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27 – 2
엘리엇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조금 서글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나를 한참을 쳐다보다가 물었다.
“지금보다 더 높은 작위를 가진 집에서 태어나고 싶었던 적은 없습니까?”
지금보다 더 높은 작위? 후작가나 공작가 정도?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더 높은 작위를 가진 집이 아니라 지금보다 더 풍족한 집에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가족도 그대로고요?”
내 질문에 엘리엇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에이, 그러면 필요 없는데. 나는 콧잔등을 찡그리고 말했다.
“아니요. 지금으로 만족해요.”
지금의 가족들이라면 사실 더 낮은 작위여도 상관없었을 거다. 나는 발을 내리고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난 내가 레이디 비스컨이 아니라 비스컨 영애나 비스컨 양이었어도 괜찮았을 거 같아요.”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 엘리엇이 나를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라고 계속 잘못 불렀지.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 그리 달갑지 않다.
그런 호칭을 가졌다는 건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내가 진짜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이라면, 나는 열 살이 넘자마자 외국의 다른 귀족과 약혼했을 수도 있다.
외국의 다른 귀족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열네 살에는 약혼을 했겠지. 어쩌면 왕자님과 약혼했을 수도 있다. 고귀한 레이디 거마로트만 아니라면 말이지.
“당신은요?”
엘리엇의 얼굴에 비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나와 똑같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가끔은요.”
“어머, 그래요?”
그는 자기 손으로 이뤄서 그런 걸 바라지 않았을 줄 알았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자기 손으로 이뤘으니 이미 이뤄진 상태라면 더 대단한 일을 해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귀족이었다면 당신과 약혼한 건 렌시드가 아니라 저였을 테니까요.”
“자기 손으로 계승 작위를 따낸 사람이 바라는 게 너무 소박하지 않아요?”
나는 웃으며 물었다. 이 남자는 용과 싸워 나라를 지키고 작위를 받은 영웅이다. 그런 사람이 고작 바라는 게 나와의 약혼이라니.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엘리엇이 말했다.
“제 인생에서 유제니, 당신만큼 중요한 사람이 없는데 그게 왜 소박합니까?”
허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그래? 그거 참 고맙다고? 나는 그렇게 뻔뻔하지 못하다.
다행히 엘리엇은 내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는 씩 웃더니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참, 배를 정리한다고 하셨죠?”
오, 다행이다. 나는 그가 던져 준 구명줄을 재빨리 잡았다.
“네. 슬슬 서늘해져서요.”
게다가 이미 이번 달 예약은 꽉 찼다. 이번 달까지만 운영하고 종료할 생각이었다.
엘리엇도 강이 얼기 전에 배를 옮겨야 할 거다.
“하나만 부탁해도 돼요?”
수영장을 종료하면 다른 걸 해 보고 싶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던 그가 허리를 세우며 말했다.
“뭐든지요.”
* * *
“커널 남작은 구금됐다더군요.”
그날 오후, 배를 찾은 리사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렇다고 들었다. 커널 남작 부인뿐 아니라 최근 일어난 습격 사건의 범인으로 의심받고 있다고 한다.
“어우, 무서워.”
“그러게요. 그냥 바람둥이인 줄 알았는데.”
주변에 모여 있던 부인들도 한마디씩 덧붙이기 시작했다. 그러게. 그냥 여자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뒤에서 몰래 부인들을 공격하고 다닐 줄은 몰랐다.
“왜 그런 거래요?”
“커널 남작 부인이 정부를 두니까 화가 나서 그랬다던데요.”
“남작 부인을 살해하려 한 거로 부족해서 다른 사람들도 공격했단 말이에요?”
“우발적이라고는 하던데.”
그럴 리가. 나는 우발적이라는 말에 코웃음을 쳤다. 그건 계획적인 범행이었다. 내가 그렇게 말하기 전에 리사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우발적은요. 계획 범행이겠죠.”
“왜요?”
“미스토 경에게 범행을 뒤집어씌우기 위해서 아니겠어요? 커널 남작 부인이 습격받았을 때 미스토 경은 로고소 양과 있었다던걸요.”
그걸 아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사는 그런 나를 보더니 빙그레 웃으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언니와 헤어져 달라고 로고소 양이 미스토 경을 설득했던 모양이에요. 그게 미스토 경에게 도움이 됐죠.”
“하지만 최근에 미스토 경이 커널 남작 부인도 공격했을 수 있다는 기사가 났던데요?”
“그때 증언한 찻집의 직원이 진술을 철회했잖아요. 왜 철회했겠어요?”
다들 조용해졌다. 나는 리사의 정보력에 감사했다. 원래 감사하는 부분이기도 했지만 이럴 때 더더욱 감사하게 된다.
