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27 – 1
커널 남작 부인을 공격한 건 커널 남작이 맞았다. 정부가 임신한 아이를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자 그녀를 죽여 버리려 했다고 한다.
허.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 거긴 하다. 커널 남작 부인에게 정부가 생겼고 커널 남작의 정부가 임신을 한 상황에서 남작 부인이 사망한다면 누가 가장 유리할지 생각하면 당연하니까.
“왜 범인이 남작이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아차, 맞은편에 엘리엇이 앉아 있었지.
그는 나와 달리 여전히 똑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다는 뜻이다. 내가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은 탓에 평소보다 그의 얼굴이 더 높았다.
나는 아예 소파 등받이에 머리까지 댄 채 엘리엇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번 일로 가장 많은 혜택을 받는 게 남작이니까요.”
“남작의 정부가 아닙니까?”
음, 그럴까? 나는 엘리엇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몰라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러자 그가 다시 말했다.
“남작 부인이 사망하면 정부가 남작 부인이 될 테니까요.”
“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군. 아마 그건 엘리엇이 귀족 출신이 아니라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겠지.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단어를 고르느라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재수 없게 들리지 않았으면 한다.
“남작의 정부는 평민 출신이죠. 조부모 중에도 귀족은 없었고요.”
남작과는 남작이 다니는 술집에서 만났다고 들었다. 남작이 다니는 술집이니 좀 고급스럽기는 하겠지. 거기서 일하는 가수나 무용수와 만나는 남자의 이야기는 그리 드물지 않다.
어쩌면 남작의 정부는 남작 부인이 사망하면 자신이 남작 부인이 될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남작은 그녀를 남작 부인으로 만들어 줄 생각이 없을 거예요.”
우리는 귀족이다. 그러니까 남작과 나 말이다. 이렇게 묶이는 게 불쾌할 정도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귀족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알고 있다.
“커널 남작가는 괜찮은 집안이에요. 부유하기도 하죠. 술집에서 만난….”
남작의 정부가 무슨 일을 했지? 무용수? 가수? 아니면 서빙?
가수라면 좀 낫다. 하지만 귀족과 결혼할 정도라면 나도 이름을 알 정도의 가수여야 한다.
“노동자를 부인으로 삼지는 않을 거예요.”
귀족과 평민. 그 두 가지로만 계급이 나뉘어져 있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훨씬 더 세부적으로 나뉘어져 있다. 예를 들면 엘리엇과 올리버는 둘 다 백작이다. 아니, 올리버는 백작이 될 사람이지.
그러니 귀족이 아닌 사람이 보기엔 같은 단계로 보일 거다.
그리고 이번에 사교계에 데뷔한 어린 귀족이 보기엔 엘리엇이 올리버보다 위 단계로 보일 거다. 그는 아직 백작이 아닌 올리버와 달리 이미 백작이고 부유하니까.
하지만 나처럼 사교계에 데뷔한 지 좀 된 사람의 눈으로 보면 살짝 달라진다. 엘리엇과 올리버가 같은 단계로 보인다.
번즈 백작가는 신흥 가문이니까. 우리 집이 조금만 더 경제적으로 상황이 좋았다면 비슷한 게 아니라 올리버가 좀 더 위 단계였겠지.
아마 나이 드신 분들께는 엘리엇보다 올리버가 더 나은 구혼자다. 어머니나 왕대비 전하 같은 분들께는 말이지.
여자 쪽도 마찬가지다. 로고소 가문은 경제적으로 그리 좋지 못하다 들었다. 그렇다 해도 커널 남작 부인이 지금 커널 남작의 정부보다 훨씬 수준이 높다.
아니, 이걸 수준이라고 말하는 건 좀 그런데.
많은 귀족 집안의 여자들이 궁핍하게 살면서도 노동을 피하는 이유가 바로 이거다. 아무리 몰락한 가문이라 해도 귀족 가문과 노동자 중에서 결혼 상대를 고른다면 귀족들은 전자를 선택한다.
“그는 젊으니까요. 아이만 빼앗으려 했겠죠.”
남작 부인이 사망하면 귀족 출신의, 똑같이 사정이 어려운 집안의 여자와 재혼할 거다. 노동자 출신의 정부를 남작 부인으로 삼는 게 아니라.
“흠.”
내 설명에 엘리엇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원래, 꿈에서는 정부가 남작 부인을 살해했다고 기억하는데요.”
“후계자를 낳았다는 이유로 남작 부인을 질투해서요.”
엘리엇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것도 영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의 꿈에서도 정부가 남작 부인을 살해해서 얻는 게 없다. 아무리 질투로 눈이 멀었다고 해도 살인을 결심하고 시도하는 데에는 아주 큰 결심이 필요하다.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남작의 정부가 미쳤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내 기준으로는 남작이 남작 부인을 살해하고 정부의 아이를 남작 부인의 아이로 둔갑시킨 다음 살해죄를 정부에게 뒤집어씌웠다는 이야기가 더 합리적이다.
“범인이 남작이라는 걸 언제 눈치채셨습니까?”
엘리엇의 질문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눈치챘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그냥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당신과 클레어의 꿈이나 지금이나 남작 부인은 모든 것을 잃었잖아요. 그에 반해 남작은 원하는 것을 얻었고요.”
상황이 달라졌는데도 결과는 비슷했다. 꿈과 달리 남작 부인은 아이를 낳지 않았는데도 살해당할 뻔했다. 그렇다면 꿈에서 남작 부인이 살해당한 것도 사람들이 아는 것과 다른 이야기가 있다는 뜻일 거라고 생각했다.
