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26 – 1
“세상에.”
어머니의 신음에 응접실 한쪽에 앉아 있던 클레어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저런.
나는 클레어에게 별거 아니라는 신호로 손을 저어 주었다. 그리고 재빨리 어머니가 보고 계시는 신문이 뭔지 확인했다.
발시안 일보.
다행히 손님이 있는 동안은 응접실에서 커런트의 속삭임을 읽지 않겠다는 어머니의 다짐이 아직 유효한 모양이다. 덕분에 우리 집은 커런트의 속삭임을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읽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숙면을 방해하는 것 같단 말이지. 자기 전에 누구와 누구의 불륜이니, 누구와 누구의 치정 싸움이니 하는 자극적인 기사를 읽고 나면 잠을 이루기가 좀 어려워지는 것 같다.
“왜요, 어머니?”
나는 클레어에게 다시 한번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고 어머니 옆으로 자리를 옮기며 물었다. 원래라면 어머니 바로 옆에 앉아서 커런트의 속삭임을 읽고 있었을 텐데 이것도 클레어가 머무는 동안 바꾼 것 중 하나다.
어머니가 다 큰 딸이 너무 어머니 곁에 찰싹 붙어서 같은 신문을 읽는 걸 보이는 게 좋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범인이 잡혔다는구나.”
“범인이요?”
“부인들만 공격하던 범인 말이야.”
그거라면 좋은 일 아닌가? 탄성이면 몰라도 신음이 나올 기사는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목을 빼고 신문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머니는 나를 위해 신문 방향을 바꿔 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범인이 미스토 경이라지 뭐니?”
“미스토 경이요?”
나보다 클레어가 먼저 놀라서 물었다. 미스토 경이 누구더라?
“알아요, 라넌 경?”
어머니의 질문에 클레어가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는 건 아닌데, 이름은 들었습니다. 그…, 커널 남작 부인의….”
“아.”
기억났다. 나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른 뒤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거트 미스토 경. 커널 남작 부인의 정부다.
그래서 이름이 익숙했던 거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어서.
“미스토 경이 범인이라고요?”
“그래. 어쩌면 커널 남작 부인을 공격한 것도 이 남자일 수 있다고 하네.”
어머니는 기사를 한 번 더 읽으며 그렇게 말했다. 제일 첫 희생자가 커널 남작 부인이었던가?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곧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커널 남작 부인 때는 미스토 경은 다른 곳에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라이언 경이 그랬다. 커널 남작 부인의 사고와 미스토 경은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만약 있었다면 벌써 치안관들이 그를 조사했을 거라고 했지.
“음, 기사에는 그런 말은 없네.”
다시 한번 기사를 확인한 어머니가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갑자기 응접실 문을 누군가가 노크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열린 틈으로 집사가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마님.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지금?
놀라서 어머니를 쳐다보자 어머니는 오늘 오기로 한 사람이 있었냐는 표정을 지었다. 없다. 그사이 집사가 내게 다가와 명함을 내밀었다.
“로고소 양입니다.”
마침 커널 남작 부인의 이야기를 하던 참이었다. 나는 명함을 받아 들고 집사의 뒤를 따라 응접실에서 나왔다.
로고소 양은 작은 응접실에 있었다. 평소 큰 친분도 없었고 연락도 없으니 작은 응접실로 배정한 거겠지.
“로고소 양.”
내가 들어서자 로고소 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뻐 보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반대였다. 나는 불안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어리둥절해졌다.
기사를 아직 못 봤나? 커널 남작 부인을 해친 범인을 잡았다는 걸 알았다면 좀 더 얼굴이 밝을 줄 알았는데.
“레이디 비스컨. 혹시 오늘 신문 보셨나요?”
어라.
신문을 못 본 줄 알았는데 본 모양이다. 나는 그녀에게 앉으라고 권하며 말했다.
“봤어요. 미스토 경이 최근 일어난 사건의 범인이라면서요.”
“아니에요.”
으응?
내 말에 바로 반박한 로고소 양은 자신도 아차 싶었는지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다른 피해자들은 그럴지도 몰라요. 하지만 언니는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라이언 경도 그렇게 말하긴 했다. 커널 남작 부인을 공격한 건 미스토 경이 아니라고. 하지만 라이언 경은 미스토 경과 친분이 있어 보였다. 그러니 그가 치안관에게 조사를 받지 않은 것도 아는 게 아닐까.
나는 로고소 양이 왜 나를 찾아왔는지 모르겠어서 고개를 기울였다. 커널 남작 부인을 공격한 게 미스토 경이 아니라는 말을 하려고 찾아왔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나?
“아니에요. 전 미스토 경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으음.
나는 잠시 로고소 양을 쳐다보다가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미리 말하지만 전 미스토 경을 싫어해요. 그는 염치라곤 없는 불한당이죠.”
