다고 해서 불행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거든. 꿈에서 그녀의 인생이 그렇게 별로였다면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 된다.

하지만 클레어는 결혼하기보다는 기사가 되기를 선택했지.

“제가 아는 건 클레어가 자기 인생을 바꾸고 싶었다는 것뿐이에요. 그 방법으로 결혼보다는 기사가 되기를 선택한 거고요.”

에스컬레 경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찻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이야기 즐거웠다. 그만 가 보마.”

“라넌 경을 안 만나도 괜찮으시겠어요?”

잠깐 집에 간 것뿐이니 조금 있으면 올 거다. 하지만 에스컬레 경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다음에.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그렇군.

나는 에스컬레 경이 왜 클레어를 만나려 하는지 이해하고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건 이런 점 때문이다.

“아참. 조만간 사일록 경이 방문할 거야.”

현관 앞에서 에스컬레 경이 말했다. 사일록 경이 우리 집에 온다고? 왜?

나는 그게 무슨 소린지 몰라 눈만 동그랗게 떴다. 사일록 경은 좌천이라고 들었다. 메이저에서 마이너로.

기본 실력이 있으니 금방 메이저로 올라갈 거라고도 들었다. 물론 삼 개월 안에는 안 되지만.

“에스마 경이 올리버에게 사과하라고 시켰다는구나.”

연락이 올 테니 너무 놀라지 말라는 뜻이다. 나는 알려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에스컬레 경을 배웅했다. 그렇군. 사일록 경이 사과를 하러 오겠군.

사과를 받아 줄지 말지는 올리버가 알아서 할 일이다. 하지만 나는 사일록 경이 마시는 차를 아주 짜게 해서 내가라고 할 수는 있겠지. 물론 그의 태도에 따라 얼마나 짤지 결정될 테지만.

“빅스, 올리버 아직 안 왔나?”

하지만 밤이 늦도록 사일록 경은커녕 올리버도 돌아오지 않았다. 침실로 올라가던 어머니의 질문에 나는 그제야 사일록 경이 방문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 클럽에 사람을 보내 볼까요?”

집사가 말했다.

클럽에서 놀다가 곯아떨어졌을지도 모른다. 전에도 한두 번 그런 적이 있거든. 그러다 새벽에 몰래 들어오느라 내 창문에 돌을 던지곤 했다.

“아니, 괜찮아. 들어오겠지.”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힐끔 쳐다봤다. 올리버가 새벽에 들어오면 내가 문을 열어 준다는 걸 아시는 모양이다.

나는 어머니가 왜 쳐다보시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 층으로 올라가는 어머니께 안녕히 주무시라고 인사를 건넸다.

“아가씨, 주무세요. 제가 기다리겠습니다.”

빅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빅스도 나이가 있어서 밤잠이 늘었다. 대신 아침잠이 줄었고.

“괜찮아요. 전 이 책만 더 읽고 잘 거거든요.”

겸사겸사 올리버가 돌아오는 걸 기다리면 된다. 내 말에 빅스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진짜로 이것만 읽을 거다. 나는 그에게 남은 책의 두께를 보여 주며 말했다.

“한 시간만 읽으면 돼요.”

그전까지 올리버가 돌아오지 않으면 날 깨우느라 고생을 좀 하게 되겠지. 빅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너무 늦게 주무시지 마세요. 내일도 약속이 있으시잖습니까.”

내일은 점심 약속과 저녁 약속 모두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책을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실에 가서 읽다가 자야지.

“번즈 백작과 가깝죠?”

다음 날, 점심 약속은 흰장미회 오찬이었다. 리사와 나란히 앉아서 잘 구운 송아지 고기를 먹던 나는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돌렸다.

가깝냐고? 그가 내게 구혼 중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 리사는 더더욱 잘 알 테고.

내가 무슨 의미냐는 표정을 짓자 그녀는 잠깐 인상을 쓰더니 다시 물었다.

“얼마나 가까워요? 최근에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최근에 리사가 들은 이상한 이야기와 내가 엘리엇이 얼마나 가까운지가 무슨 관계일까. 나는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꽤 가까운 거 같아요. 내 생각에는요. 괜찮은 친구 사이 같거든요.”

“음, 그러면 드래곤을 어떻게 물리쳤는지에 대해서도 들었어요?”