“어머, 그럼 진짜 계획 범행이네요.”
“잠깐, 그럼 미스토 경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다른 죄 없는 사람들을 공격한 거예요?”
바로 그거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갑판 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세상에.”
“뭐 그런 인간이 다 있죠?”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나는 리사와 로렌을 한 번씩 쳐다보고 다시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뭔가 부족한 게 없는지 확인했지만 이미 로렌이 체크해서 지시한 모양이었다.
부족한 냅킨을 직원들이 채워 넣는 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거마로트 공작가에 손님이 온 모양이던데요.”
커널 남작을 향한 떠들썩한 야유가 지나고 리사가 말했다. 거마로트 공작가에 손님이 왔다고?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다.
부유한 귀족들은 늘 손님이 찾아오니까. 먼 친척이 사교계에 데뷔해야 하면 그 시즌 내내 돌봐 주는 경우도 있고 후원하는 화가나 작가가 머무르는 경우도 있다.
“공작가라면 늘 손님으로 문전성시를 이룰 텐데요?”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부인이 리사에게 말했다. 리사는 그녀의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듣기로는 공작 부인이 받아들였다더라고요.”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나 봐요?”
최근 공작 부인은 연락이 되지 않는 아들 때문에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있다고 들었다. 안됐다. 거마로트 공작 부부의 자식은 아들 한 명뿐인데 그리 성격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공작의 하나뿐인 아들인데 아직도 약혼을 못했다는 거로 그의 성격이 어땠는지 능히 알고도 남겠지.
아, 이렇게 말하면 아직 약혼 못 한 올리버도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겠군.
“친척인 거 아닐까요?”
또 다른 사람의 질문에 리사는 인상을 썼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친척은 아니고, 아들의 친구라는 것 같던데요.”
“아들? 힐데자르 거마로트요?”
행방불명됐다던 그 친구? 사람들의 시선이 리사를 향했다. 리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네. 아들 친구가 와서 공작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하더라고요.”
대체 이런 내밀한 이야기는 어떻게 아는 걸까. 나는 다시 한번 그녀의 정보 습득력에 감탄했다.
“거마로트 백작의 친구면, 행방을 알 수도 있겠네요.”
거마로트 공작은 동시에 다슨 영지의 영주이기도 하다. 올리버가 비스컨 남작이라 불리기도 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힐데자르를 거마로트 백작이라 부른다.
그래서 거마로트 공작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난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방불명된 아들의 행방을 알 수도 있는 친구가 나타났으니까.
“그나저나 진짜 어디로 간 걸까요?”
이어진 의문에 나 역시 같은 의문을 떠올렸다. 어디로 간 걸까. 모험을 떠난다고 친구들을 모아 용병까지 고용해서 떠났다.
시정잡배도 아니고 공작의 아들이 이렇게 사라질 수도 있나?
“저, 저 친척에게 들었는데요.”
그때, 제일 구석에 서서 차를 홀짝이던 여자가 손을 들며 말했다. 우리는 재빨리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하인즈 양, 친척이 어디 사는데요?”
“이즈요. 정확하게는 이즈에서 좀 떨어진 마을인데….”
안다. 북부의 이즈. 핸더슨 후작의 영지다. 엘리엇이 그 근방 출신이라고 했지.
하인즈 양은 나를 힐끔거리며 말을 이었다.
“몇 달 전에 그쪽에 엄청난 부자가 와서 돈을 뿌리면서 용병을 구했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부자가 거마로트 백작이 아닌가 싶어요.”
그럴 수 있겠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에 리사가 물었다.
“용병은 왜 구했대요?”
“뭘 잡으러 간다고 했다는 거 같아요.”
“뭘 잡아요?”
곰? 사슴? 근데 수도에서 떠날 때 용병을 꽤 많이 데려갔다. 게다가 사냥을 할 거면 용병이 아니라 사냥꾼이 필요할 텐데?
사람들의 의문 속에서 하인즈 양은 이런 일이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나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엄청난 걸 잡는다고 했대요. 뭘 잡는지는 모르겠지만, 친척 말로는….”
말로는? 사람들의 몸이 하인즈 양을 향해 기울어졌다. 리사는 깔깔대고 웃으며 말했다.
“이야기꾼의 재능이 있네요, 하인즈 양.”
놀랍게도 리사의 칭찬에 하인즈 양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그녀는 자기 뺨을 손으로 감싸며 웅얼거렸다.
“뭐라고요?”
못 들었다. 리사 역시 못 들었는지 다시 한번 말해 달라고 부탁했고 하인즈 양은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용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