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24 – 3
“저 땀나요.”
왕비님이 방문하시기 전, 로렌이 손바닥을 쫙 펼치며 내게 다가와서 말했다. 손바닥 말야?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닦고 오면 되잖아?”
넘치는 게 물이고 수건이다. 심지어 향이 다른 비누도 세 가지나 준비해 놨다. 옷이나 화장품 같은 건 개인 지참이지만 잊어버리고 왔거나 분실한 사람을 위해 간단한 화장품도 마련해 놓았다.
그러니 로렌이 손에서 땀이 난다면 닦으면 된다.
하지만 땀이 나는 부위는 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왕비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는데 어떻게 샤워를 해요?”
“땀나는 게 손이 아니었어?”
“온몸에서 다 나요! 심지어 발바닥에서도 나는 것 같아요!”
맙소사. 어이없어하는 내 앞에서 로렌은 의자에 앉더니 구두를 벗었다. 그리고 손부채로 발바닥에 바람을 부치며 말했다.
“이러다 왕비님 앞에서 땀에 홀딱 젖어 있겠어요.”
“그럴 리 없으니 걱정하지 마.”
“제가 실수하면 어쩌죠? 왕비님이 저 때문에 화가 나면요?”
그럴 리 없다. 나는 왕비님은 자신의 존재에 긴장해 실수하는 사람을 자주 봤을 거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그랬다간 로렌은 아예 벌벌 떨지도 모른다.
“그럼 내가 더한 실수를 해서 막아 줄게.”
“뭐라고요?”
로렌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어이없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웃을 수 있다면 된 거지.
나는 긴장이 풀린 로렌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자 저 멀리서 줄리아가 다가오며 물었다.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요?”
긴장해서 온몸에서 땀이 난다던 로렌과 달리 줄리아는 꽤 태평해 보였다. 로렌 역시 그걸 느낀 모양이었다.
“줄리아, 긴장 안 돼?”
“긴장? 왜?”
“왕비님이 오시잖아. 실수라도 하면 어떻게 해?”
“아, 걱정하지 마. 왕비님 좋은 분이야.”
좋은 분인 거랑 실수에서 관대한 건 좀 다른 이야기일 것 같지만 지금 여기선 입 다물고 있는 게 좋을 것 같다. 내가 가만히 있자 로렌이 나를 한 번 쳐다보고 다시 줄리아에게 물었다.
“좋은 분이야?”
“응. 어릴 때 왕비님 드레스 자락에 차를 엎은 적이 있거든. 그런데 봐 봐.”
어, 기억난다. 줄리아가 아주 어릴 때였다. 왕비님이 에스컬레 경과 대화 중이었고 줄리아가 차를 내가겠다며 우겨서 쟁반을 들고 가다가 엎었다고 들었다.
다행히 왕비님은 다치지 않았지만, 드레스 자락이 좀 젖었고.
줄리아는 사색이 된 로렌 앞에서 턱을 들어 자신의 목을 보여 줬다. 그리고 씩 웃으며 말했다.
“내 목 붙어 있잖아.”
“세상에, 줄리아!”
어이없다는 로렌의 호통에 나는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줄리아가 저런 성격이라 다행이야.
“레이디 비스컨.”
줄리아와 이야기를 나눈 로렌이 깔깔대고 웃기 시작했다. 그때, 직원 한 명이 다가와서 내게 말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이요?”
나보다 먼저 반응한 건 로렌이었다. 깜짝 놀란 그녀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다시피 이야기하는 바람에 나도 깜짝 놀랐다.
나는 로렌에게 침착하라고 말한 뒤 직원에게 물었다.
“누구예요?”
아직 왕비님이 오시려면 시간이 좀 더 남았다. 약속했던 시간보다 삼십 분 일찍 도착한다 해도 여유 있는 시간이다.
아니나 다를까 직원은 놀란 로렌에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내게 말했다.
“번즈 백작님이십니다.”
상황이 어떤지 살펴보러 온 모양이다. 여긴 그의 배이기도 하니까. 나는 아직도 긴장을 풀지 못하는 로렌을 한 번 쳐다보고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
“유제니.”
엘리엇은 언제나 그렇듯 완벽한 자태로 서 있었다. 그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채 출입구 옆에 놓아 둔 의자에 삐딱하게 기대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무채색이었던 주변이 그 순간 화사하게 색으로 물드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저도 모르게 멈춰 서서 엘리엇을 바라봤다.
“왜 그러십니까?”
“아뇨, 아니에요.”
늘 잘생겼다고 생각하지만, 오늘은 유독 더 잘생긴 것 같단 말이지.
오늘 그가 입은 옷도 기가 막힐 정도로 잘 어울렸다. 하늘색 재킷과 바지에 안쪽에는 군청색의 조끼를 받쳐 입고 있었는데 흰 셔츠 때문에 그의 얼굴에 빛이 나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군청색의 모자와 지팡이 때문에 더더욱 신사처럼 보였는데, 잠깐. 지팡이?
“웬 지팡이에요? 어디 다쳤어요?”
설마 다리를 다쳤나? 나는 엘리엇이 들고 있는 지팡이에 놀라 그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아까 의자에 기대 있었던 건가?