“원하는 것을 얻은 건 아닐 겁니다.”
그렇게 말한 엘리엇은 나를 보고 씩 웃었다. 그리고 내가 그게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커널 남작에게 인사를 하셨죠.”
그랬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마 이미 나를 알고 있었을 거다. 그리고 엘리엇도. 엘리엇은 유명하니까. 그리고 나는 비스컨 백작가의 사람이니까.
그 유명한 올리버 비스컨의 평범한 여동생. 그게 나다.
그럼에도 굳이 인사를 한 건 커널 남작의 원망이 에리카를 향하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안 그러셨으면 좋겠습니다.”
놀랍게도 엘리엇은 내가 왜 커널 남작 앞에 나섰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나를 향해 몸을 기울이더니 손깍지를 끼며 덧붙였다.
“그런 작자가 벌을 받는다고 해서 뉘우치진 않을 겁니다. 당신을 원망하겠죠. 위험합니다.”
알고 있네.
나는 허리를 세웠다가 다시 소파에 몸을 묻었다. 자기 부인을 죽이려 한 자다. 엘리엇과 클레어의 꿈에서도 그랬다고 했으니 우발적인 것도 아니고 원래 그런 자인 거겠지.
“그래서예요.”
나는 엘리엇처럼 손깍지를 끼며 말했다.
그때, 커널 남작은 내 이름을 물어본 게 아니었다. 당신들 뭐냐는 건 보통 뭐 하는 인간들이냐는 뜻이지. 즉, 거기서 뭘 하고 있냐는 뜻이다.
그럼에도 자기소개를 한 건 그래서였다. 나는 잠시 내 발끝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 아까 구두 벗었는데. 그거 어디 갔지?
“그런 사람은 자기 잘못을 뉘우치기보다는 원망하고 전가할 상대를 찾겠죠. 커널 남작 부인은 의식 불명이니 곁에 있던 로고소 양에게 불똥이 튈 거고요.”
그것도 알았나 보다. 엘리엇은 못마땅하다는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했다.
“난 가족이 있어요. 비스컨 백작가의 사람이고 내 아버지가 비스컨 백작이죠. 저래 보여도 사이가 좋은 오라버니가 있고요.”
하지만 로고소 양은 아니다. 그녀는 홀아버지 밑에서 언니와 자랐지만 로고소 경은 그리 믿음직스러운 사람은 아니라 들었다.
로고소 양을 보호해 주는 건, 아마도 커널 남작 부인이었을 거다. 두 사람은 사이좋은 자매였겠지. 그리고 지금 커널 남작 부인은 누굴 지키기는커녕 자기 자신도 지키지 못한다.
“괜찮아요.”
나는 깊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커널 남작 같은 자들을 안다. 그들이 손대는 건 손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뿐이다. 조금이라도 이기기 힘들 것 같으면 절대 덤비지 않는다.
“내가 비스컨 백작가에서 태어난 건, 이럴 때를 위해서라고 생각해요.”
로고소 양 같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방패가 되어 주는 거. 그게 더 높은 작위의 귀족가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유제니.”
가만히 나를 쳐다보던 엘리엇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비스컨 백작가의 사람이라 좋습니까?”
너무 의외의 질문이라 순간 그의 질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스컨 백작가의 사람이라 좋냐고?
사람이 태어나고 자라는 건 그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운이 좋아서 비스컨 백작가에서 태어났고 레이디 비스컨으로 자랐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어떤 힘을 가졌다면, 그게 우연이거나 운명이거나 상관없이 그 힘을 좋은 쪽으로 써야 한다는 거다.
“음, 좋아요.”
나는 아주 잠깐 생각한 뒤 말했다. 비스컨 백작가의 사람이라 좋냐고? 좋다. 그리 풍족하진 않지만 나는 풍족한 사랑을 받았다. 어머니는 조금 과도하게 날 보호하기는 하시지만 나를 사랑한다는 걸 안다.
올리버도 가끔은 목을 졸라 버리고 싶지만, 기본적으로는 사랑하는, 잠깐. 우웩.
아니, 그러니까. 기본적으로는 아끼는 오라버니라고.
아버지도.
아버지가 생각나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소파 위에 발을 올려 무릎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나, 어릴 때 고집이 좀 셌거든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조용히 하지 못해? 나는 엘리엇에게 그런 시선을 보냈고 그는 겸허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 신사라면 그래야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올리버만 후계자 수업을 하셨거든요. 그게 뭐냐면, 장자를 데리고 영지를 돌면서 시찰도 하고 가문의 역사 같은 걸 가르쳐 주는 거예요.”
보통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교육이다. 집안마다 나이는 다르지만 보통 열 살 전에 시작한다. 나는 피식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 말로는 내가 아버지한테 따졌대요. 왜 나는 후계자 수업을 안 해 주시냐고요.”
얼마나 논리적으로 따지던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말을 잃었다고 한다. 오라버니가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영지를 다스려야 하니까 당연히 나도 배워야 한다고 했단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엘리엇은 웃으며 물었다. 그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 있는 게 보기 좋았다. 나는 키득거리며 말했다.
“다음 날부터 저도 올리버 옆에서 같이 수업을 받았어요.”
아버지는 내 말이 맞다고 했다고 한다. 자식이 둘뿐인데 올리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영지를 지킬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아버지의 판단이 옳았다. 비스컨 가의 영지에 대해서는 올리버보다 내가 더 잘 아니까.
나는 웃으며 엘리엇을 쳐다봤다. 그리고 말했다.
“네. 우리 집에서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