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2/239)

127화. 27 – 3

“에스컬레 경.”

손님이 왔다는 소식에 응접실에 내려가자 에스컬레 경이 앉아 있었다. 로인 에스컬레. 검은 늑대 기사단의 단장이자 어머니의 먼 친척이라 내게는 아마 삼촌쯤 될 거다.

“유제니.”

내가 인사를 건네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보다 나이도 많고 친척이니 앉아 있어도 될 텐데 그는 나를 보면 꼭 이렇게 예의를 차려 주곤 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줄리아는 별말 없던데요.”

줄리아는 어제 만났다. 배에서.

줄리아가 배에서 내 일을 도울 수 있었던 건 배가 남자는 출입 금지이기 때문이다. 에스컬레 경은 수영장이라는 것에 반감을 보였지만 남자는 배 주인인 번즈 백작도 들어올 수 없다고 하자 줄리아가 출입하는 것을 허락했다.

“아니, 줄리아 때문은 아니야. 오늘은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는 앉으라는 내 권유에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앉았다. 앉아야 할 정도로 오래 걸릴지 고민한 모양이다.

예전부터 그랬다. 에스컬레 경은 어딘가 가만히 앉아 있는 게 불편한 것처럼 행동하곤 했다. 늘 서서 주변을 경계한 탓이라고 말했지.

“차 드실 시간 있으시죠?”

나는 하인에게 차를 내오라고 지시하며 에스컬레 경에게 물었다. 뭘 물어보려는지 몰라도 차 한잔할 정도의 시간은 걸리지 않겠냐는 질문이었는데 다행히 에스컬레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아가 널 귀찮게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차가 나오기도 전에 에스컬레 경의 의례적인 인사말이 시작됐다. 줄리아가 졸라서 내가 극장이니, 무도회니 하는 곳을 다닌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전혀요. 덕분에 저도 지루하지 않고 좋아요. 최근에는 제 일도 많이 도와주고 있고요.”

“그래. 그 일을 도와주면서 집안일 살피는 것도 훨씬 세세해졌더구나.”

그랬을 거다. 손님을 대접하거나 배를 관리하는 걸 돕고 있거든. 말이 배를 관리한다는 거지, 우리가 하는 건 손님이 이용하는 선실이나 갑판의 비품을 관리하는 것뿐이지만.

“줄리아는 영리하니까요. 그동안은 관심이 없었을 뿐이에요.”

게다가 로렌과 함께 일을 도우면서 약간의 경쟁심도 생긴 모양이다. 아무래도 친구와 함께 일하는데 친구가 더 잘하면 자기도 더 잘하고 싶다는 경쟁심이 생기겠지.

곧 하인이 차를 가지고 들어오자 잠시 에스컬레 경의 입이 닫혔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그제야 묻고 싶었던 것을 입에 올렸다.

“줄리아 말로는 네 지인 중에 라넌 경이 있다던대.”

“아, 클레어요.”

클레어가 검은 늑대 기사단을 지원했지만, 에스컬레 경이 거부했다는 건 나도 안다. 줄리아가 아버지가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인 줄 몰랐다고 펄펄 뛰었거든.

나는 에스컬레 경이 왜 클레어의 이야기를 꺼냈는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설마 그녀가 줄리아 곁에 있는 게 싫다는 건 아니겠지.

어머니만큼이나 에스컬레 경도 줄리아를 과보호하기는 하지만 줄리아가 친구를 사귀는 것까지 간섭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이니? 그, 최근에 동료들과 다퉜다던대.”

“오.”

다퉜다는 말은 너무 완곡한 표현인 것 같은데.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클레어가 올리버를 구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아니,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군. 클레어의 팔에 금이 갔으니까.

나는 솔직하게 내가 아는 것을 이야기했다. 에스컬레 경은 기사단장이고 어쩌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사람에게 클레어의 편을 들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다.

“그래서 지금 이 집에 머무르고 있어요. 지금은 집에 잠시 다녀온다고 나갔고요.”

어머니는 클레어를 도와줄 하인을 데려가라고 했지만, 클레어가 거절했다. 그냥 집만 살펴보고 올 거라고.

그래서 우리 집의 하나뿐인 마차를 내줬다고 들었다. 올리버를 구해 준 은인이니까 뭐라도 해 주고 싶은 거다.

“에스마 경에게 들으니 동료들이 그를 고발했다던대.”

그랬다고 들었다. 자기들은 그냥 지나가고 있었을 뿐인데 클레어가 일방적으로 공격했다고 고발했다고 한다. 주장이 아니라 고발.

즉, 클레어를 처벌하라고 요청했다는 뜻이다.

클레어가 근신형을 받은 데는 그 영향도 있었을 거다. 나는 흰 사자 기사단의 기사들과 기사단장인 에스마 경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인상을 썼다.

“네. 원래 클레어가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에요. 아시잖아요.”

약간은 비난의 의도도 있었다. 클레어가 기사단에서 배척을 받은 데에는 에스컬레 경의 탓도 약간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클레어를 검은 늑대 쪽에 받아 줬어야 했다. 그럴 실력이 됐다고 들었다. 하지만 에스컬레 경이 거부했고 에스마 경이 받아들이면서 문제가 생겼다.

물론 흰 사자 기사들이 제대로 된 기사들이었다면 생기지 않을 문제긴 하지만 예전에 가정 교사가 이렇게 말했다.

맑은 샘에서 맑은 물이 흐른다고. 즉,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뜻이다.

“나는 여자들이 기사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뜻밖에도 에스컬레 경은 그렇게 말했다. 뭐라고요? 내 눈초리가 날카로워지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여자들이 기사가 된다는 건, 나라를 지킬 남자들이 죄다 죽어 버렸다는 뜻이지.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

허어.