범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치고는 꽤나 거친 취급이다. 하지만 나도 로고소 양의 판단에 일부 동의했다. 어쨌거나 결혼한 커널 남작 부인의 정부인 사람이니까. 염치가 없는 건 맞지.
“하지만 그가 언니를 그렇게 만든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른 피해자들은, 어쩌면 미스토 경의 짓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언니는 아니에요.”
허어. 이렇게까지 확신하는 이유가 뭘까. 나는 가만히 로고소 양을 쳐다보다가 물었다.
“왜요? 그렇게까지 미스토 경의 결백을 믿는 이유가 뭔데요?”
염치가 없는 불한당이라는 것 치고는 결백을 믿네. 내 질문에 로고소 양은 잠시 망설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랑 있었거든요.”
응?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커널 남작 부인이 공격받았을 때 미스토 경이 로고소 양과 있었다고? 그리고 로고소 양은 그걸 지금까지 비밀로 하고 있었고?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러길 바라요.”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방금 로고소 양은 미스토 경이 염치없는 불한당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내가 제일 먼저 생각한 그런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남작 부인과 헤어지라고 설득하려 했군요.”
다음 순간, 로고소 양은 마치 무너지듯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는 죄책감과 좌절에 빠져 울음인지 신음인지 모를 것을 내뱉었다.
“나 때문이에요.”
가까스로 로고소 양이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를 냈다. 언니의 정부에게 언니와 헤어지라고 설득한 게 문제가 있는 것 같진 않은데.
나는 눈치껏 차를 내온 하인에게 고맙다고 눈짓하고 말했다.
“로고소 양은 형제를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했을 법한 일을 한 것뿐이에요.”
나도 올리버가 그런 짓을 했다면 상대방에게 헤어지라고 설득했을 거다. 아, 물론 올리버의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 놓고.
하지만 로고소 양은 그런 거로 죄책감을 가진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봤다. 약간 울었는지 그녀의 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날, 미스토 경은 원래 언니를 바래다주려고 했어요.”
좋지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내가 아무 말 없이 멈춰 있자 로고소 양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데 내가, 미스토 경에게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만나 달라고 했어요. 언니는 혼자 집으로 돌아가야 했고요.”
그러다가 공격을 받아 의식 불명이 되었다는 말이다.
저런.
나는 로고소 양의 죄책감을 이해했다. 그녀가 왜 커널 남작 부인을 보호하려 했는지도.
그렇다면 미스토 경은 정말로 범인이 아니다. 적어도 커널 남작 부인의 사건에 한해서는. 하지만 기사에는 그렇게 났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아까부터 들고 있던 생각이긴 했다. 희미하던 생각이 점점 더 확신으로 바뀌어 갔다. 나는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남기고 어머니가 계신 응접실로 돌아갔다.
“어머니, 아까 그 기사요. 왜 미스토 경이 커널 남작 부인을 공격했는지도 나와 있나요?”
클레어와 좀 어색했던 모양이다. 어머니와 클레어는 내가 돌아온 것을 반기는 기색이었다. 어머니는 재빨리 방금 전 우리가 본 기사로 돌아가서 한 번 더 훑으며 말했다.
“음, 잠깐, 여기 나와 있네. 커널 남작 부인이 헤어지자고 했다는구나.”
“미스토 경이 그렇게 말했대요?”
내 질문에 어머니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아니, 잠깐, 커널 남작이 증언했다는데?”
곧바로 나와 클레어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알겠다며 응접실에서 나온 나를 뒤따라오더니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제 꿈에서도 커널 남작 부인은 살해당했습니다.”
“뭐라고요?”
생각도 못 한 이야기에 나는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그리고 무슨 일인가 하고 돌아보는 어머니께 아무것도 아니라는 손짓을 한 뒤 클레어를 데리고 빈 응접실로 들어갔다.
“꿈에서요?”
“네. 잊고 있었는데요. 방금 막 기억났습니다.”
자기 일이 아니라 잊어버렸다는 말에 나는 입을 딱 벌리려다가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지. 다들 자기 일이 아니면 잊어버리니까.
“그럼 이번에도 커널 부인이 살해당할 거라는 말이네요?”
“그런데 그게, 이번에는 범인이 달라요.”
“누구인데요?”
클레어는 미간을 찡그리더니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기억이 잘 안 나는 모양이지?
지금까지의 꿈은 예지몽이었다. 대부분 실제로 일어났으니까.
범인이 다르다면, 이번에는 범인을 잘못 잡은 건지도 모른다. 미스토 경은 누명을 썼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게 꽤 그럴듯해 보이고.
“어떤 여자였는데요.”
고민 끝에 클레어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미간을 찡그린 채 말을 이었다.
“커널 남작의 정부였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