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19/239)

124화. 26 – 3

“솔직히 말해도 돼요?”

에리카는 커널 남작 부인의 침실에 있었다. 커다란 침대 한쪽에 누워 있는 언니가 어찌나 작아 보이던지, 그녀의 마음이 미어졌다.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는 말들이 에리카의 마음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언니를 원망하고 비난했던 예전의 일들이 후회가 되어 그녀의 마음속에 무겁게 쌓여 있었다.

“전 아직도 이 모든 일이 꿈같아요.”

지금 당장이라도 이멜다가 그녀를 흔들어 잠에서 깨울 것 같다. 그러면 에리카가 파혼한 것도, 이멜다가 강도를 당해 의식 불명이 된 것도 꿈일 것 같다.

아니, 아예 이멜다가 커널 남작과 결혼한 것부터 꿈인 거다.

에리카는 이멜다를 끌어안고 아주 나쁜 꿈을 꿨다고 할 테고 이멜다는 늘 그렇듯 자극적인 기사 때문이라고 하겠지. 그러면 에리카는 절대, 절대 커널 남작과 결혼하지 말라고 할 테고.

“언니.”

엘리카는 바짝 마른 이멜다의 얼굴을 보며 눈물을 떨어트렸다. 커널 남작이 정부를 뒀다고 했을 때, 에리카는 충격받긴 했지만, 이멜다에게 할 수 있는 게 없지 않냐고 했다.

커널 남작은 로고소 집안에게는 과분한 구혼자였다. 로고소 남작도 아니고 로고소 경을 아버지로 둔 이멜다와 에리카가 커널 남작보다 더 나은 신랑감을 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에리카는 적어도 이멜다가 정부를 만들었을 때 입 닥치고 있었어야 했다. 언니가 커널 남작의 바람기로 그렇게 고생하는 걸 봤다면, 그랬어야 했다.

“내 잘못이에요.”

에리카는 이멜다의 몸 위로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이기적이었다. 이멜다가 정부를 둔 일로 사교계가 떠들썩한 것도 싫었고 파혼한 전 약혼자가 이 일을 들먹이는 것도 수치스러웠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언니가 부끄러웠다.

부끄러워해서는 안 됐는데. 그녀만은 이멜다의 편이 되어 줬어야 했는데.

“깨어나기만 하면 언니가 뭘 해도 아무 말도 안 할 거예요.”

정부를 다섯을 만들어도 아무 말도 안 할 거다. 아니, 다섯 명이 아니라 백 명을 둬도 아무 말도 안 할 거다. 그녀의 언니가 정신을 차리기만 한다면.

“그게 언니를 행복하게 한다면요.”

정부를 둔다는 건 여전히 에리카에게는 끔찍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게 언니를 행복하게 한다면 참을 수 있다.

사실은 처음부터 그랬어야 했다. 에리카는 가만히 언니를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전에 언니가 집에 하소연하러 온 적이 있어요.”

커널 남작이 세 번째 정부를 들였을 때였다.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냐고, 이것도 참고 살아야 하냐고 집에 왔었다.

그때 로고소 경은 그럼 어쩔 거냐고 했고.

자신이 한 말과 똑같아서 에리카의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녀는 이멜다의 바싹 마른 손을 잡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기도하듯 거기에 이마를 대고 웅얼거리듯 말했다.

“아버지가 그랬거든요. 이혼하면 비참하고 고독하게 죽는다고요.”

결혼하지 못해도 그럴 거라고 말했다. 에리카는 그 이야기를 마치 잠자리에 들기 전에 빨리 잠들지 않으면 마녀가 나타나 네 손톱을 다 뽑아 간다는 이야기 듣듯 들었다.

“아버지한테 묻고 싶네요. 지금 언니가 행복하게 살고 있냐고.”

