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24 – 5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클레어도 알았다. 왜 아니겠는가. 간신히 기사단에 어울리게 됐는데 기사단이 손봐 주려는 상대를 구해 내겠다니.
기사단을 적으로 돌리는 건 물론이고 클레어는 올리버 비스컨이 싫었다. 최근 그에게 도움을 받은 건 맞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증오가 상쇄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이유에도 클레어는 자신이 나서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번즈 백작은 절대로 레이디 비스컨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특히나 지금처럼 그녀가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면.
그리고 그건 그녀도 바라는 바였다. 손톱만큼의 위험이라도 레이디 비스컨 곁에 도사리고 있다면 그녀나 번즈 백작이 유제니를 지켜야 했다.
“에스컬레 경을 불러오기엔 늦어요. 그렇다면, 제가 갈게요.”
여기서 누군가가 레이디 비스컨의 곁에서 멀어져야 한다면 이번에는 클레어가 되는 게 나았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엘리엇을 쳐다봤다.
번즈 백작은 늘 그렇듯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꿈에서도 그랬다. 그가 제대로 된 표정을 짓는 건 고귀한 레이디 비스컨의 곁에서뿐이었다.
“하지만 그럼 당신의 위치가 곤란해질 거예요.”
그 상황에서도 유제니는 클레어를 걱정하고 있었다. 자신의 오라버니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유제니의 다정함에, 그리고 그녀가 걱정해 줄 만큼 그녀와 자신의 사이가 가까워졌다는 사실에 클레어는 만족했다. 유제니의 신임을 얻을 수 있다면 기사단 따위는 상관없다. 어차피 거기도 유제니를 지키기 위해 들어간 거니까.
“괜….”
괜찮다고 말하려던 클레어는 번뜩 떠오른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사실은 꼭 이루고 싶은 게 하나 있다. 그녀가 꿈에서 깨어나 기사가 되기로 결심한 그 순간부터 이뤄졌으면 하고 바라던 꿈.
“그렇다면, 손수건을 주세요.”
“네?”
“아니면 리본도 좋아요.”
무슨 소린가 하던 유제니의 얼굴이 ‘앗’ 하고 깨달은 표정으로 변했다. 그리고 곧 진심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기사는 충성을 맹세한 상대에게 손수건이나 리본을 받아 자신의 무기나 신체 일부에 묶어 두곤 한다. 오래전에 전쟁에 나가는 사람의 안전을 비는 의미로 손수건을 주던 데서 비롯된 행위다.
하지만 지금은 손수건을 받는 기사가 거의 없다. 현재 발시안에 공식적인 기사단은 국왕과 국왕의 가족을 위한 기사단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축제가 시작되면 축제에서 열리는 시합에 나가는 사람들이 연인에게 손수건이나 리본을 받아 팔에 감고 시합에 임하기도 한다. 그게 변질돼서 한 사람이 여러 개의 리본을 감고 있거나 같은 가문에서 나온 사람들이 같은 리본을 감고 있기도 한다.
어느 쪽이건 유제니와 클레어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지금은 축제도, 시합도 아니고 두 사람은 연인도 아니니까.
“그런 의미로 요청한 게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클레어는 놀라는 유제니의 표정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유제니를 사랑해서 손수건을 달라고 한 게 아니다. 그게 증표가 되었으면 했기 때문이다.
“충성 서약을 한다면 당신에게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할 수 없다. 흰 사자 기사단은 국왕의 가족을 보호하는 기사단이고 유제니는 국왕의 가족이 아니니까.
그제야 유제니는 클레어가 꿈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꿈에서 그녀는 유제니의 말동무라고 했다. 귀부인의 가장 가까운 존재. 신하이나 친구에 가까운 자.
“미안해요. 손수건은 엘리엇에게 받은 거라.”
오늘 가지고 온 손수건은 엘리엇이 선물해 준 거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좋은 거라 이렇게 중요한 날에 사용하곤 한다.
가볍게 실망하는 클레어 앞에서 유제니는 자신의 머리를 묶은 리본을 풀었다.
“유제니.”
놀란 엘리엇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동시에 유제니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어깨와 등으로 쏟아져 내렸다. 밝은 금발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게 꼭 폭포수가 떨어지는 것 같아서 엘리엇과 클레어는 말을 잃고 유제니를 쳐다봤다.
“대신 리본을 줄게요.”
클레어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리본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유제니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비스컨 남작을 구해 오겠습니다.”
결연하기까지 한 태도에 유제니는 오라버니가 몇 대 맞아도 된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진짜로 그녀의 오라버니는 몇 대 정도는 맞아도 된다.
무슨 배짱으로 기사단과 척을 진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유제니의 리본을 손목에 감은 클레어는 재빨리 말에 올라타 강 상류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안 미워해요.”
떠나는 클레어를 잠시 지켜보던 유제니가 불쑥 말했다. 여전히 엘리엇의 시선이 그녀에게 못 박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엘리엇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그가 걱정하고 있던 것을 들켰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엇 번즈가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 아니, 두 번째로 두려워하는 것.
유제니에게 미움받는 것이다.
“미워하셔도 괜찮습니다.”