여자가 기사가 되는 것과 남자가 죄다 죽는 게 무슨 상관이냐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을 수 있었다. 에스컬레 경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에게 여자와 어린아이는 무조건 지켜야 할 사람이니까. 만약 지금 이 집을 스무 살인 나와 열 살인 올리버 중 하나가 지켜야 한다면 에스컬레 경은 지체 없이 올리버에게 검을 쥐여 줄 사람이다.

하긴, 그건 아버지와 어머니도 마찬가지일 거다. 에스컬레 경의 나이 대는 다 그렇게 생각하겠지.

“다른 딸을 둔 아버지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줄리아가 좋은 데 시집가서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라넌 경도 그랬으면 좋겠고.”

그래서 거부했다는 말이다. 허어.

나는 다시 입을 딱 벌렸다. 그리고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내뱉어 버렸다.

“줄리아가 어디로 시집가면 편하게 살까요?”

백작가? 공작가? 아니면, 에스컬레 경 같은 기사?

미안하지만 에스컬레 부인은 꽤 고생했다고 들었다. 에스컬레 경이 기사단장이 되기 전에 결혼해서 고생하다가 남편이 기사단장이 되기도 전에 줄리아를 낳고 사망했거든.

나는 에스컬레 경이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가 다무는 것을 확인했다.

“올리버는 어때요? 비스컨 가로 오면 편할까요?”

“그건….”

당연하게도 에스컬레 경은 머뭇거렸다. 그리고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비스컨 가도 괜찮지. 백작 부인은 아주 좋은 사람이니까.”

“하지만 가난하죠. 올리버도 에스컬레 경이 보기에 그리 믿음직스러운 신랑감은 아니고요.”

“유제니.”

에스컬레 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처럼 입을 열었지만, 곧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올리버는 괜찮아. 좋은 녀석이지. 다만, 둘 다 좀 성급한 부분이 있잖니. 가능하면 서로 보완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게 좋지.”

결국 안 된다는 말이다. 게다가 에스컬레 경은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데는 반박하지 않았다.

괜찮다.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건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니까. 어머니는 제네비브 공주님의 말동무였고 꽤 부유한 집안이었다.

더 괜찮은 귀족과 결혼할 수 있었던 어머니가 아버지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잘생겼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어디 가서 이야기하기 좀 부끄러운 이유긴 하다. 그리고 아버지의 젊었을 적 초상화를 보면 좀 이해가 된다.

줄리아는 이 이야기를 듣더니 멀리 갈 것도 없이 올리버를 보면 이해가 된다고 했지.

“거마로트 공작가는 어떨까요? 줄리아가 편하고 행복하게 살까요?”

공작가는 부유하고 상급 귀족이다. 아니, 현 국왕의 삼촌이니 줄리아가 거마로트 공작 부인이 된다면 그녀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한 손에 꼽을 거다.

하지만 공작 부인이 된다고 편하게 살 수 있을 리 없다는 걸 줄리아가 더 잘 알 거다. 나는 인상을 쓰는 에스컬레 경을 조금 안됐다고 생각하며 바라봤다.

나는 에스컬레 경이 좋다. 내 친척이기도 하고 내 검술 선생님이기도 했으며 좋은 분이니까. 그는 고지식한 기사의 전형이고 누구보다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기도 하다.

그러니 줄리아에게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해 주고 싶겠지.

하지만 어머니도 그러지 않으셨던가. 어닝이 내게 가장 좋은 선택이 될 줄 알았다고.

“그 집안은 절대 안 되지.”

에스컬레 경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기 때문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 그 집안은 절대 안 된다. 그 집 아들이 망나니라서도 있지만 공작가라서.

아들이 아무리 망나니여도 공작가인데 아직까지 아들이 약혼을 안 했다는 건 둘 다 눈이 엄청나게 높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아들과 부모 둘 다.

나는 약간 기운이 빠진 에스컬레 경을 보고 입을 열었다.

“왜요? 거마로트 공작가는 공작가잖아요. 부유하고요.”

공작은 현 왕의 삼촌이다. 즉, 줄리아가 공작 부인이 된다면 왕과 왕비 외에는 그녀를 귀찮게 할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에스컬레 경의 태도는 굳건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지? 거마로트 백작이, 아니, 너도 알잖니?”

안다. 거마로트 백작과 나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으니까. 나는 에스컬레 경을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공작의 아들이 자작만 아니었다면, 힐데자르만 아니었다면요? 어닝이 공작의 아들이었다면요?”

“유제니!”

에스컬레 경의 입에서 말도 안 된다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 그도 어닝과 내가 왜 파혼했는지 알지? 소문으로 들은 게 아니라 어머니께 정확한 이유를 들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공작가에 부유하고, 어닝은 적어도 정부를 두거나 사생아를 만들어 오지도 않을 거예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완벽한 신랑감일 것 같고요.”

“여자 정부를 두지 않는다는 말이겠지.”

에스컬레 경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닝도 안 돼. 설령 그 녀석이 제대로 된 남자라고 해도 공작가는 너무 부담스러워.”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해서 제대로 된 남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내가 어닝과 파혼한 건 그의 성향 때문이 아니라 그가 나와 가족을 속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그걸 말하기 전에 에스컬레 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어떤 집에 시집을 가도 줄리아가 편하게 살지는 않을 거라는 말이지.”

그렇다. 어느 집도 나와 줄리아를 편하게 살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엘리엇의 구혼을 받아들인다 해도 그는 신흥 귀족이라 내게는 번즈 백작가를 관리해야 할 의무가 생긴다.

그리고 유서 깊은 집안보다 신흥 집안이 덜 선호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거다.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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