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25 – 2
“샤일록 경!”
그가 검을 뽑자 깜짝 놀란 기사들이 사일록 경을 말리려 했다. 그들은 비스컨 남작을 손보려는 거지 죽이려는 건 아니다.
게다가 기사가 누군가를 해친다면 문제가 된다. 심지어 비스컨 남작에게는 무기도 없지 않은가.
“사일록 경!”
놀란 기사들이 사일록 경의 어깨를 붙잡았지만, 그는 오히려 기사들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검을 올리버의 뺨에 들이대며 말했다.
“전부터 네 면상이 마음에 안 들었어.”
번즈 백작이 나타나기 전까지, 아니, 나타난 지금도 올리버 비스컨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교계 최고의 미남이다.
화려한 금발과 푸른색의 눈동자. 날렵한 콧날과 남성적인 턱. 늘 장난스러운 미소를 담고 있는 비스컨 남작의 얼굴은 보는 사람의 기분을 즐겁게 만들곤 했다.
오죽하면 매 사교 시즌마다 미혼 여성은 물론 기혼 여성들까지도 비스컨 남작의 등장을 고대할까.
사일록 경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난한 비스컨 백작가인 주제에 뺀질뺀질한 얼굴로 여자들을 홀리고 다는 것도, 그가 좋아한 여자가 비스컨 남작에게 마음이 있는 것도.
“어디 그 잘난 낯짝이 엉망이 돼도 여자들이 널 좋아하나 보자.”
“샤일록 경!”
사일록 경이 그렇게 말하며 기사들의 만류에도 올리버의 뺨에 검날을 갖다 댔다. 왼쪽 이마에서 오른쪽 입꼬리까지 흉터가 생기면 어느 여자가 좋아할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히죽였다.
너무 집중한 나머지 사일록 경은 이쪽으로 빠르게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는 듣지 못하고 있었다. 말발굽 소리에 다른 기사들이 당황해서 뒤로 물러난 순간, 뭔가가 사일록 경의 검에 부딪혔다.
탁!
뭔가가 검에 부딪히는 바람에 샤일록 경은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그건 올리버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는 검에 뭔가가 부딪혀서가 아니라 샤일록 경이 물러나서였지만.
하마터면 얼굴에 엄청난 흉터가 생길 뻔했다. 가까이에서 샤일록 경의 눈을 본 올리버는 그가 진심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저 미친놈이!
“라넌 경.”
하지만 올리버가 화를 내기도 전에 사일록 경이 먼저 클레어를 발견했다. 그가 부른 이름에 올리버는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기사들은 클레어를 발견한 뒤였다. 미친 거 아냐? 그들은 감히 클레어가 자신들의 일을 방해했다는 사실에 놀라 사일록 경이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도 잊어버렸다.
“감히!”
“제정신이야?”
“여긴 어떻게 알고 왔지?”
자신의 일을 막았다는 사실에 화가 난 사일록 경이 소리쳤다. 그 뒤로 기사들도 한마디씩 거들었지만, 클레어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녀는 올리버를 내려다보고 그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곳만은.
늦지 않은 모양이군. 클레어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디 비스컨에게 비스컨 남작을 무사히 구해 오겠다고 했다. 그러니 비스컨 남작이 어디 한 군데 상한 곳 없이 데려가야 한다.
클레어는 올리버의 상태를 확인한 뒤에야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사일록 경과 다른 기사들을 보며 물었다.
“여기서 무엇을 하십니까?”
마치 여기서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태도에 사일록 경은 피식 웃었다. 그는 클레어에게 한 번은 기회를 줄 생각으로 말했다.
“자네와 상관없는 일이네, 라넌 경. 그러니 입 다물고 떠나.”
그러고 싶다. 솔직히 말하면 클레어는 올리버가 여기서 무슨 짓을 당한다고 해도 모른 척할 자신이 있었다. 아니, 집에서 혼자 축배를 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증오해 마지않는 비스컨 남작은 그녀가 존경하고 사랑해 마지않는 레이디 비스컨의 하나뿐인 오라버니다.
멍청한 자식. 클레어는 올리버에게 그런 시선을 던진 뒤 사일록 경에게 말했다.
“기사로써 그냥 떠나면 안 될 것 같은데요.”
그녀는 기사의 딸이고 기사다. 약자를 보호하고 정의를 위해 행동하라고 배웠다. 올리버가 죽어도 상관없다고 해도 기사라는 그녀의 자긍심이 그렇게 둘 수가 없게 했다.
차라리 모르게 할 것이지.
클레어는 그녀의 맞은편에 서 있는 기사들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아예 그녀가 모르게 했다면 레이디 비스컨에게 알려 주지도 못했을 거다. 그렇다면 비스컨 남작이 죽거나 다쳤을 때 레이디 비스컨에게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됐을 텐데.
“기사니까? 네가 나보다 더 나은 기사라고 생각하나 보지?”
사일록 경의 빈정거림에도 클레어는 겁먹지 않았다. 그녀에게 가장 무서운 건 레이디 비스컨이 실망하는 거다. 클레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무기도 없는 민간인을 공격하는 것보다는 기사답다고 생각합니다만.”
“건방진 것!”
곧바로 사일록 경이 클레어를 향해 검을 겨눴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그렇다면 어디 겨뤄 보지. 누가 더 기사다운지 말야.”
“사일록 경!”
“샤일록 경!”
기사라는 건 검으로 겨루는 게 아니다. 클레어는 그렇게 말하려다 말았다. 기사는 약자를 지키는 자다. 정의를 좇고 나라와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
물론 검을 다루는 능력 역시 중요하지만, 오직 전투 기술만이 중요하다면 그건 기사가 아니라 용병이다.