어떻게 물리쳤냐고? 정확하게는 물리친 게 아니라고 들었다. 그리고 더 이상은 이야기해 주지 않았지.

그게 이상하지 않았던 건, 엘리엇이 누구에게도 드래곤을 어떻게 물리쳤는지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모험한 그의 부하들도 똑같이 입을 다물었다.

“아니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엘리엇이 드래곤을 어떻게 물리쳤는지가 무슨 상관이지?

“사실….”

입을 연 리사는 주변을 살피더니 내게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번즈 백작이 드래곤을 물리친 게 아니라는 소문이 돌아요.”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어? 그래요?”

리사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음, 놀랄 일이긴 하지. 다들 엘리엇이 용과 싸워 이기고 온 줄 아니까.

그가 백작위를 받은 게 용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해서라고 소문이 나 있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알았고.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용을 물리친 건 아니라고 했다. 그는 화가 난 용을 달랬고 그 화를 발시안이 아닌 다른 쪽으로 돌렸다고 말했다. 내가 아는 건 그것뿐이다.

리사는 머뭇거리더니 다시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소문으로는 드래곤을 물리치러 간 다른 모험가가 있었대요.”

그래? 놀라우면서 동시에 어떤 면으로는 당연한 이야기였다. 이 대륙에는 두 마리의 드래곤이 있고 그 드래곤을 물리쳐 용사가 되거나 드래곤의 둥지를 털어 한몫 잡으려는 사람은 언제나 있으니까.

물론 그건 드래곤의 둥지를 찾았을 때의 일이다. 내가 아는 한 최근, 그러니까 백 년 안에 드래곤의 둥지를 찾은 건 엘리엇뿐이었다.

드래곤의 둥지를 찾은 사람이 또 있단 말이지? 그것도 같은 시기에.

혹시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 드래곤의 둥지 위치가 기록된 거라도 발견된 거 아냐?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는데 리사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번즈 백작이 공을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해 먼저 도착한 모험가를 드래곤에게 바쳤다는군요.”

“바쳐요?”

어떻게?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리사가 고개를 저었다.

“자세한 건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런 소문이 있어요.”

소문일 뿐이잖아. 나는 인상을 쓰며 물었다.

“어디서 난 소문이에요?”

“그게, 묘해요.”

리사의 몸이 내 쪽으로 더욱 기울어졌다. 이제 우리는 남들이 보기에 그냥 조용히 대화하는 게 아니라 귓속말을 하는 거로 보일 것이다.

“핸더슨 후작 부인이요.”

핸더슨 후작 부인? 왕대비 전하의 시녀, 아니, 말동무 말하는 건가? 내가 놀란 표정을 짓자 리사 역시 놀랍지 않냐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핸더슨 후작 부인이 왜 나와?

“어, 그럼 핸더슨 후작 부인은 먼저 드래곤의 둥지를 찾았다는 사람도 알겠네요?”

“누군지 말은 안 하는데 대충 알 것 같지 않아요?”

알 것 같지 않냐고?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다음 순간, 나는 리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거마로트 백작.

몇 달 전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떠난 그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갔던 사람들 몇 명만 얼마 전에 거마로트 공작가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뿐만 아니다.

배에서 하인즈 양이 말했다.

그녀의 친척이 용을 잡으러 간다며 용병을 구하던 부자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행방불명된 거마로트 백작. 몇 달 뒤에나 아주 조용히 돌아온 그의 동료들. 그리고 하인즈 양의 이야기.

이 세 가지를 합치면 한 가지 결론이 나온다.

“세상에.”

나는 입을 딱 벌렸다. 거마로트 백작, 그 멍청이가 드래곤의 둥지를 찾아냈던 거다. 그리고 용을 잡겠다며 사람을 모아 들어갔고.

문제는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는 거지.

“유제니.”

리사는 내 표정을 보더니 재빨리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번즈 백작을 잘 알아요?”

그 말은 내게 그가 거마로트 백작을 용에게 팔아넘길 사람 같냐는 질문으로 들렸다. 그럴까? 나는 엘리엇을 떠올렸다.

그리고 맞은편 손으로 리사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

“네. 잘 알아요.”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만약 소문이 진짜라면 내가 납득할 이유가 있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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