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116/239)

121화. 25 – 3

“아주 즐거웠네.”

왕비 사이실리아는 흐뭇한 표정으로 유제니에게 말했다. 정말로 재미있었다. 물에 몸을 담그는 감각은 익히 알고 있지만, 수영장이라는 곳에서 움직이는 건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옆에서 수영을 가르쳐 준 로렌에게 고개를 돌렸다.

처음에는 벌벌 떨던 이 소녀도 나중에는 그녀를 가르쳐 주는 데 꽤 여유가 있었다. 덕분에 사이실리아도 안심하고 수영을 즐길 수 있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물에 빠진다면 도와줄 사람이 있다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다행입니다, 전하.”

유제니는 미소를 지으며 왕비의 귀걸이를 건네주었다. 수영을 하느라 젖었지만, 왕비의 차림새는 완벽했다. 그녀가 데려온 시녀들이 젖은 머리를 완벽하게 말려 다시 빗고 말아 올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왕비를 위해 준비한 커다란 방에서 약간 쉬기까지 했다.

따듯한 차와 달콤한 케이크를 앞에 둔 덕에 사이실리아의 기분은 아주 관대했다. 그녀는 유제니가 건네준 귀걸이를 달고 유제니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했다.

“덕분에 즐거운 경험을 했어. 강에 떠 있는 배에서 수영을 하다니. 아주 즐겁더군.”

마음 같아서는 다음번에 한 번 더 왕자를 데리고 오면 안 되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아까도 봤지 않았나.

이 배의 주인인 번즈 백작조차도 못 들어오게 하는 걸.

명령하면 이룰 수 있겠지만 레이디 비스컨의 말이 맞다. 정말 즐거웠지만, 구설에 오를 정도의 가치는 없었다. 사이실리아는 패터슨 자작 부인이 빨리 수영장을 짓길 바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게 즐거움을 줬으니 자네에게 보답을 하고 싶군.”

바라는 게 있다면 말하라는 왕비의 말에 유제니는 살짝 놀랐다. 그녀가 만족해서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왕자를 데려오는 것을 거절했으니 당연히 기분이 나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일로 만족해서 왕자를 데려오지 못하게 한 걸 잊어 주기만 해도 유제니는 만족했다. 하지만 동시에 왕비가 먼저 바라는 게 있다면 말하라는 게 얼마나 큰 기회인지도 알았다.

유제니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전하, 이번 일이 전하께서 원하던 대로 완전하게 이뤄지지 않은 것을 압니다. 당연히 보답을 받을 정도는 아닙니다.”

그래? 사이실리아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모든 일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완전하게 이뤄지기 어렵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유제니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다음번에, 제가 전하의 바람을 완벽하게 이뤄 드리면 그때 바라는 걸 말씀드려도 될까요?”

사이실리아의 얼굴에 흥미롭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의 바람을 어떻게 완벽하게 이뤄 준다는 걸까. 그리고 바라는 게 뭘까.

궁금하지만 사이실리아는 때로는 물어보지 않는 게 나은 게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녀는 잠시 유제니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기대하겠네.”

왕비 일행이 배를 나섰다. 엘리엇은 그때까지도 배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물론 유제니가 왕비와 함께 들어갈 때와 달리 그가 앉은 테이블 앞에는 상당한 양의 서류가 놓여 있다는 점이 달랐다.

그리고 테이블 맞은편에 엘리엇의 부하가 앉아 있다는 점도.

“배를 걱정한 건가, 레이디 비스컨을 걱정한 건가.”

왕비는 서류를 보던 엘리엇이 자신을 보고 일어나자 웃으며 물었다. 엘리엇은 왕비의 농담에 유제니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저는 레이디 비스컨을 잘 압니다. 그녀는 걱정할 필요가 없죠.”

그녀가 완벽하게 할 거라 믿었다는 말에 왕비는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배를 걱정했다는 말이다. 약한 소리를 하는군.

왕비는 번즈 백작의 재력이 어느 정도인지 대략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을 수도 있겠지. 그러니 배를 걱정한다는 건 엄살에 불과하다.

“진짜 계속 여기 있었어요?”

왕비가 떠나자 유제니는 엘리엇의 곁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테이블에 다 마신 찻잔과 서류가 쌓여 있으니 여기 있었다는 증거긴 하다.

하지만 진짜로 배 밖에서 기다렸다고? 그녀가 왕비를 대접하는 것을?

믿을 수 없어 하는 유제니에게 엘리엇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네. 여기 있겠다고 했으니까요.”

“안 심심했어요?”

온종일 배 옆에서 서류를 봐야 했다. 더 편한 곳에서 더 쉽게 일할 수도 있었을 텐데.

엘리엇은 그렇다고 말하려다 반대로 물었다.

“원하는 바는 이루셨습니까?”

“그냥 왕비 전하를 대접한 것뿐이에요.”

“당신이 원한 게 그거였잖습니까.”

그랬다. 유제니는 왕비를 대접하고 싶어 했다. 그녀는 엘리엇을 조금 신기하다는 듯 바라봤다. 그냥 왕비가 오고 싶어 해서 들어준 거라고 생각했는데 엘리엇의 말을 들어 보니 좀 다르게 느껴졌다.

“네.”

유제니는 엘리엇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원하는 바를 이뤘다. 그냥 왕비를 흠 없이 대접하는 것뿐이지만 그게 유제니가 바라던 바였다.

“그렇다면 저 역시 만족합니다.”