하지만 사일록 경이 그걸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지금 클레어가 설명한다고 해서 그가 들을 리도 없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사일록 경의 뒤에 선 기사들에게 말했다.
“여기서 멈추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정 원한다면 기어서 내 다리 사이로 지나가 보시지. 그러면 생각해 볼 수도 있어!”
싸우고 싶지 않다는 클레어의 완곡한 말에 사일록 경이 소리쳤다. 클레어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올리버를 쳐다봤다.
여기서 민간인은 비스컨 남작뿐이다. 그가 싸움에 휘말려 다치기라도 하면 무사히 구해 내겠다고 약속한 레이디 비스컨께 면목이 없다.
하지만 올리버는 클레어의 시선을 오해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내가 상대하지!”
“뭐?”
얼떨떨한 기사들의 반응에 올리버는 클레어의 앞을 막아서며 다시 말했다.
“나랑 싸워! 이 양심도 없는 놈들아! 어떻게 여자랑 싸울 생각을 하냐?”
아오. 클레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반대편 손으로 올리버를 밀어 내며 말했다.
“물러나 있어, 비스컨 남작.”
“뭐?”
“여기서 무기를 안 든 민간인은 당신뿐이야. 당신이 다치면 레이디 비스컨께 얼굴을 들 수가 없다고.”
뭐라고? 가차 없기까지 한 클레어의 말에 올리버의 입이 딱 벌어졌다. 날 구하러 온 게 유제니 때문이었어?
물론 클레어는 그가 충격받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검을 뽑으며 덧붙였다.
“게다가 나만 싸우면 기사들끼리의 다툼이지만 당신이 끼면 일반인이 휘말린 게 된다고.”
그것 역시 사실이다. 기사들끼리의 다툼과 거기에 일반인이 휘말리는 건 처벌의 정도가 크게 달라진다. 올리버가 어물어물하는 사이 클레어는 그를 밀어 내고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캉!’ 하고 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짜 공격했어? 올리버는 사일록 경이 진짜로 그와 클레어를 공격했다는 사실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른 기사들도 예상 못 한 상황 때문에 당황해하는 게 그의 눈에도 보였다.
“건방진 년.”
사일록 경의 욕설에도 클레어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녀는 더한 욕도 들어 봤다. 그리고 더한 대우를 받는 사람을 곁에서 모셨다.
그런 대우를 받을 사람이 아니었는데.
“칭찬으로 받아들이죠.”
클레어는 그렇게 말하며 힘을 줘서 샤일록 경의 검을 뿌리쳤다.
“어디 그 솜씨 좀 보지!”
순간적으로 밀렸지만, 샤일록 경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검을 휘두르자 클레어는 재빨리 몸을 뒤로 빼서 피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올리버를 잡아당겨 그의 몸도 검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올리버에게 신경 쓰느라 샤일록 경의 눈에 허점이 보였다. 그게 네 약점인가 보지? 샤일록 경은 히죽 웃으며 올리버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으악!”
깜짝 놀란 올리버가 뒤로 펄쩍 뛰는 것과 동시에 클레어가 샤일록 경의 검을 쳐 냈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샤일록 경의 검이 튕겨 나갔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대로 다시 올리버의 얼굴을 향해 찔러 가는 샤일록 경의 검을 클레어가 쳐 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검이 올리버의 귀를 찔렀다.
“사일록 경!”
올리버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지켜보던 기사들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손봐 준다고 해도 주먹으로 때리는 거였지 검으로 찌르는 건 그들이 봐도 아니다.
맨주먹으로 때리는 것과 검으로 공격하는 건 아주 큰 차이가 있단 말이다.
하지만 이미 올리버와 클레어를 혼내 주겠다는 생각에 눈이 뒤집힌 사일록 경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연거푸 올리버의 얼굴을 향해 검을 휘둘렀고 클레어가 막아 냈다.
챙, 챙, 챙!
세 번에 걸쳐 막아 냈지만 사일록 경은 집요했다. 그렇다고 클레어가 사일록 경을 다치게 할 수도 없다. 이 싸움은 아무 피해 없이 끝나야 한다. 그래야 기사단에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사일록 경은 피해 없이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어떻게든 비스컨 남작의 잘난 낯짝을 망가트리고 라넌 경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생각뿐이었다.
“라넌 경.”
가까스로 사일록 경의 검을 피해 낸 올리버가 클레어를 불렀다. 상대는 이렇게 집요하게 공격해 대는데 이쪽은 상대방을 공격할 생각이 없다. 그는 클레어가 아무도 다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처음 계획대로 그가 기사들에게 몇 대 맞아 주는 게 나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클레어는 올리버의 표정을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그녀는 이어진 사일록 경의 공격을 올리버가 피하려 하지 않자 혀를 찼다.
그리고 팔을 내밀어 올리버의 얼굴을 가렸다.
“라넌 경!”
“사일록 경!”
‘콱’ 하고 클레어가 찬 팔 보호구에 샤일록 경의 검이 꽂혔다. 검날이 단단한 가죽에 파고드는 감각에 그는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그의 눈앞에서 클레어가 팔을 뻗어 검을 막고 있었다.
샤일록 경의 검이 클레어의 팔에 파고든 것처럼 보인다. 샤일록 경의 손에 느껴지는 감각도 그러했다.
그가 놀라서 멈칫한 사이, 클레어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검을 떨어트렸다. ‘쨍그랑’ 하는, 검날이 도로에 부딪히는 소리가 정적 속에서 울려 퍼졌다.
“라넌 경!”
놀란 올리버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클레어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빈 오른손을 주먹 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샤일록 경의 얼굴을 후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