놀라는 내게 엘리엇은 멀쩡하다는 표정으로 손을 펼쳐 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아니요. 그냥 들어 봤습니다. 이게 유행이라길래요.”
“지팡이가요?”
그런 유행은 들어 본 적도 없다. 아니, 잠깐. 어쩌면 유행하는지도 모르지. 나는 그런 거에 좀 느린 편이니까. 유행이나 소문 같은 거.
나는 가만히 엘리엇이 든 지팡이를 쳐다봤다. 이 남자는 대체 안 어울리는 게 뭔지 모르겠네. 나는 새 모양으로 조각된 지팡이의 손잡이를 보고 가볍게 감탄했다. 저 눈, 진짜 보석이다. 저 정도 크기면 꽤 가격이 나가겠지.
“보시겠습니까?”
내가 지팡이에 관심을 갖자 엘리엇은 지팡이를 내게 내밀며 물었다.
“괜찮아요. 그보다, 배는 아무 문제 없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배요?”
거절하자 엘리엇은 지팡이를 거둬들이며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이 배 말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왕비님께서 오셨을 때 아무 문제 없도록 잘 관리해 놨어요. 망가진 것 하나 없고 안전 점검도 해 놨으니 괜찮을 거예요.”
여전히 엘리엇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음, 보여 줘야 하나?
사실, 문을 닫은 다음에는 언제든지 와서 봐도 된다고 말했다. 이건 엘리엇의 배니까. 자신의 배를 내가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지 확인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엘리엇은 단 한 번도 확인한 적이 없었다. 오늘, 왕비님이 오시는 이때까지도.
그는 항상 배에 방문해서 배 밖에서 나를 만났을 뿐이다.
“혹시 제가 배 상태를 확인하려고 찾아왔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어진 엘리엇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거 아닌가? 반대로 내가 그에게 배를 빌려줬다면 며칠에 한 번 정도는 확인했을 거다.
아니, 잠깐.
엘리엇이 방문할 만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나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왕비님 만나러 왔어요? 미안해요. 그래도 안에 들여보낼 수는 없어요.”
그런 부탁을 하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여자들뿐 아니라 남자들도 내게 편지를 보냈다. 왕비님과 만날 수 있게 배에 초대해 달라고.
여자들이면 모르지만, 남자들은 안 된다. 금남 구역이라 왕자님의 출입도 거절했잖아. 물론 여자들도 거절했지만.
“아닙니다.”
엘리엇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내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는 당신을 보러 온 겁니다, 유제니.”
아, 그런 이유도 있었군. 나는 뒤늦게 그가 나를 보러 온 걸 수도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잘할 테니.”
한 시간쯤 전에 어머니와 올리버도 왔다 갔다. 내게 왕비님을 잘 대접하라고 신신당부를 했지.
나는 엘리엇도 그런 당부를 할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당신이 잘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잘 못 해도 상관없지만요.”
“어, 정말요?”
못해도 상관없다고? 정말? 못하면 왕비님이 당장 이 배를 치우라고 할 수도 있는데?
엘리엇은 놀란 내 표정을 보고 다시 빙그레 웃었다. 그는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좀 못하면 어떻습니까. 세상이 망하는 것도 아닌데.”
“허.”
놀랍게도 기분이 좀 편안해졌다. 오, 세상에.
나는 그제야 나도 좀 긴장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긴장하지 않은 줄 알았는데 긴장해 있었던 모양이다.
이 배는 내가 처음으로 시작한 사업 비슷한 것이다. 여기에는 돈뿐만 아니라 로렌의 미래와 내 명예가 걸려 있다. 왕비님의 반응이 좋지 않다면 우리는 망하게 되겠지.
하지만 방금 엘리엇이 말하지 않았던가. 망하면 좀 어때. 세상이 망하는 것도 아닌데.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위안이 됐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엘리엇을 올려다봤다.
“맞아요. 좀 못하면 어때요. 망하면 로렌에게 다른 일을 구해 주면 되죠.”
“당신이 원하신다면 이런 배 정도는 얼마든지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다정한 엘리엇의 말에 마음이 간질간질해졌다. 나는 깊게 숨을 내쉬고 엘리엇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필요하면 부르세요. 여기 있을 테니까요.”
하하. 정말 다정한 말이었다. 로맨틱한 말이기도 하고. 하지만 나는 곧 그 말이 은유적인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엘리엇은 정말로 배 앞에 있겠다는 말이었다. 나는 어느새 하인이 그가 주문한 차를 가지고 오는 것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
“여기 있겠다고요?”
“네.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으니까요.”
“안에 들어올 생각도 없는데 왜 여기 있는 건데요?”
테이블에 차를 내려놓은 하인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내 차도 필요하냐는 시선에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사이, 엘리엇은 고개를 기울이며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당신이 있으니까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는 어이가 없어서 인상을 썼다. 그리고 여기 있어 봤자 재미가 없을 거라고 말하려 했다.
정말로 재미없을 거다. 나는 왕비님과 배 안에 있을 거니까. 엘리엇을 살펴보러 배 밖으로 나올 여력이 없다.
하지만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멀리서 거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유제니!”