남편은 정부에게 해 준 집을 전전하느라 의식 불명인 부인은 들여다보지도 않는다. 에리카가 이 집에 억지로 들어오기 전까지 의사는 이멜다에게 변변한 치료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누가 봐도 행복하게 사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건 이멜다가 의식 불명이 되기 전에도 그랬다.

“로고소 양.”

조용한 남작 부인의 침실을 노크한 집사는 문을 열며 조심스럽게 에리카를 불렀다. 그는 이멜다를 한 번 쳐다보고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밤이 늦었습니다. 그만 주무시는 게 어떨까요.”

그래야 한다. 하지만 에리카는 머뭇거렸다. 그녀는 잠시 입술을 깨물더니 결심한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집사를 따라 방 밖으로 나갔다.

커널 남작 부인의 침실 불이 꺼졌다. 마르코는 집 밖에서 그것을 보고 있었다.

그는 평생을 이 집에서 살았다. 어느 창문의 고리가 헐거워서 힘을 주면 창문에 틈이 생긴다는 것도 안다. 마르코는 소리 없이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집사가 로고소 양에게 저녁 인사를 하는 것을 들은 마르코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안녕히 주무시긴 뭘 안녕히 주무셔? 적당히 내쫓았어야지. 그가 들이지 말라고 했지만, 집사는 남작 부인의 동생을 거부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의식 불명인 언니를 간병하겠다는데 쫓아낼 수는 없다. 대부분의 귀족은 길게는 몇 년을, 짧게는 몇 주를 머무는 손님을 가지고 있다. 여유가 없는 친척을 돌보는 건 귀족의 의무니까.

결국, 에리카 로고소는 언니를 간병한다는 이유로 커널 저택에 며칠째 머무르고 있었다.

“쯧.”

마르코는 가볍게 혀를 차며 커널 남작 부인의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조용히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침실 안은 그가 밖에서 확인한 것처럼 어두웠다. 그는 재빨리 불을 켜기 위해 램프를 찾았다.

램프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불을 붙이는 게 어렵긴 했지만, 마르코는 어쨌든 성공했다.

그는 램프를 들어 침대에 누워 있는 이멜다의 얼굴을 확인했다.

“움직였다고?”

손을 움직였다고 했다. 그래서 저 귀찮은 에리카가 의사를 다시 불렀다고. 그는 에리카가 불렀다는 의사를 만나서 정말로 남작 부인의 손이 움직였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남작 부인의 상태가 호전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뭐가 호전되었다는 건지 모르겠다. 오히려 기억보다 좀 더 핼쑥해져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이게 그가 기억하는 이멜다가 맞나 싶을 정도로 눈빛이 형형하던 부인을 떠올렸다.

수척해진 채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 그때의 모습이 오히려 상상이 가질 않는다. 하지만 이멜다는 마르코가 놀랄 정도로 꿋꿋했고 그의 요구를 받아 주지 않았다.

“네게 불만은 없어, 이멜다.”

마르코는 램프를 든 채 이멜다에게 속삭였다. 그는 정말로 자신의 부인에게 불만이 없었다. 다른 시끄러운 여자들과 달리 이멜다는 그가 정부를 두거나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걸 크게 잔소리하지 않았다.

하기야, 잔소리하면 아이도 못 갖는 계집이 시끄럽게 군다고 소리치면 그만이니 상관없었지만.

“그러게 네가 임신했어야지.”

마르코는 그렇게 말하며 혀를 찼다. 그리고 램프를 협탁에 올려놓았다.

라거티가 임신했다. 그의 여섯 번째 정부로 뻣뻣한 이멜다와 달리 라거티는 남자의 마음을 달랠 줄 알았다. 그러니 가장 먼저 임신한 거겠지.

“날 원망하지 마. 분명히 기회를 줬으니까.”

마르코는 이멜다에게 기회를 줬다. 정부가 임신을 했으니 그 아이를 커널 남작가의 후계자로 인정하라고. 원한다면 아이를 직접 키워도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이멜다는 꼿꼿하게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고 남의 아이를 키울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했다.