약간 쉰 목소리로 엘리엇이 말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더 많을 거다. 그는 유제니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지만 그게 그녀의 안전과 맞바꿀 일이라면 세상을 구한다 해도 거절할 테니까.
“정말요?”
유제니의 질문에 엘리엇은 결국 다시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머리를 풀어 헤친 채 그녀는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가 그를 빤히 쳐다볼 때면 엘리엇은 늘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이 들곤 했다. 그녀에게서 도망치라고 속삭이는 이성과, 이성 따윈 개나 줘 버리라는 본능.
그는 그렇다고 말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유제니 앞에서 거짓말을 한다는 건 그리 쉽지 않았다.
“제가 어려워하는 게 뭔지 압니까?”
엘리엇은 한숨 쉬듯 물었다. 뭔데요? 유제니가 여전히 그를 쳐다본 채 묻자 그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당신에게 거짓말하는 겁니다.”
“저한테요?”
그럼 다른 사람에게는 어쩌냐는 유제니의 반응에 엘리엇은 말없이 웃었다.
그는 거짓말을 아주 잘한다.
하지만 상대가 유제니가 되면 그게 아주 어려웠다. 그녀는 항상 그의 속을 읽고 있는 것 같았고 그는 그녀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게 양심에 찔린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신기한 일이지.
엘리엇은 다시 클레어가 떠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며 생각했다.
양심에 찔린다니. 그는 양심 같은 게 없다. 그의 양심은 이미 아주 오래전에 사라졌다. 닳고 닳다 보면 언젠가 스러지듯, 그렇게 사라졌다.
“절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윽고 엘리엇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약간 잠긴 듯한 목소리에 유제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안 미워해요. 날 그렇게 많이 도와줬는데 어떻게 미워하겠어요?”
엘리엇은 어떻게 보면 유제니의 은인이나 다름이 없다. 그를 미워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하지만 그녀의 다정한 말에 엘리엇은 쓰게 웃었다. 그가 한 짓을 알면, 그가 어떤 것을 숨겼는지 알면 유제니는 그를 미워하다 못해 증오할 거다.
“미워해도 괜찮습니다.”
방금 전에는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더니 이번에는 미워해도 괜찮다고 한다. 유제니는 그가 무슨 소릴 하는지 알고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고 엘리엇은 피식 웃었다.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게 당신에게 더 낫다면요.”
유제니가 행복하길 바란다. 그녀가 다시는 그 지옥을 겪지 않길 바란다.
아니, 아니다.
엘리엇은 멀리서 달려오는 마차를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유제니가 그런 지옥에서 헤쳐 나오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괜찮다 해도, 견딜 수 있다고 해도 그가 견딜 수가 없었다.
두 번 다시 그녀가 다친 것을 숨겨야 하는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아니, 아예 그녀가 다치지 않아야 한다.
“머리를 묶는 게 좋겠습니다.”
엘리엇은 자신의 크라바트를 풀어 유제니에게 건네며 물었다. 여성은 집 밖에서 머리를 풀고 있는 게 예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동시에 남성은 집 밖에서 크라바트를 하고 있어야 한다. 유제니가 망설이자 엘리엇은 그녀의 손에 크라바트를 쥐여 주며 말했다.
“전 저쪽에 물러나 있을 테니까요.”
왕비와 일행에게 보이지 않게 있겠다는 말이다. 그의 설득에 유제니는 결국 엘리엇의 크라바트로 머리카락을 묶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하늘색 드레스와 그의 남색 크라바트가 꽤 잘 어울린다.
“레이디 비스컨.”
마차가 도착하자 왕비는 배 앞에 서 있는 유제니를 보고 반갑다는 듯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뒤로 오늘 시중을 들 하녀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초대해 줘서 고맙네.”
“누추한 곳까지 방문해 주시니 제가 영광입니다.”
예의에 한 치도 어긋남이 없는 태도에 왕비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자고 말하려다 저쪽에서 어느새 이만큼 다가온 엘리엇을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번즈 백작. 자네도 와 있는 줄 몰랐군.”
“저는 밖에 있을 겁니다.”
인사보다는 안에 안 들어갈 거라는 말에 왕비의 얼굴에 재미있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유제니를 한 번 돌아보고 물었다.
“번즈 백작도 못 들어가나? 이 배가 그의 것이라고 들었는데.”
“네. 이 배의 이용권은 제가 가지고 있으니까요.”
배 주인이라 해도 가차 없다는 말에 왕비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엘리엇의 목이 비어 있는 것을 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유제니의 머리카락을 묶은 리본이 크라바트라는 것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으며 물었다.
“번즈 백작이 자네에게 많은 것을 빌려주는군.”
“제게 부족한 것이 많아서 그런가 봅니다.”
흠잡을 곳 없는 대답이다. 왕비는 엘리엇과 유제니를 번갈아 바라본 뒤 깔깔 웃으며 배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에 남은 유제니는 재빨리 엘리엇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저쪽에 물러나 있는다면서요?”
“아, 거짓말이었습니다.”
이 남자가?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유제니는 이를 갈며 물었다.
“나한테 거짓말하는 게 어렵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랬다. 엘리엇은 씩 웃었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대며 말했다.
“전 어려운 일에 도전하는 걸 즐기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