유제니가 원하는 바를 이뤘다면 엘리엇은 그걸로 만족한다. 그의 모든 것은 그녀를 위해 존재하니까.

“아, 그리고.”

가볍게 유제니의 손을 쥐었던 엘리엇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허락도 없이 유제니의 손을 잡았다. 그는 그녀가 이 일로 불쾌해하지 않길 바라며 말을 이었다.

“강 상류 쪽으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올리버!”

그제야 유제니는 왕비가 오기 직전 올리버에게 위험이 닥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것을 떠올렸다. 왕비를 대접하느라 깜빡했다.

놀라는 그녀를 다독이듯 엘리엇이 말했다.

“비스컨 남작은 괜찮습니다. 다친 곳도 없다더군요.”

이미 올리버에게 닥친 위험이 사라졌다는 말이다. 맙소사. 라넌 경의 맞았던 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유제니는 엘리엇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그녀는 고개를 번쩍 들고 엘리엇을 바라보며 물었다.

“비스컨 남작은?”

그건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유제니의 지적에 엘리엇은 아무 말도,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게 더 유제니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클레어는요? 그녀는 괜찮은 거죠?”

혼자서 올리버를 구하러 갔다. 그리 큰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다친 곳도 없다는 말투가 꼭 큰일이 생길 뻔했다는 것처럼 들린다.

“괜찮습니다.”

엘리엇은 유제니를 안정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불안해하는 그녀에게 조용히 덧붙였다.

“팔을 조금 다쳤다는군요.”

다음 순간, 유제니는 마차로 달려가고 있었다.

* * *

“당신은 말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유제니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클레어가 엘리엇을 비난했다.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서 차를 마시던 그는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설마 이게 나한테는 달가운 상황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다친 클레어의 팔이 나을 때까지 비스컨 저택에서 지내게 하는 건 절대 엘리엇이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덕분에 유제니와의 즐거운 대화 시간에 클레어가 합세해 버리고 말았으니까.

“이거?”

그때, 응접실 문이 열리고 올리버가 들어왔다. 그의 얼굴을 본 클레어의 얼굴이 일그러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올리버는 들고 온 작은 선반 같은 것을 클레어가 앉아 있는 소파의 손잡이에 끼웠다. 간이 테이블인 모양이다.

“딱 맞네.”

그렇게 말한 올리버는 자연스럽게 클레어의 맞은편에 앉았다. 유제니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며 올리버의 어깨에 손을 한 번 얹었다.

“고마워, 올리버.”

“나 때문에 다친 건데 당연한 일이지.”

클레어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그녀는 올리버 때문에 다친 게 아니다. 비스컨 남작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 이유는 오직 하나. 레이디 비스컨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 봤자 이 닮지 않은 남매는 신경도 쓰지 않기 때문에 클레어는 입을 다물었다.

“그 사람들, 감봉 처분이래.”

그때, 올리버가 입을 열었다. 그 사람들? 클레어보다 유제니가 먼저 알아들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화를 내기 시작했다.

“말이 돼? 사람을 공격하고 다치게 했는데 고작 감봉?”

그것도 심지어 고작 한 달 감봉이다. 기사끼리의 싸움을 말리지 않은 죄로.

올리버를 공격하려던 기사들의 이야기다. 사일록 경을 따라온 기사들은 한 달 감봉 처분을 받았다. 다들 부유한 집안이니 한 달 감봉 따위는 피해라고 할 수도 없다.

문제는 사일록 경과 라넌 경인데.

“클레어가 삼 개월 휴직인데?”

억울하다는 듯한 유제니의 말에 클레어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신경 쓰지 않는다. 사일록 경과 그 무리에게 대항했을 때 기사단에서 쫓겨나는 것도 각오했다.

“라넌 경은 대로에서 결투를 했으니까요.”

얄미운 엘리엇의 말에 유제니가 그를 노려봤다. 그는 재빨리 두 손을 들어 보이고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싸움을 한 건 사일록 경과 라넌 경이니까 두 사람이 더 큰 벌을 받는 거다. 남은 기사들은 그냥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니 말리지 않은 벌로 한 달 감봉 처분이고.

“사일록 경은?”

유제니는 그래도 사일록 경이 더 큰 벌을 받았을 거라는 기대감에 올리버에게 물었다. 그가 더 큰 벌을 받긴 했다. 올리버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좌천.”

“좌천? 기사직에 좌천이 있어?”

“마이너가 있습니다.”

다시 한번 엘리엇이 끼어들었다. 기사단은 메이저와 마이너로 나뉜다. 마이너는 메이저의 보조적인 일을 한다. 실력이 좋다면 메이저로 올라갈 수 있고.

“그건….”

유제니는 잘됐다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남의 불행을 너무 기뻐하는 건 좋지 않은 행동이니까.

“이 일로 배우는 게 있겠지.”

유제니는 그렇게 말하고 찻잔을 들어 올렸다. 사일록 경이 좌천으로 끝난 데에는 클레어의 덕분도 있었다. 그녀가 사일록 경과 그 동료들이 올리버를 공격하는 걸 막았기 때문에 기사들의 무단 결투 정도로 끝난 거다.

클레어가 막지 않았다면 기사들의 민간인 린치 사건이 됐겠지. 그것도 그냥 민간인이 아니라 귀족이다.

“글쎄요.”

엘리엇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대낮에 귀족을 린치하려 한 놈들이다. 과연 이 정도로 멈출까.

그는 조만간 사일록 경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게 무슨 소리냐는 유제니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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