아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로고소 가에 피해가 갈 거라고 말해도 이멜다는 눈썹 하나 끄떡하지 않았다.

- 상관없어요. 이미 에리카는 약혼했으니까.

- 그렇다면, 로고소 경은? 그에게 불이익이 갈 수도 있어.

안타깝게도 이멜다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해 줄 만큼 해 줬다고 생각했다. 그가 원하는 대로 커널 남작과 결혼했고 남작의 바람기를 모두 눈감아 주었다.

그동안 로고소 경은 커널 남작을 사위로 두었다는 이유로 어깨를 세우고 다녔다. 이멜다 몰래 커널 남작에게 몇 번이나 도박 빚을 갚아 달라고 하기도 했고.

물론 그걸 이멜다에게 숨겨 줄 커널 남작이 아니다. 그는 로고소 경이 도박 빚을 갚아 달라고 쫓아올 때마다 갚아 주는 대신 이멜다를 비난했다.

- 마음대로 해요. 당신만큼이나 나도 그 작자가 싫으니까.

그제야 마르코는 그의 수가 이멜다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어떻게 해도 이멜다는 사생아를 인정해 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아무리 남편이 밖에서 사생아를 데려온다 해도 부인이 후계자로 인정해 주지 않으면 사생아일 뿐이다. 커널 남작가는 마르코의 것이지만 이멜다 역시 커널 남작 부인이다.

그 집안의 후계자는 부부 두 명이 모두 인정한 존재여야 한다.

마르코는 발시안의 멍청한 법을 원망했다. 그리고 금세 그 방법을 타개할 방법을 찾았다.

“그러게 순순히 아이를 인정했으면 이런 일도 없잖아.”

그는 그렇게 말하고 베개를 집어 들었다. 의식 불명인 사람이 갑자기 사망하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설령 그날 오전에 손을 움직였다 해도 마찬가지다.

마르코는 베개로 천천히 이멜다의 얼굴을 누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뒤에서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엘리엇!”

여자의 목소리가 내뱉은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 마르코가 깨닫기도 전에 강한 힘이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그가 고통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그의 몸이 빙글 돌았다.

“아악!”

‘쿵!’ 하고 마르코의 몸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마치 누군가에게 던져진 듯한 감각에 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사이, 설렁줄을 잡아당긴 유제니가 침실 문으로 달려가 문을 활짝 열고 소리쳤다.

“의사! 의사 불러와요!”

그다음부터는 일이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와르르 몰려온 사람들이 두 무리로 나뉘어져 한 무리는 커널 남작 부인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다른 무리는.

“남작님.”

정신을 차린 마르코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집사의 침통한 표정에 인상을 썼다.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그가 어리둥절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누군가가 달려와서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

“이 나쁜 놈!”

“아악!”

다시 마르코의 몸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이번에는 정말로 뭔가가 ‘뚝’ 하고 부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니가 인간이야? 인간이냐고!”

발길질이 이어졌지만, 다행히 마르코의 몸에 닿지는 않았다. 커널 저택의 하인들이 에리카의 몸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아악!”

일어서려던 마르코는 찌르는 듯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다리가 부러진 것 같다.

“누, 누가 의사 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고개를 든 마르코의 눈에 그를 쳐다보는 집사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금발에 약간 고집 세 보이는 듯한 여자. 그리고 천장에 닿을 것처럼 큰 키와 덩치를 가진 검은 머리의 남자. 둘 다 최근 사교계에서 유명해진 사람들이다.

“당신들은 뭐야?”

누구냐가 아니라 뭐냐고 물었다. 정체가 궁금한 게 아니라 왜 여기 있는지, 여기서 뭘 하는 건지 궁금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유제니는 마르코의 질문을 무시하고 에리카의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악수를 청하듯 오른손을 내밀며 말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비스컨 백작가의 유제니 비스컨이에요. 이쪽은 제 친구인 엘리엇 번즈 백작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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